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56화 (157/202)
  • 156. 여자의 정체

    “저기요.”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의 여자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까와는 전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그것도 우리 쪽에서.

    “어? 어? 어?”

    “왜요 카리나 씨? 아는 분이에요?”

    나와 직원들은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서둘러 닦아 내며 놀라는 카리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카리나의 표정은 놀람과 동시에 당황한 기색.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에… 에… 엘레나 씨 맞죠?”

    “엘레나? 엘레나가 누군데요?”

    당황한 건 카리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자기를 알아보는 엘레나 역시 당황한 모양.

    파나르 티브이를 챙겨 볼 리 없는 한국인 직원들은 카리나가 놀라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반응을 보니 엘레나라는 사람이 일반인이 아닐 거란 걸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아… 파나르 분이 계셨구나.”

    “네 팬이에요. 엘레나 씨.”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 발이 이미 반대쪽을 향해 있었다.

    “카리나 씨 아는 분이시면 앉으라고 해요.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서 있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래요. 일단 앉으세요.”

    김용수 대사와 안지용 참사관은 엘레나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엘레나는 몇 번 거절하더니 뭔가 결심한 듯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뭐가 필요하세요? 삭사울에 불을 붙이셨어요?”

    나의 물음에 엘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처음 본 게 아니었어?”

    “응 아까도 와서 반으로 쪼개 놓은 삭사울 빌려 달라 했거든.”

    “그랬구나. 근데 카리나 씨. 이분 뭐 하시는 분이길래 그렇게 놀랐어요?”

    윤아의 물음에 카리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배우예요. 파나르 톱 배우.”

    “배… 우요?”

    “그것도 톱 배우?”

    우리의 놀라는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엘레나 씨는 불륨을 낮춰 달라며 손짓을 했다.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 보니 뭔가 숨기는 게 많은 모양.

    “톱 배우가 왜 혼자 여기 계세요. 매니저나 일행도 한 명 없이.”

    “그래서 저도 놀랐던 거예요. 그리고 엘레나 씨는 매니저와 항상 같이 있는 걸로 유명하거든요.”

    우리가 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자 엘레나는 더욱더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은 한 군데를 향해 있었다.

    “아…. 비어캔 치킨은 뼈만 남았는데.”

    “엘레나 씨 식사는 하셨어요?”

    우리가 먹고 남은 비어캔 치킨의 잔해에 시선이 꽂혀 있던 엘레나에게 윤아가 물었다.

    그러자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가로저었다.

    “배고파요….”

    배고프다는 말과 함께 안쓰러운 엘레나의 표정을 본 직원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특히 남자 직원들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초록색 눈을 가진 엘레나의 매력적인 외모에 홀려 버린 사람들 같았다.

    “요리사님 소갈비는 아직 멀었어요?”

    “이제 다 됐을 거예요. 가서 확인하고 올게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보자 윤아와 예민희 서기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파나르 대사관은 손발이 잘 맞네요. 그렇죠?”

    “그러게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겠죠?”

    순식간에 비어캔 치킨의 잔해들은 사라지고, 엘레나를 위한 자리 하나가 새로 세팅되었다.

    “저… 성함이 카리나 씨라고 했나요?”

    “네 맞아요!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주위를 잠시 둘러본 엘레나는 우리에게 부탁 하나를 정중히 건넸다.

    “제가 여기 있는 걸 아무도 모르거든요. 안 들키게 도와주실 수 있나요?”

    “네? 왜요?”

    엘레나의 부탁에 카리나 역시 목소리에 볼륨을 낮추고 대답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해 드릴게요. 여기에서 저를 봤다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최대한 몰랐으면 하구요. 파나르 분이 계실 줄 몰랐거든요.”

    “아… 저 빼곤 전부 한국 분들이긴 해요. 그래서 엘레나 씨가 누군지는 잘 몰라요.”

    “그런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아까 삭사울 좀 빌리러 온 거였는데….”

    “누군진 몰라도 그 미모는 가릴 수가 없겠죠.”

    “호호호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캠핑장에서 혼자 뭔가를 해 보려다가 잘 안됐는지 우릴 찾아온 거였다. 아무리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렸다고 하지만 파나르에선 자리를 알아볼 사람이 많았으니까.

    낯선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던 나와 김용수 대사에게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짜잔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소갈비 바비큐가 완성되었습니다.”

    바비큐 그릴의 뚜껑을 열자 가득 차 있던 연기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소갈비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꾸울꺽.

    여기저기서 군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이이이익.

    고요 속에서 소갈비의 겉면이 익어 가며 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직원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미쳤다… 색깔 봐.”

    “와아 기름기 봐라.”

    나 역시 이번엔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제대로 익었는지 확인을 위해 칼끝을 뼈와 뼈 사이의 두툼한 살점에 찔러 넣었다.

    기름기가 쫙 빠진 소갈비였음에도 살점은 여전히 두툼했다.

    “어때요? 다 익었어요?”

    다 익은 건 물어보나 마나였다. 칼끝에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도 깊숙이 살점을 파고들어 갔다.

    입에 갖다 대면 곁대로 찢어질 것 같은 식감이 상상되었다.

    “완벽해요.”

    “정말요?”

    “빨리 드시죠. 접시 좀 주세요.”

    완벽한 비주얼의 소갈비 앞에서 또 한 번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커다란 갈비를 통째로 담은 접시는 없어서 그릴 위에서 갈빗대 하나하나를 분리해 그릇에 옮겨 담았다.

    달콤한 간장 양념과 매콤한 고추장 양념으로 완성된 완벽한 한국식 바비큐 립이었다.

    “와아….”

    모두가 커다란 갈빗대를 앞에 두고 감탄을 하고 있었다. 엘레나 역시 여러 번 군침을 삼켰다.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요. 나는 천천히 먹을게요.”

    “그럼 먼저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다들 본능적으로 김용수 대사가 먼저 포크를 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김용수 대사의 말에 모두가 달려들어 갈빗대 하나씩을 들어 올렸다.

    “나는 달달한 간장 소스부터 먹어 봐야지.”

    “맥주엔 역시 매콤한 게 최고죠.”

    “어차피 둘 다 먹을 건데 먼저가 어딨어요?”

    한국식 럽을 바른 갈비엔 따로 양념이 필요 없었다. 달콤하고 매콤한 양념들은 그릴에서 구워지는 동안 훈제되어 살속 깊숙이 스며들었고, 겉은 마이야르 반응 덕에 바삭하게 구워졌다.

    “음….”

    “캬아….”

    감탄사로 시작된 갈비 식사 시간은 어느새 짧은 신음 소리로 변해 있었다.

    직원들은 또다시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황홀한 표정이었다.

    특히 자연스레 합석을 하게 된 엘레나의 표정에선 수만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저런게 배우의 재능이라고 하는 건가.

    그 표정만 봐도 요리사로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어때요 엘레나 씨? 맛있어요?”

    “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입가에 뭔가 묻은지도 몰랐다. 엘레나는 서둘러 입가를 닦은 뒤 대답했다.

    “너무 맛있어요. 이거 소스가 도대체 뭐예요?”

    “소스요? 한국 스타일로 만들었어요. 한국 음식 먹어 본 적 있어요?”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어요 처음이에요. 한국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바비큐 요리가 있는지는 몰랐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엔 바비큐 요리가 잘 없어요. 그냥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 정도예요.”

    최근엔 한국에서도 캠핑이 유행이라 이런 바비큐 요리가 많이 발달했지만 전통적인 한국 음식이라 할 순 없었다.

    “엘레나 씨도 이런 바비큐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좋아해요. 요새는 자주 먹지 못하지만.”

    좋아하니깐 여기까지 와서 직접 숯에 불을 붙이고, 요리를 해 보려 노력했겠지.

    결국 그게 잘 안돼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근데 왜 혼자 오셨어요?”

    안지용 참사관이 엘레나에게 시원한 맥주를 한 잔 건네며 궁금했던 걸 물었다. 톱 배우라면 당연 누군가 동행을 할 줄 알았는데.

    질문을 받은 엘레나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윤아가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뻔하죠. 톱 배우라는 사람이 이런 산속 호텔까지 혼자 온 이유라면 하나 아니겠어요?”

    “그게 뭔데요?”

    카리나의 파나르어 설명을 듣자 엘레나 역시 윤아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힐링”

    “힐링이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유일 수도 있다.

    저런 유명인의 삶을 살아 본 적은 없었지만 한국이나 파나르나 다 비슷하지 않을까?

    인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느낌일 거고, 가까운 슈퍼마켓 하나도 혼자서 가기 힘든 인생.

    거기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을 것이다.

    “이런 호텔에 힐링하러 오는 게 당연하죠. 조용하고, 온천도 있고, 캠핑장도 있으니 힐링하기 딱인 곳이니까요. 여기에 뭐 비지니스하러 오는 사람은 없겠죠.”

    “듣고 보니 그렇네요. 여기 호텔에 묵는 사람들은 다 힐링하러 온 거겠네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한 윤아 다음으로 자연스레 엘레나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엘레나는 윤아의 대답이 재밌었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힐링하러 온 거 맞아요.”

    “거봐요 딱 맞다니까요. 우리도 여기 힐링하러 온 거잖아요.”

    엘레나는 아까보단 훨씬 경계가 풀린 것 같았다. 술도 한잔 들어갔고, 맘에 드는 음식을 실컷 먹어 배도 부른 상태였다.

    “제가 배우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한 번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어요.”

    “아….”

    엘레나의 한마디에 직원들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다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어려서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하셨죠?”

    “네 공식적으론 13살 때부터 시작했어요.”

    카리나는 엘레나의 필모그라피를 대충 알고 있었다. 파나르 사람이라면 그 정돈 누구나 알만큼 엘레나는 톱 배우였다.

    “뭐 일을 하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뭐가 내 인생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소속사 사장님이랑 매니저도 저한테 최선을 다해 주셨지만 뭔가 허전하더라구요.”

    “…….”

    엘레나의 말에는 배우답게 감정이 담겨 있었다. 비록 통역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엘레나의 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랑 이렇게 캠핑도 종종 오곤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하더라구요.”

    “헷갈리는구나! 드라마랑 진짜 기억이.”

    “네 맞아요!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는데 그런 거 같더라구요. 이게 진짜 내 기억인지 카메라 앞에서의 기억인지….”

    말을 하는 엘레나가 안쓰러우면서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다르게 말을 하면 삶 자체가 배우가 되었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어린 나이에 엄청난 경지에 오른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진짜 추억을 기억하고 싶어서 여기를 찾아와 봤어요.”

    “어릴 적엔 부모님들이랑 이 호텔을 자주 왔었어요?”

    “아니요. 이 호텔은 처음 와 봤어요.”

    “그럼 왜 여기를…?”

    엘레나가 이 호텔을 고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캠핑장이 있고, 호텔이라서요. 제가 호텔 말곤 잠을 잘 못 자거든요.”

    “아….”

    톱 배우의 입에서 나올 법한 대답이었다.

    “찾다 보니 여기가 딱이었어요. 호텔 상태도 좋은 데다가 쉽게 찾아오기 힘든 산속이고, 캠핑 시설도 잘되어 있는 곳이 여기뿐이었어요.”

    “힐링하기엔 딱이었죠.”

    호텔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캠핑장을 고집한 이유는 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새 엘레나의 이야기에 푹 빠져 버린 내가 물었다.

    “그럼 어릴 적엔 부모님이랑 캠핑장에서 맛있는 걸 많이 해 드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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