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58화 (159/202)
  • 158. 힐링

    캠핑장으로 오라는 김준우 서기관의 말을 듣자 잠시 불안함이 몰려왔다.

    멀쩡한 호텔 조식 뷔페를 놔두고 뭔가를 만들어 먹자는 건 아니겠지?

    요리하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요리사들에게 힐링은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쉬는 거란 걸.

    포인트는 남이 해 주는 밥이다.

    어제 자기 전에 담갔던 온천 덕에 몸은 가벼웠지만 그것만으론 아직 부족했다.

    “네. 먼저 가 계세요, 서기관님. 금방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한숨을 내쉰 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호텔 방을 나섰다.

    아침이고, 산속이라 그런지 꽤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도 막상 밖에 나오니 깨끗한 공기도 마실 수 있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침부터 웬 캠핑장이에요, 다들. 윤아 씨가 늘어지게 자라고 애써 호텔 구해 줬더니.”

    멀리서도 들을 수 있게 일부러 투덜거리며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그릴에는 어제 타고 남은 재가 가득 차 있었고, 그 옆에 김용수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이 뭔가를 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뭐 하세요, 다들?”

    “장 셰프, 어서 와요.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앉으세요.”

    김용수 대사는 두 팔을 걷어 올리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휴대용 가스레인지엔 큰 냄비 하나가 끓고 있었다. 그 옆엔 깨진 계란 껍질이 가득했고.

    “아침밥 준비 중인데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좀만 기다려 줘요.”

    “아침밥이요? 1층에 조식 뷔페가 차려져 있는데 왜 아침밥을 따로 만드세요?”

    이해가 안 간단 표정으로 물었지만 김용수 대사는 음식에 집중하느라 곧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국자를 잠시 내려놓고 김용수 대사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깐 장 셰프는 어딜 가든 온전히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어제도 저녁까지 음식을 만드느라 고생했잖아요.”

    “네? 그거야 뭐, 제 일이니깐요.”

    “그래도 다 같이 온 휴가인데, 장 셰프만 일을 한 것 같아서요. 그리고 꼭 그게 아니라도 장 셰프를 위해 음식 한번 해 주고 싶었어요.”

    뭘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이블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조식 뷔페 메뉴를 보니깐 밥이 없더라구요. 근데 한국인은 밥심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따로 밥을 지어 봤어요.”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저도 어제 충분히 쉬었어요.”

    내 대답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대사관 직원들은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장 셰프도 아침으로 밥이랑 국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니에요?”

    “그건 맞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나와 아침밥을 함께 먹은 시간이 벌써 1년이 넘는다.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내 식성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재료가 별로 없어서 거창한 음식은 없지만, 장 셰프를 위해 우리 직원들이 차린 아침밥 한번 먹어 봐요.”

    “그래요. 요리사들은 누가 해 주는 밥이라면 다 좋아한다면서요? 맛이 좀 없더라도 맛있게 먹어 줘요.”

    직원들의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질 뻔했다. 나는 매일 하던 일인데 누군가가 날 위해 해 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이걸 준비하기 위해 휴가를 와서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을 직원들을 생각하니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아침밥의 테마는 계란입니다.”

    “계란이요?”

    “네.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재료가 거의 계란이 유일해서요. 쌀은 우리가 좀 챙겨 온 게 있어서 냄비밥을 지었지만, 반찬은 계란이 전부예요.”

    “냄비밥까지요?”

    반찬의 개수나 종류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렇게 날 위한 밥상이 차려졌는데.

    게다가 난 김용수 대사의 말처럼 국 한 그릇만 있으면 밥 한 공기 뚝딱이었다.

    부글부글 냄비의 소리를 들어 보니, 뚜껑을 열어 보지 않아도 국이 끓는 소리였다.

    “냄비밥이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뚜껑을 열어 볼까요?”

    “이 정도면 잘 익었겠죠?”

    직원들은 처음 해 본 냄비밥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이나 불 조절이 까다롭고, 중간에 열어 볼 수 없는 냄비밥은 초보자들에겐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여기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냄비 바닥이 시꺼멓게 타 버렸을 거란 걸.

    누룽지를 넘어선 탄내였지만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이런 비극은 조금 늦게 알아도 괜찮으니깐.

    한껏 기대를 하는 직원들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사님, 빨리 뚜껑 열어 보세요.”

    “알겠어요. 우리의 첫 냄비밥입니다.”

    “짜잔.”

    뚜껑을 열자마자 갇혀 있던 탄내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했다. 그 냄새가 코로 새어 들어가자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그저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푸하하하하하!

    당황한 직원들의 표정을 보자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직원들 역시 웃음이 터진 나를 뒤따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요리하는 건 쉬운 게 아니네요. 빨리 새로 밥을 올릴까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조금 타긴 했어도 먹을 만할 거 같아요. 배고파서 더 못 기다리겠어요.”

    “그래요? 그럼 빨리 먹읍시다!”

    비록 밥은 조금 아쉬웠지만 계란국, 계란프라이, 계란찜 등 계란 요리들은 꽤 그럴싸했고, 어제 남은 김치들을 테이블에 올리니 푸짐한 아침 밥상이 차려졌다.

    “파나르 대사관을 위해 1년 넘게 고생한 우리 장 셰프를 위해서 만든 아침밥이에요. 어서 먹어 봐요.”

    “다 같이 고생한 건데요, 뭘.”

    흐뭇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밥 한 숟갈을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찰기란 찾아 볼 수 없고, 아침으로 먹기엔 과하게 수분이 모자랐다. 입 안에서 생쌀처럼 맴돌고, 탄내가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맛있었다.

    눈을 감고 오랫동안 씹으니 탄내는 고소하게 느껴졌고, 달큰한 밥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족한 수분은 제대로 된 건더기 하나 없는 계란국이 메꿔 줬다.

    “어때요? 라고 굳이 물어볼 필요 없겠죠?”

    “그러게요. 그것보다 서둘러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저흰 멀쩡한 호텔 놔두고 아침부터 왜 이 고생을 했을까요?”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맛본 직원들은 서로 자책하기 시작했다. 멀쩡하다고 할 만한 음식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겉모습은 그럴싸해도 계란프라이는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쓸 정도로 짜고, 계란국은 육수는커녕 제대로 간이 되지 않아 밍밍했고, 계란찜 역시 바닥이 타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밥상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장 셰프,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요.”

    “아닙니다. 너무 맛있어요.”

    “정말요?”

    맛있다는 말에 안지용 참사관이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걱정과 달리 내 정신은 말짱했다.

    내 정신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상태였다.

    “밥 한 그릇만 더 주세요, 대사님.”

    “더요? 어허…. 건강에 오히려 안 좋은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다른 직원들은 이미 숟가락을 내려놓은 지 한참이 지났다. 이 밥상은 날 위해 차렸다고 하지만 아무도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맛있는 아침밥을 맛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목이 메는 게 느껴졌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물 좀 주시겠어요? 쌀이 덜 익어서 그런가 목이 막히네요. 콜록콜록.”

    아무런 말 없이 물병을 건네는 김용수 대사의 표정에는 수십 가지 감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대견함과 안쓰러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었다.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는 대사관 직원들이 진짜 가족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순간이었다.

    “요리사님!”

    그때였다.

    멀리서 날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 번째 듣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이젠 모를 수 없었다.

    “엘레나, 좋은 아침이에요. 잘 잤어요?”

    “아니요. 허리가 아파서 펴지지 않아요.”

    “진짜 텐트에서 잔 거예요?”

    “당연하죠. 어제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당연히 호텔로 들어가 잘 줄 알았는데, 엘레나는 기어코 텐트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 텐트에 찾아온 엘레나의 두 손엔 뭔가가 들려 있었다.

    “요리사님, 벌써 아침 식사 다 하신 거예요?”

    “아침이요? 아직 먹는 중이긴 한데, 왜요? 엘레나 씨도 식사 안 하셨으면 이것 좀 드세요.”

    카리나가 나서서 엘레나를 말렸지만 엘레나는 처음부터 아침밥을 먹으러 온 게 아니었다.

    “그럼 이것도 좀 드셔 보세요.”

    “이게 뭔데요?”

    엘레나가 건넨 통에는 삶은 계란 몇 개가 들어 있었다. 그 옆에 오이와 토마토를 큼직하게 썰어 놓은 샐러드와 함께.

    “어제 요리사님이 처음 보는 저한테 아주 훌륭한 요리를 대접해 주셨잖아요.”

    “그렇긴 하죠.”

    사실 카리나가 엘레나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같이 식사를 하진 못했을 거다. 매력적인 외모이긴 해도, 우린 엘레나가 누군지도 몰랐으니깐.

    “그래서 감사의 의미로 아침밥을 준비해 봤어요.”

    “아…. 이게 아침밥이에요? 또 계란이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저희 부모님이 요리를 너무 못하셨어요. 근데 제가 그분들 딸이잖아요.”

    “아하.”

    엘레나가 가져온 삶은 계란은 흰자가 거의 다 벗겨질 정도로 표면이 울퉁불퉁했고, 샐러드로 사용된 오이와 토마토는 칼을 써서 잘랐다는 게 의심이 될 정도로 모양이 뭉개져 있었다.

    게다가 소스는 소금을 조금 뿌려 놓은 게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짜지는 않았다.

    “드릴 건 없고, 여기서 계란은 그나마 구할 수 있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요리를 해 봤습니다.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서요.”

    엘레나의 삶은 계란을 보고 김용수 대사를 비롯한 직원들은 일제히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왜요?”

    직원들이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는 엘레나에게 카리나가 나서서 설명을 해 주자, 그제야 머쓱해하는 엘레나였다.

    “죄송합니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아닙니다. 이 삶은 계란도, 샐러드도, 다른 음식들도 전부 너무 감사해요. 제가 전부 다 먹을 테니깐 건드리지 마세요!”

    건드리라고 해도 손도 안 대겠지만 정말로 내 소중한 음식들이었다. 먹고 배탈이 난다 해도 이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우고 싶었다.

    그 어떤 호텔 조식보다 훌륭한 아침 밥상이었다.

    “덕분에 다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진짜 재밌게 놀았어요. 엄마 아빠랑 함께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도 연예인이랑 놀아 본 적은 처음이라 즐거웠었습니다.”

    엘레나의 표정에는 한 치의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진심을 다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 사람 같았다.

    “저희는 오늘 오후에 돌아갈 거예요. 엘레나 씨는 며칠 더 있다 가실 거죠?”

    “아니요. 저도 오늘 갈 거예요.”

    “왜요? 더 있다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사진도 2일만 있다가 올려 달라면서요.”

    “괜찮아요. 이제 더 할 것도 없어요. 충분히 쉬었어요. 어젯밤에 매니저 오빠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와 달라고 말했어요. 이미 오고 있을걸요?”

    “그래요? 그럼 원래 목적이었던 힐링은 좀 하셨어요?”

    “힐링이요?”

    굳이 엘레나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네. 덕분에 힐링 아주 완벽하게 했습니다.”

    미소를 지은 엘레나의 표정에선 뭔가 결연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조금 다르게 살아 보려구요.”

    “다르게요? 어떻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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