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60화 (161/202)

160. 재방문

김용수 대사는 그동안 바누스 장관에게 꽤 많은 공을 들였다. 나이가 많긴 했어도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하길 원했고, 진정으로 파나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혹여나 바누스 장관이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에겐 호재입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바누스 장관과 이렇게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장 셰프 덕분이죠.”

“제가 뭘 한 게 있다구요.”

평소엔 겸손을 떨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이번엔 확실히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김용수 대사와 바누스 장관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로 인해 만찬 한 번이 무사히 지나가긴 했어도 지금 생각해 보면 형편없는 음식들이었다.

“장 셰프도 알다시피 처음엔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도 없었어요. 오히려 기나 죽이려고 했었죠.”

“그렇죠.”

“그래서 파나르 외교부 장관이 저처럼 공관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도 아니고, 이미 퇴직까지 한 번 한 사람과 자주 만나 준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었어요.”

그게 뭐 중요하냐 싶겠지만 이들의 세계에선 그렇지 않았다. 같은 외교관이라도 이 세계에서 뼈가 굵은 상대를 좀 더 존중해 주는 게 관습이었다. 김용수 대사나 나는 그런 면에서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고.

비자를 내어 줄 때 이미 우리에 대한 배경 조사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근데 그 만찬을 계기로 바누스 장관과 만남을 점점 늘려 갈 수 있었어요.”

“에이 그건 대사님의 능력으로 만드신 거잖아요.”

“부정하진 않을게요. 나도 엄청 고생했었으니까. 근데 장 셰프가 그 물꼬를 터 주지 않았다면 아마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였다. 메뉴라도 좀 더 내 맘에 들었다면 모를까 바누스 장관과의 관계는 순전히 김용수 대사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바누스 장관도 종종 장 셰프 얘기를 하곤 해요.”

“정말요? 저를 기억하고 계세요?”

“그럼요. 장 세프 음식 자주 먹으러 가겠다고 했는데 갈 시간이 없다고 안타까워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저번에 대사들 모임 때도 바누스 장관이 다른 나라 대사들에게 장 셰프 음식을 칭찬했다던데요.”

“참 감사하네요.”

바누스 장관이 칭찬을 해 줬단 말을 듣고 더욱 안타까웠다. 겨우 그 정도로 음식으로도 기억을 해 주다니.

“바누스 장관이 차기 대통령이 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도박 한번 해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친분이 아니어도 바누스 장관 정도의 능력이면 대통령으로서도 충분하죠.”

바누스는 외교부 장관으로 평생 동안 일을 해 왔다. 그 자리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자리지만 바누스 장관은 인생 말년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은 듯했다.

결국 과감한 도전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럼 이참에 장관님 한 번 초대하시는 건 어때요?”

“그럴까요? 안 그래도 시간 좀 내 달라고 몇 번 말은 했었어요.”

“네 저도 제대로 된 만찬을 대접하지 못해서 항상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이참에 한 번 초대하시죠.”

개인적인 아쉬움도 해소하고, 차기 대선 주자인 바누스 장관과의 관계도 더욱 돈독하게 하고.

자연스레 얘기가 흘러나왔지만 꼭 필요한 만찬이었다.

“그럼 내가 약속을 한번 잡아 볼게요. 장 셰프는 무슨 음식을 만들지 한번 고민해 봐요.”

“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대사관 요리사가 가장 자주하는 보통의 업무로 돌아왔다. 예전만큼 긴장이 되진 않았지만 바로 코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볼 수 있어 더욱 신경이 쓰이는 행사였다.

게다가 이번 손님은 장관이라는 것만으로도 거물급인데 여차하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 * *

파나르에서 근무하는 각국의 대사관 요리사들과의 대화는 가장 유용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한국인 대사관 요리사들과도 자주 소통하지만 파나르의 상황에 딱 맞는 정보에 대해선 2% 아쉬울 수밖에 없다.

-다들 어떻게 지내요? 바쁘죠?

테오를 비롯해 많은 요리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그룹 채팅방에서 말을 꺼냈다. 이번 만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요즘은 다들 바쁜 거 아닌가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죠?

-알고 싶지 않아도 만찬 행사가 많이 잡히는 바람에 알 수밖에 없죠.

-저희도 똑같아요.

파나르 요리사들은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차기 대선 주자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십 회의 오, 만찬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여태 단 한 명의 대통령이었던 파나르에 첫 대통령 투표라는 큰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될 것 같대요?

-근데 투표를 하긴 한대요? 우리 대사님은 그냥 쇼만 하고 결국은 현 대통령이 유임될 거라고 하던데.

-저희 쪽 정보는 일단 투표는 열릴 거라고 하더라구요. 대신 지금 파나르 대통령도 후보로 등록되어서 경쟁을 할 거라구요.

-경쟁이 맞나요? 현 대통령이 나오면 물러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러니까요.

파나르 초유의 사태인 만큼 여러 종류의 루머가 나돌았다. 하지만 전부 소문일 뿐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된 인사들과는 한 번씩 얼굴이라도 비춰 놓기 위해 모든 대사관에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스터 장도 바쁘죠?

-네 안 그래도 저도 뭐 좀 여쭤보고 싶어서요. 저희는 바누스 외교부 장관을 초대하거든요.

-아 그 장관님도 유력한 후보죠?

-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있어서 제대로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서요.

-다들 정신이 없으시겠네요.

딱 맞는 정답을 찾진 못해도 요리사들끼리 대화만으로도 충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꼭 한식이 아니라도 반응이 좋았던 음식들이면 한 코스 정도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아니면 한국식으로 약간 변형을 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음식 얘기가 아니더라도 이런 수다를 나누는 게 마냥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

-바누스 장관이라는 사람 미스터 장의 요리 칭찬했던 사람 아닌가? 우리 대사님이 말했던 것 같은데.

-맞아요. 우리 대사님도 그 얘길 했었거든요. 요리사 한 명 때문에 한국 대사관 입지가 꽤 많이 올라간 것 같다구요.

외교부 장관인 만큼 바누스 장관은 각국 대사들과도 자주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요리사님들도 혹시 그거 아셨어요?

-뭐가요?

투정 반, 잡담 반, 정보 교환 약간의 비율로 대화를 이어 가던 중 테오가 재밌는 사실이 있다며 주제를 바꿨다.

-저 얼마 전에 관저에서 파나르 총리님을 초대해서 만찬 행사를 치렀거든요.

-와아 총리요? 역시 프랑스 대사관엔 거물급 손님들이 많이 오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총리님이 재밌는 사실 하나를 알려 주셨어요.

-뭔데요?

다들 테오의 채팅에 집중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대통령 만찬 얘기가 나왔거든요. 저희 대사님이 대통령 만찬에 초대될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죠.

-파나르 대통령 요리사 실력이 어마어마하다면서요?

-그분도 여태 한 번도 안 바뀐 걸로 아는데.

-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파나르에선 대통령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정해져 있대요.

테오가 알려 준 사실을 읽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예요? 대통령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니요?

-내가 잘못 이해했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요리사들 역시 그 뜻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귀한 식재료가 있어서 그걸 대통령만 독점하게 해 준다는 의미인가.

조선 시대의 왕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테오는 다시 한번 차근히 설명을 해 주었다.

-엄청 특별한 건 아니구요.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만 제공할 수 있는 메뉴들이 몇 개 있다더라구요.

-그럼 그 메뉴를 다른 사람들의 만찬에선 사용하면 안 되는 건가요?

-네 맞아요. 공식적인 만찬에선 그 메뉴를 포함시켜선 안 돼요. 오직 대통령이 주최하거나 대통령이 참석한 만찬에서만 제공이 가능하대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관습이었다.

그렇게 대통령만의 음식으로 정해진 것들이 엄청나게 귀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었다.

-일종의 급 나누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함이라고 해야 하나? 여튼 그렇대요.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구요?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꽤 오래된 관습이라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흐릿해졌다. 처음엔 테오의 말대로 대통령의 힘을 강하게 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음식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세세하게 분류해 정해 놨다고 한다.

마치 군대에서의 악습들처럼.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의전에만 사용되고 있었다.

-예전처럼 안 지키면 체포되고 그 정돈 아니지만 파나르 총리도 본인이 주최하는 만찬에서 한 번도 그 메뉴들을 사용해 본 적 없다더라구요. 괜히 마음이 불편해서요.

-하하 그거 되게 신기하네요.

-그렇죠? 저도 처음에 듣고 신기했어요. 대통령이 아닌 사람이 그 음식을 대접받으면 괜히 기분 좋을 것 같더라구요.

아!

테오의 마지막 말에 뭔가가 번쩍 떠올랐다.

바로 그거였다.

-테오. 혹시 그 메뉴들이 뭔지 알 수 있어요?

-그거요? 쉽게 알 수 있어요. 인터넷에 찾아보면 쉽게 찾을 수 있어요. 몰라서 안 찾아본 거지 비밀스러운 내용은 아니더라구요.

-그럼 제가 찾아볼게요. 고마워요.

바누스 장관을 완전히 우리 편으로 만들면서 내 개인적인 아쉬움까지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채팅방에서의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한 후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김용수 대사에서 그런 관습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물었다.

“음… 그런 문화가 있었대요? 사실 난 모르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요리사들 사이에서도 프랑스 대사관 말곤 전부 처음 들어 보는 것 같더라구요.”

김용수 대사는 처음 듣는 얘기에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모든 요리사들이 몰랐단 사실을 알고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음식들이 있더라구요.”

“소고기 내장으로 만든 수프, 새우찜 그리고 착착?”

대통령 만찬에만 허락된다는 음식이라고 했지만 크게 놀랄 만한 건 없었다.

소고기 내장은 보양 음식의 성격이 컸고, 커다란 새우로 만든 찜은 미식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착착이라고 부르는 생소한 음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장 셰프.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이 착착이란 건 뭔가요?”

“디저트입니다. 밀가루 반죽을 튀겨서 파나르 꿀에 버무려 먹는 음식이랍니다.”

“꿀이요? 다른 음식들은 그나마 귀한 식재료라고 친다 해도 꿀과 밀가루는 흔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근데 그 착착에 사용하는 꿀 종류가 흔한 꿀이 아닌 것 같아요.”

“아 그래요?”

“마누카 꿀이라고 마누카꽃에서 채취하는 꿀인데 1년에 딱 12일간만 꽃이 피기 때문에 아주 귀한 꿀이라고 하더라구요.”

꿀의 종류도 그 생산량도 압도적으로 많은 파나르에서도 마누카꿀은 귀한 식재료였다.

지금은 파나르 부자들도 맘만 먹으면 충분히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엔 대통령에게만 허락되던 식재료였다.

“특이하네요. 이것들은 파나르 음식들인데 장 셰프가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겠어요?”

“제가요?”

바누스 장관을 처음 초대했을 때도 김치볶음밥과 플롭의 중간쯤에 있는 음식 대접했었다.

이번엔 시간도 예산도 충분했으니 나의 전공인 전통 한식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저는 이 음식들을 그대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요?”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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