161. 재방문 (2)
바누스 장관은 바쁜 와중에도 김용수 대사의 적극적인 구애에 결국 만찬에 응했다.
그 배경에는 분명 내 영향력도 있었단 걸 잊지 않도록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며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메뉴는 결정했나요 장 셰프?”
“네. 거의 결정했습니다. 아마 바누스 장관님이라면 분명 이 의미를 알아차리실 수 있을 겁니다.”
“안되면 내가 생색을 좀 내겠습니다. 대통령 만찬에서만 사용하는 음식들을 한국식으로 풀어낸 거라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용수 대사님이 또 도와주실 일이 있습니다.”
“뭔가요?”
이번 만찬을 위해서 본부의 도움을 살짝 받을 수 있었다.
최근 몆 년간 한국 대통령이 참석했던 오, 만찬들의 메뉴 목록을 요구했다.
덕분에 청와대나 외부 호텔에서 진행했던 메뉴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김용수 대사가 2년간 수집한 바누스 장관의 정보가 반드시 필요했다.
“한국엔 파나르처럼 꼭 대통령 만찬에만 쓸 수 있는 음식 같은 건 없지만 공통점들이 있긴 하네요.”
“그래요? 무슨 공통점이요?”
청와대에서 진행한 만찬들을 분석해 본 결과 메인 요리는 대부분 비빔밥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기도 했지만 화합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 만찬에서 빼놓지 않고 제공하는 메뉴였다.
“몇 년간 오, 만찬 메뉴들이 크게 다르지 않네요. 대통령 만찬은 많이 다를 줄 알았는데.”
몇 년간의 대통령이 참석한 만찬들을 분석해 본 결과 조금은 실망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장 셰프는 호텔에서 일할 때 이런 거 해 본 적 없나요?”
당연히 있지.
회귀하기 전에는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을 간간이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땐 호텔 내부에서 전해 내려오는 메뉴들을 바꿔 가면서 제공했었다.
청와대에서는 이전에 어떤 메뉴를 제공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만찬을 진행했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주방장님들 말씀 들어 보면 호텔에서 가장 자신 있고, 잘할 수 있는 메뉴로 구성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청와대 만찬 메뉴들보다 외부에서 진행한 메뉴들이 더 신선한 느낌을 주네요.”
청와대 만찬은 쉽게 말해 모험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요리사들의 실력은 월등하게 뛰어나겠지만 메뉴를 구성하는 데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 윤활유 역할을 하겠지만 재외 공관들처럼 음식 덕분에 뭔가가 이뤄지는 경우는 청와대에서 잘 없을 테니까.
최대한 평범하게, 맛으로 승부 보는 메뉴들을 선택했다.
“보통 1~2코스는 주빈의 스토리가 담긴 음식을 제공하고, 메인은 큰 모험을 하지 않는 것 같네요.”
“그런 것 같군요. 1~2코스들은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고향에서 나는 식재료들을 이용해서 만들었네요.”
“네 맞습니다.”
“참 이 호텔과 청와대식을 적절히 섞으면 좋겠는데.”
김용수 대사는 슬며시 나를 흘겨보며 말을 했다. 혼잣말 같은 압박이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바누스 장관님의 히스토리를 좀 알려 주세요.”
“히스토리요?”
“네 다른 메뉴들은 다 방향을 잡았는데 이 소고기 내장 수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파나르 대통령 만찬에 사용되는 메뉴들은 대부분 한국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내장으로 만든 수프가 조금은 난해했다.
“이 소고기 내장을 이용한 수프가 귀하긴 해도 맛이 좋은 음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 만찬 메뉴인데.”
“그게 아니면 저희 입맛엔 영 아니던지요.”
파나르식 내장탕은 감자와 양파, 양배추를 듬뿍 넣어 오랜 시간 찌듯이 요리를 한다. 맛이 나쁘진 않지만 많이 먹기엔 조금 느끼하고, 질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장탕은 얼큰하게 먹어야 제맛인데요.”
“그러니까요. 저도 얼큰한 내장탕을 만들어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파나르 사람들에겐 너무 매울 수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한국식 내장탕은 너무 맵고, 뜨거워서 자극적이죠. 근데 바누스 장관처럼 해외 음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뽀얀 설렁탕처럼 내장탕을 끓여도 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귀한 식재료지만 한국만큼 내장을 많이 소비하지도 않아 판매하는 내장들에선 제법 잡내도 많이났다.
전처리로 최대한 없애 보겠지만 얼큰하게 끓이는 내장탕이 더 어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누스 장관님의 어린 시절이라도 좀 알게 되면 괜찮은 아이디어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요. 그런 걸 대사님이 좀 알려 주셔야 합니다.”
“그런 것쯤이야 어렵지 않죠.”
김용수 대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바누스 장관에 대해 줄줄 읊기 시작했다.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워 버린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 정도로 많은 공을 기울였단 거겠지.
“바누스 장관은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어요. 아니 성인이 되기 전까진 완전 미국인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래요? 어디서 사셨나요?”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라는 도시에서 살았어요. 들어 본 적 있나요?”
“아니요. 처음 들어 봅니다. 근데 뉴멕시코주라면 멕시코와 가깝나요?”
미국은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고. 뉴욕이나 텍사스 등 흔히 아는 대도시들을 제외하곤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마치 지도가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 미국의 지리를 설명했다.
“미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역인데 이름처럼 멕시코 국경과 가까워요. 그래서 그곳엔 멕시코 요리가 유명하죠.”
“대사님도 거기 가 보셨어요?”
“아뇨 저는 안 가 봤죠.”
“근데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하하 한국의 외교관에게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연구 대상이죠. 외교적으로도 가장 밀접한 나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외교관들은 이 정도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어요. 바누스 장관에 대해선 따로 알아본 거지만.”
“대단하시네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해박한 모습을 보니 존경스러운 눈빛이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그럼 거기서 오래 사신 거면 멕시코 음식도 좋아하시겠네요. 미국 사람들 원래도 멕시코 음식에 환장하던데.”
“말해서 입만 아프죠. 바누스 장관도 멕시코 음식에 환장합니다.”
“그래요?”
김용수 대사의 입에서 꽤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바누스 장관의 추억을 되새기게 할 수 있는 정보.
멕시코 음식이란 말을 듣고 번뜩 떠오른 메뉴가 있었다. 덕분에 멈춰 있던 퍼즐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럼 이번엔 조금 이국적인 음식 하나를 코스에 넣어야겠습니다.”
“이국적인 음식이요? 메뉴 구성은 전적으로 장 셰프 권한이니 믿겠습니다. 뭘 만들든지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김용수 대사의 믿음에 나 역시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멕시코 음식이 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한식으로 풀어내면 말이 또 달라지지. 마치 김타코처럼.
머릿속에서 레시피가 그려지고 있었다.
* * *
만찬날 당일.
바누스 장관은 이전처럼 아무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관저를 찾아왔다.
처음 방문 때 기선 제압의 의미가 강했었다면 지금은 김용수 대사와의 독대가 편하고,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서 오세요 바누스 장관님.”
“드디어 여길 오는군요. 시간 한번 내기 굉장히 힘드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요리사도 장관님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허 영광입니다. 장덕수 셰프의 음식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요.”
저번에는 이름을 알려 줘도 면전에서 화를 냈었는데, 이번엔 내 이름을 먼저 불러 주면서 악수를 건넸다.
“잘 지냈어요? 장덕수 셰프?”
“감사합니다. 장관님은 요새 많이 바쁘시죠?”
“네 정신이 없네요. 그새 파나르어도 많이 늘었네요. 이제 통역이 없이 직접 음식 설명을 들을 수 있겠어요.”
바누스 장관은 오랜 시간 외교 장관으로 있었던 만큼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관심이 많았다.
그런 바누스 장관에서 파나르어를 인정받아 기분이 뿌듯해졌다.
“그래서 오늘은 통역이나 웨이터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저희 장 셰프가 직접 서빙을 하고 음식 설명도 해 드릴 겁니다.”
“허허허 좋습니다. 온전히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겠군요. 최근에 먹었던 음식들은 그냥 음식들이 아니었어서….”
바누스 장관의 말엔 뼈가 담겨 있었다.
차기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바누스 장관에게 접대성 식사 자리를 권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터.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한들 맘 편히 밥만 먹는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김용수 대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바누스 장관과는 가까워질 만큼 가까워졌다. 더 이상 애써 봤자 괜히 역효과만 날 뿐.
그저 맘을 편하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었다.
“오늘은 편하게 식사만 하시면 됩니다.”
“하하 진심입니까?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지만 아니란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김용수 대사도 그냥 원하는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대신 배부터 좀 채우고요.”
거침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식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하는 바누스 장관도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고, 김용수 대사 역시 전혀 부담 갖지 않았다.
“바누스 장관님은 이용할 만큼 이용했습니다. 오늘은 진짜 식사만 하셔도 됩니다.”
“허허허 이제 장관으로서 단물이 다 빠졌다고 들리는데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진짜로 그런 거라면 한 단계 더 나아가셔야죠.”
“하하하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두 중년의 수위 높은 농담 몇 마디에 식탁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여느 만찬과는 다르게 단 두 명의 음식만 준비하면 되기 때문에 음식 하나하나에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음식으로는 구절판입니다.”
“오호 색깔이 굉장히 아름다운 음식이군요.”
얇게 채 썬 오이와 당근, 노랗고 하얀 계란 지단과 표고버섯, 그리고 달큰하게 양념한 불고기가 동그란 접시의 가장자리에 차례대로 올려져 있었다.
형형색색 볶아진 채소들은 바누스 장관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살짝 노란빛이 도는 밀전병까지.
이 밀전병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옥수수 가루를 섞어 반죽한 이 밀전병 한 장에 채소들을 골고루 올려 말아 드시면 됩니다.”
“오호 이거 먹는 방법이나 생김새가 딱 타코 같네요. 이 밀전병이란 것도 또띠아랑 비슷하고.”
역시 단번에 알아보는 바누스 장관이었다.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멕시코식 또띠아를 재현하게 위해 구절판의 밀전병 반죽에 옥수수 가루를 섞었다.
“이 소스도 한번 찍어서 드셔 보세요.”
겨자장과 초간장 두 개를 곁들여 여러 가지 맛을 맛볼 수 있게 준비했다.
“오호.”
제법 능숙한 젓가락질로 채소들을 올리고, 완전히 익숙한 손놀림으로 밀전병을 말아 입으로 가져가는 바누스 장관이었다.
특별히 먹는 법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먹어 본 음식처럼 금세 접시를 비웠다.
“그래도 나름 한국 음식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음식이 있는 줄 몰랐네요. 얼마 전엔 티브이에서 김타코를 만들더니, 장 셰프가 멕시코 요리 전문가였네요.”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저도 멕시코 음식들을 즐겨 먹습니다. 은근히 한국 음식과 비슷한 점이 많거든요.”
“이 구절판이라는 음식만 봐도 그런 것 같네요.”
바누스 장관은 김용수 대사가 알려 준 대로 멕시코 음식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썼다.
첫 번째로 나간 구절판에 굉장한 만족감을 느낀 바누스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건 에피타이저일 뿐.
이제부터가 진짜 바누스 장관을 위해 준비한 음식들이었다.
이 음식들의 의미를 빨리 알아채 주길 바랄 뿐.
“두 번째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