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여자의 정체 (2)
“캠핑장이 아니라 어릴 적엔 마당이 넓은 집에 살았었어요.”
엘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비밀이 숨어 있는 듯했다.
“어릴 때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불장난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마당에서요?”
“네 그냥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도 태우고, 나뭇가지를 모아서 태우기도 하고 그랬어요.”
어릴 때 불장난은 누구나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볼 만한 장난이었다.
엘레나 역시 어릴 땐 여느 평범한 소녀와 다름없었다.
“엄마는 위험하다고 항상 말리셨는데, 저는 불을 쳐다보고 있으면 맘이 편해지고, 이상하게도 뭔가 타는 냄새가 좋더라구요.”
불멍이라는 게 유행한 이유도 엘레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었을까.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비록 일을 할 때였지만 나 역시 불꽃을 바라보다가 음식을 태워 먹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이랑 마당에서 뭔가를 구워 먹을 때가 제일 좋았어요. 주로 샤슬릭이었지만 종종 플롭도 만들어 먹고 그랬었거든요.”
“파나르 사람들은 결국 샤슬릭이네요.”
“호호 맞아요. 저는 그 샤슬릭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불을 피우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는 느낌을 참 좋아했어요.”
그게 캠핑의 묘미지.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다 보면 어느새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다. 별다른 조명 없이 남은 불꽃 주위로 모여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는 재미.
엘레나도 그 맛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카리나 씨는 알 거예요. 저희 부모님 소식을요.”
엘레나는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카리나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통역을 해야 할지 곤란한 것 같았다.
“어차피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뭐.”
“아… 그러니까.”
카리나는 엘레나의 눈치를 잠시 보더니 한국어로 설명을 해 주었다.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을.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엘레나는 운이 좋게도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고,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소속사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사장님도 저를 딸처럼 키워 주시고, 매니저 오빠도 진짜 오빠처럼 저를 대해 줬어요.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사람들도 엄청 어린 거였는데….”
사고 당시 이미 아역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던 엘레나는 그날 이후로 쉬지 않고 일만 했다고 한다. 특별히 그날의 기억을 지우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가 심해 더욱 바쁘게 지내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일이 아니면 마땅히 할 게 없었고, 같이 시간을 보낼 가족이 사라져서 뭘 할지 모르겠었다고 한다.
“그땐 스케줄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쉬는 날엔 맨날 마당에서 놀곤 했었는데, 이젠 놀아 줄 사람이 없어졌거든요. 저는 원래 친구도 없어서요.”
“매니저님이나 사장님이랑 놀면 안 됐었나요? 친아빠나 친오빠처럼 잘해 주셨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그 두 사람도 그땐 엄청 바빴어요.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 보려고 열심히 할 때였거든요. 지금처럼 이렇게 큰 회사가 아니었어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엘레나는 맥주잔을 들이켰다.
“그렇게 10년 넘게 일만 하다 보니깐 그때 내가 참 좋아하던 불 향도 어땠는지 가물가물하고, 가족들이랑 보냈던 기억도 되찾을 겸해서 혼자 이렇게 떠나와 봤어요.”
엘레나의 말이 끝이 나자 분위기가 잠시 엄숙해졌다. 엘레나는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깨진 줄 알고 서둘러 수습을 했다.
“막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에요. 마침 중요한 스케줄도 끝이 났고, 할 것도 없고 그래서 그랬어요.”
“그래도 사장님 몰래 떠난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한데 저 혼자 간다고 하면 못 가게 할 게 뻔해서요. 어릴 적부터 저를 키워 줘서 그런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해요. 저도 이제 20대 중반인데.”
엘레나가 워낙 유명해서인 이유도 있겠지만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를 동시에 잃은 아이의 심리가 언제 어떻게 확 변화할지 모를 테니까.
항상 옆에서 바라보며 지켜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어렸을 적 기억 좀 찾으셨어요?”
“네?”
“아까 보아하니 불은 못 피우신 것 같던데요.”
삭사울을 빌려 가고도 엘레나의 텐트에선 아무런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어릴 적엔 그냥 종이나 가는 나뭇가지 정도였기 때문에 쉽게 불이 붙었겠지만 삭사울에 불을 붙이는 건 쉽지 않았다.
엘레나가 다시 우리 텐트로 찾아온 이유는 불을 붙이지 못해서일 거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맞아요. 그냥 라이터를 갖다 대면 붙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이런 나무에 불을 붙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워요.”
“그런가 봐요. 어릴 땐 잘 붙었던 것 같은데, 이제 불을 붙이는 것도 까먹었나 봐요.”
그때랑은 다른 상황이라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냥 추억을 곱씹을 수 있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엘레나의 표정에선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럼 바비큐 요리로는 기억을 좀 되찾으셨어요? 샤슬릭은 아니지만 부모님들이랑 먹던 기억이 떠오르던가요?”
똑같은 맛은 아니라도 삭사울 향이 배어 있는 고기라면 추억을 되살리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엘레나는 오늘 처음 만난 우리들 앞에서 제법 경계를 풀고 맥주까지 마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니요. 그것도 안 떠올랐어요.”
“그래요? 왜요? 부모님들이 해 주시는 샤슬릭이 너무 맛있었나 보네요. 오늘 먹었던 음식이 그 맛이랑 다르니깐 그때가 안 떠오른 게 아니에요?”
엘레나는 부모님과 함께 샤슬릭을 먹던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내 음식이 내심 도움이 되길 기대했었는데, 오늘 처음 본 사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다는 건 욕심이었다.
“사실 정반대예요.”
“정반대요?”
“네 저희 어머니랑 아버지는 둘이 힘을 합쳐도 요리를 너무 못하셨었거든요.”
“아….”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와 웃음이 새어나올 뻔한 걸 꾹 참아 냈다.
“항상 뭔가를 시도하긴 하는데 엄마, 아빠가 해 주시던 샤슬릭은 어떨 땐 너무 질기고, 어떨 땐 너무 짜고, 또 어떨 땐 아예 익지도 않거나 타 버리고 그랬어요.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는 다 보여 준 것 같아요.”
“하하하 완전 반전인데요?”
“저는 그냥 마당에서 불을 피우며 같이 보내는 시간이 좋아서 별말을 안 하고 먹었지만 사실 맛은 없었어요. 근데 오늘 이 요리는 솔직히 너무 맛있잖아요.”
엘레나의 대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음식은 나 스스로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아쉽겠어요.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추억을 찾지 못해서요.”
윤아가 엘레나를 위로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아쉽겠다는 말에 엘레나의 표정은 금세 밝아졌다.
“아니에요. 전혀 아쉽지 않아요. 이렇게 혼자서 뭔가를 해 봤다는 것도 저한테는 의미가 있었고, 저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친구요?”
“어… 저랑 친구 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같이 밥 먹고 술 마셨으면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거 아닌가요?”
이건 되려 우리 쪽에서 해야 할 말인데.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오히려 유명세에 기대 선을 넘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던 차였다.
“친구 맞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맞습니다.”
“하하하 친구가 된 엘레나 씨를 위하여 건배 한번 할까요?”
뒤에서 그저 지켜만 보던 김용수 대사까지 나서서 함께 술잔을 들었다. 엘레나는 아주 조금 남은 경계심마저 완전히 털어 내고 우리와 동화된 느낌이었다.
“어릴 적 좋았던 기억을 평생 간직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좋은 기억을 새로 만드는 게 좀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엄마 아빠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 아니, 두 분도 그때 기억을 이미 잊어버렸을 수도 있어요.”
새로운 기억이라.
엘레나의 말에 나도 회귀 전 인생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되었다.
나에게 왜 이런 행운이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과분한 기회였다.
그런 천금 같은 기회를 너무 쉽게 결정해 버린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미 요리사로서 이룰 수 있는 건 전부 이뤘지만 예전부터 꿈이었던 청와대 요리사의 꿈을 이루고자 회귀를 하자마자 목표를 정해 버렸다.
지난 삶에서 이루지 못한 청와대 요리사의 꿈을 이룬다고 한들 지난 삶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후회해 봤자 이미 결정한 일이었고, 꽤 많은 발걸음을 내디딘 상태였다.
그래서 난 지난 삶의 아쉬움을 달래 보겠다는 마음가짐보다 새로운 삶을 더욱 값지게 살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고쳐먹었다. 물론 한번 결정한 목표는 변함없었다.
최대한 많은 새로운 방식, 새로운 경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 볼 생각이다. 이번 삶에선 아주 작은 후회라도 남기지 않도록.
“여튼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분들 덕분에 재밌는 시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감사하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사진을 부탁하자 엘레나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한다는 건가.
조금 섭섭할 뻔했지만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대신 SNS 같은 곳엔 2일만 있다가 올려 주세요.”
“2일이요?”
“네 사장님이랑 매니저 오빠한테 말 안 하고 온 거라고 했잖아요. 2일 후엔 돌아갈 생각이거든요. 그때까지 두 사람이 절 찾지 못했으면 해서요.”
“왜요?”
“저도 맘먹으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요? 그러니깐 나 무시하지 말라고, 일종의 경고인 거죠.”
“하하하 특이한 생각이네요. 걱정 마세요 그냥 소장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장님껜 연락이라도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많이 걱정하실 텐데.”
“안 그래도 오늘 연락하려구요. 좋은 사람들이랑 있으니 걱정 말라고요.”
엘레나는 감사의 의미로 일일이 사진도 찍어 주고, 정성 들여 사인까지 해 주었다.
지금까진 얼굴도 몰랐던 배우였지만 우리는 어느새 엘레나의 광팬이 되어 있었다.
“그럼 저는 제 텐트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텐트요? 호텔 방으로 안 가시구요? 호텔에서만 잘 수 있다면서요.”
“기왕 도전한 거 이것도 한번 해 보게요. 다른 사람들도 텐트에서 다 자는데 저도 잘 수 있겠죠.”
아마 새벽이 되어서 호텔 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겠지만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우리 역시 엘레나 덕에 기분 좋게 식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식을 준비하느라 나는 아직 제대로 된 휴가를 시작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요리사의 숙명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
약속대로 뒷정리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온천에 몸을 담근 뒤 방으로 돌아가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내일은 느긋하게 일어나서 조식이나 즐겨야겠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새 아침이 밝아 있었다. 온천을 한 덕분인지 밤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몸이 무거웠는데, 이제야 휴가를 제대로 만끽하는 것 같았다.
좀만 더 누워 있다가 조식을 먹으러 가야겠다.
시계를 확인하고 몸을 돌려 눕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리사님.”
김준우 서기관의 목소리였다.
자는 척하며 무시할까도 했지만 어차피 더 자진 못할 것 같아 문을 향해 대답했다.
“누구세요?”
“김준우 서기관입니다. 요리사님 아침 식사 하러 가셔야죠.”
“아 아침이요? 그래야죠. 1층이 식당이던가요?”
내 기억이 맞다면 조식 뷔페가 차려진 식당은 호텔의 1층이었다.
“아니요. 씻고 어제 저녁 먹었던 캠핑장으로 오세요.”
“네? 캠핑장이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