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8화 (149/202)
  • 148. 아이디어

    브로냐 피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퓨전 음식이라니, 불가능한 미션은 아니지만 나는 전통 한식을 다루는 편이 훨씬 자신 있는데.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특히 장덕수 셰프님께서는 그래 주셨으면 해요.”

    “왜… 저만요?”

    “출연진들 중에 제일 어린 요리사니까요. 아까도 말했듯이 섭외하려는 요리사들은 전부 베테랑이라 연세가 좀 많아요. 그분들에겐 푸드 트럭에서도 이런 높은 퀄리티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걸 보여 달라 할 거예요.”

    “…….”

    “그리고 장덕수 셰프처럼 그나마 젊은 요리사분들께는 톡톡 튀는 음식을 요구할 생각이에요.”

    “아….”

    “그렇게 되면 균형이 맞지 않을까요?”

    내가 회귀자란 걸 모르니 젊은 요리사인 줄 알 테고, 젊은 요리사는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줄 알겠지.

    하지만 어쩌나. 나는 굳이 고르자면 정석에 더 가까운 사람인데.

    애써 당황한 티를 감췄지만 브로냐는 어색해진 공기의 흐름을 눈치챘는지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너무 어려우시면 꼭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경험 많은 베테랑 요리사들이 독특한 요리를 해 줄 수 있어요. 쌓여 있는 데이터가 많을 테니까요.”

    “네. 한번 고민해 봐야겠네요.”

    “사실 이 J&J 분식의 메뉴도 그렇고, 샤샤에게도 요리사님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사샤요? 기자님이요?”

    “네 기억나시죠? 요리사님을 알렉스 생일에도 참석하게 해 줬다면서요? 저도 아직 한 번도 못 가 봤는데….”

    “참석이 아니라 참가였죠. 연회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로 참가했으니까요.”

    샤샤는 파나르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는 기자였다. 그런 기자가 가장 큰 방송국의 피디를 아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제가 아는 지인들 중 제스와 샤샤의 신뢰도가 굉장히 높은 편인데 두 사람이 동시에 칭찬을 한 사람이라 사실 기대가 좀 돼요.”

    “그랬구나.”

    “잘 부탁드릴게요. 이번 기회에 한국 요리를 파나르에 많이 알려 주세요.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다고 들었는데 잘 활용해서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브로냐를 보며 마음이 편치 못했다.

    말이야 쉽지.

    퓨전 음식이란 게 어찌 보면 경계나 제한이 없어 쉽게 느껴질 수 있는데 자칫하면 형편없는 맛이 나오기도 하고 음식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하… 쉽지 않겠네.”

    “퓨전 음식 만드는 게 어려워?”

    브로냐가 자리에서 떠나자마자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윤아 역시 이렇게 고민하는 내 표정이 맘에 걸렸는지 덩달아 불편해 보였다.

    “쉽진 않지. 게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음식을 원하니까.”

    “그런 음식이 있나….”

    “내 말이요.”

    잠시 고민에 빠진 사이 제스가 나서서 말했다.

    “미스터 장. 내가 한마디만 해도 돼요? 고민이 많은 것 같아서.”

    “네 당연하죠.”

    “이 세상에 완전한 창조는 없어요. 특히 음식은 더 그래요. 제가 사업을 하면서 전 세계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 봤잖아요.”

    제스는 그런 면에서는 산증인이었다. 그렇게 직접 먹어 본 수많은 음식들 중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가지고 와서 여러 차례 성공을 한 거고.

    이 상황에서 충분히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근데 제가 느낀 바로는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 거 같아요. 그래서 먹는 음식도 결국 다 비슷해요. 한국에 사는 호랑이는 풀을 먹고, 파나르에 사는 호랑이가 생선을 먹지는 않잖아요. 나라가 달라도 그 음식들은 굽고 찌고 튀기고 볶고, 모양이나 소스만 다를 뿐 결국 다 비슷하더라구요. 물론 그걸로 인해서 맛은 완전히 달라지지만요 하하….”

    제스 역시 자기가 내뱉은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걸 아는지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완전히 창조를 하려고 하지 말고 모방이나 결합을 해 보세요. 예를 들면 어떤 음식에선 맛을 가져오고 어떤 음식에선 모양을 가지고 와서 섞는 거죠.”

    “아….”

    “말이 좀 어려웠죠? 제가 추천했는데 괜히 미스터 장이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정답은 찾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보인다잖아요. 제스가 해 준 말이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와닿는 시간이 있을 거예요. 도움이 되었어요. 참고해서 고민해 볼게요.”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다니까요.”

    잠시 주눅이 들었지만 이미 하기로 한 거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할 순 없었다. 게다가 직원들은 이번 일 역시 내가 잘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할 수 있겠어? 혹시나 우리가 한 말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직 공문이 도착한 것도 아니니깐 안 한다고 해도 돼.”

    “아니야. 조금 어렵긴 해도 재밌을 거 같아. 아직 시간도 남았으니까 며칠 내내 머리를 쥐어짜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겠지.”

    “그러겠지?”

    제발 그러길 바랐다. 젊어진 내 두뇌를 쥐어짠 보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다음 날부터 퇴근 후 윤아를 만나서 어떤 메뉴를 만들어야 할지 함께 회의를 했다.

    직원들 중 가장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은 편이고, 맛집 친구임과 동시에 이번 프로그램에서 한 팀이기 때문에.

    게다가 파나르에게 가장 오래 살았으니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한국 음식 중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음식을 어떻게 만들지?”

    “아예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건 무리인 것 같아. 그래도 한국 음식은 워낙 종류가 많으니깐 향토 음식 중에 잘 찾아보면 쓸 만한 게 있을 거야.”

    “있기야 있겠지. 근데 그게 파나르 사람들한테 잘 팔릴까가 문제지.”

    “그렇긴 하지….”

    카차이 지역 축제 때 활용했던 어탕라면이나 민물새우튀김도 생소한 음식이라면 생소했다.

    하지만 그건 카차이 지역의 민물고기를 활용하기 위해 생각했던 메뉴였던 거라 이번 미션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어떤 메뉴를 선택하든 일단 잘 팔려야 하는 거니깐 쉽지가 않네.”

    “그러게. 잘 팔려야 하면서도 색다른 음식이라니. 그 피디가 우리한테 너무 어려운 미션을 준 거 같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그래서 퓨전 요리가 쉬운 게 아니라고 말한 거였어.”

    “그럼 그냥 포기하고 평범한 한국 음식을 하면 어때? 꼭 퓨전 요리를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건 아니랬잖아.”

    “그렇긴 해도 시작도 하기 전에 괜히 지고 들어가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자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벌써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머리 쓰는 걸 귀찮아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회귀해 버렸으니.

    브로냐 피디가 딱 원했던 음식을 개발해 보고 싶었다.

    “그럼 제스가 말했던 대로 한번 차근차근히 생각해 보자.”

    “제스가 말했던 거?”

    “응 모방을 하고, 여러 가지 음식들의 장점을 합치는 거지.”

    두 사람이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어 봤지만 별다른 수가 나오지 않았다.

    윤아는 얼마 전 멋쩍게 웃으며 조언을 해 주던 제스를 떠올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해 보는 걸 제안했다.

    “일단 한번 해 보자. 숨어 있는 한국 음식 찾다가 시간 다 보내겠다.”

    “그러니깐. 며칠 해 봤지만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아.”

    나와 윤아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편한 자세로 회의를 이어 갔다.

    “일단 한국의 제일 대표적인 음식들이 뭐가 있지?”

    “음… 불고기, 비빔밥, 김치, 잡채, 갈비찜 정도?”

    “전부 다 파나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네.”

    “그렇긴 하지. 오, 만찬 때도 이 메뉴들은 전부 남김없이 먹었었어.”

    “그럼 일단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제일 많이 파는 팀이 1등이니깐 증명이 된 음식이 좋겠지.”

    한국 음식이 생소하다지만 위의 음식들은 그나마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메뉴들이었다.

    “그러면 김치는 제외하자.”

    “왜?”

    “김치는 메인 메뉴가 아니니까. 김치만 사서 먹는 사람은 없을 거잖아.”

    “그렇겠네. 그럼 김치는 제외.”

    종이에 적힌 메뉴들 중 하나씩 탈락시키며 회의를 이어 갔다.

    “갈비찜도 길에서 돌아다니면서 먹는 게 불편하니깐 탈락.”

    “그럼 비빔밥, 불고기, 잡채 중에 일단 하나를 고르는 게 좋겠네.”

    푸드 트럭의 특성상 많이 팔기 위해선 길거리 음식처럼 만드는 게 유리했다.

    물론 몇 개의 테이블도 세팅이 되겠지만 앉아서 먹어야 하는 음식들은 빠르게 많은 양을 팔긴 어려울 테니까.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김밥도 좋은 메뉴 아니야?”

    “김밥?”

    “응 돌아다니면서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잖아. 게다가 파나르 사람들한테 이렇게 인기도 많고.”

    회의 장소인 J&J 분식은 올 때마다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가장 잘 팔리는 메뉴는 단연 김밥이었고.

    김과 밥의 조합은 어느 곳에서도 잘 먹히는 조합이었다.

    “김은 진짜 모든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나 봐.”

    “그런 것 같더라. 저번에 타지크에 갔을 때도 김 덕 좀 제대로 봤거든.”

    “아 맞네. 국왕님들 아이들이 그렇게 김을 좋아했다며.”

    “응 한국 애들이랑 똑같더라.”

    파나르에서 대사관 요리사를 하며 얻은 정보 중 가장 확실한 것 중 하나였다.

    김이라는 식재료는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것.

    게다가 중독성까지 있어서 장사 아이템으론 더욱 적합했다.

    “그럼 김을 활용할 수 있는 메뉴면 좋겠다.”

    “남아 있는 메뉴들 중 김이랑 잘 어울리는 메뉴가 그나마 비빔밥이겠네.”

    “김밥은 뺄 거야?”

    “김밥도 괜찮은 아이템이긴한데….”

    김밥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곤 할 수 없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음식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미 J&J 분식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김밥을 또다시 가지고 나갈 순 없는 법이었다.

    “그럼 두 개를 합쳐 볼까? 제스가 말했던 것처럼?”

    “김밥이랑 비빔밥이랑?”

    “응 비빔밥의 맛과 김밥의 모양을 합치는 거지.”

    “오… 나쁘진 않지만 특별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전주비빔밥 삼각김밥이랑 비슷할 것 같아.”

    “아… 그렇네.”

    “그래도 확실히 맛은 있을 거야. 비빔밥 김밥.”

    아쉽긴 했지만 접근 방법 자체는 참신했다. 제스의 조언이 와닿는 시기가 온 것 같았다.

    좀 더 파고들어 가 보면 괜찮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그냥 김밥이나 삼각김밥을 먹을 때 좀 아쉬웠던 점이 있나? 그런 걸 보완하면 괜찮은 아이템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김밥의 김이 눅눅해지는 게 싫어. 아무리 바로 먹어도 김이랑 밥이 닿자마자 눅눅해지니깐 비린내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렇더라구.”

    “하긴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런 걸 느낄 수 있지. 근데 윤아 넌 적어도 음식에 대해선 예민하지 않잖아?”

    “아니거든? 예민해서 다 느끼긴 해. 대신 그걸 다 수용할 수 있는 관대함도 가진 거지.”

    “아….”

    윤아는 뭐든 잘 먹길래 예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는데.

    김밥에서 김의 비린내를 맡을 수도 있었구나.

    “그래서 나는 김밥이나 삼각김밥의 김이 바삭하고, 고소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오… 김부각같이 아예 바삭하면 좋긴 하겠다.”

    “김부각? 그거 괜찮은데?”

    “김부각이?”

    “응 김밥의 김이 김부각처럼 바삭하면 훨씬 맛있을 것 같은데?”

    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긴 한데 김부각으로 김밥을 만들 수는 없어. 바삭해서 돌돌 말 수가 없거든.”

    “아… 그렇겠네.”

    “…….”

    “그러면 모양을 바꿔 보면 어때?”

    “김밥 모양을?”

    “김밥이라고 아예 생각을 하지 말고 새로운 음식을 창조해 내는 거지. 비빔밥이랑 김부각으로.”

    윤아는 포기하기 아까웠는지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그럼 아예 김밥 모양은 잊어버리고, 김부각이랑 비빔밥을 가장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모양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응! 바로 그거지.”

    “그럼 파나르인들이 자주 먹는 길거리 음식들이 뭐가 있지?”

    윤아는 신이 나서 음식 이름을 줄줄 뱉어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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