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7화 (148/202)
  • 147. 미션

    “미스터 장의 태도에선 뭔가 알 수 없는 신뢰감이 느껴져요.”

    “신뢰감이요?”

    “네, 말투며 표정이며 유독 눈에 띄더라구요. 처음엔 대사님의 연설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미스터 장을 보고 나니 관심이 넘어갔어요.”

    제스의 말투에선 여전히 확신이 느껴졌다.

    “그런 미스터 장이 가진 매력이 분명 손님들을 이끌 수 있어요. 거기에 요리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구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요.”

    윤아와 나는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제스가 지금 하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우린 짐작할 수 있었다.

    국경일 행사를 앞두고 윤아가 알려 준 꿀팁이었다. 파나르인들을 홀리는(?) 노하우랄까.

    덕분에 파나르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해도 김용수 대사의 연설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렇긴 한데 방송은 워낙 변수가 많아서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카메라 앞에 서 본 적이 없어서요.”

    “그건 뭐 나중에 생각하시죠? 생각이 있으면 피디님 한번 만나 봤으면 해요. 내가 아주 강하게 추천했거든요.”

    마치 자신이 키운 배우를 추천이라도 하듯 제스는 적극적이었다.

    “제스도 그럼 그 프로그램에 나와요?”

    “저요? 당연하죠. 출연자들에게 조언을 주는 역할로 나갈 거예요.”

    “오 그렇군요.”

    혼자가 아니라면 출연을 고려해 볼 만했다. 회귀를 했다지만 이런 방송이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출연하게 되면 윤아 씨도 같이 출연해야 해요.”

    “저도요? 왜요?”

    “통역해 주셔야죠. 미스터 장의 음식은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음식이지만 이건 방송이잖아요.”

    “그렇겠네요.”

    제스는 출연을 꼭 좀 부탁한다며 내 두 손을 꽉 잡았다.

    “미스터 장은 출연 의사가 있는 걸로 알고 대사관 측으로 공문을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공문은 보내 주세요. 그래도 김용수 대사님의 허락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제스는 또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할 말만 전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볼 때마다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아마 제스는 나이가 들어 죽고 난 후에도 후회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김용수 대사의 집무실.

    “대사님. 저번에 말씀드린 장덕수 요리사 섭외 건에 대해서 FBC에서 보내온 공문입니다.”

    “네 읽어 보겠습니다.”

    예민희 서기관이 두고 간 공문을 읽으면서 김용수 대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방송이라, 그것도 파나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송국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혼자서는 속 시원한 정답을 내릴 수 없었는지 직원들을 모아 의견을 물었다.

    “이 정도 규모의 프로그램은 단순히 장덕수 셰프 혼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아마 모든 직원들이 달려들어 지원을 해 줘야 할 거예요.”

    출연은 덕수와 윤아가 하겠지만 이건 대사관의 이미지가 달려 있는 일이었다. 비록 예능일지라도 대사관의 타이틀을 달고 나간 방송에서 결과라도 좋지 않다면 질타를 피할 수 없었다.

    한국에선 자세한 내막을 모를 테니까.

    “장덕수 셰프가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 어떤 활동보다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문화의 힘이 얼마나 큰지 우리나라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반대로 생각해서 나쁜 결과가 나온다면 그 후폭풍도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괜히 한 거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이번 방송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예전보단 파나르에서 한국 대사관의 상황은 좋아졌고, 김용수 대사의 영향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만 무사히 임기를 마쳐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모험을 할 필욘 없었다.

    “그러면 대사님. 투표를 해 보는 게 어떨까요?”

    “투표요?”

    “네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해야 한다와 안 해야 한다. 하게 된다면 왜 해야 하는지, 안 해야 한다면 또 왜 안 해야 하는지 간단한 이유를 써서 투표를 하는 거죠.”

    잠자코 지켜보던 안지용 참사관이 묘수를 제안했다. 직원들의 표정만 얼핏 봐도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이럴 땐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는 게 정석이었다.

    “좋습니다. 이 종이에 출연을 할지 말지를 적고 그 밑에 간단한 이유를 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포함해 전 직원들이 투표 용지를 받아 들었다. 제각기 의견을 적은 종이는 김준우 서기관의 앞에 모아졌다.

    “그럼 한 장씩 펼쳐 볼게요.”

    김준우 서기관은 앞에 놓은 용지를 하나씩 펼친 뒤 그것을 읽었다.

    “출연해야 한다. 이유는 장덕수 요리사의 실력으론 좋은 성적을 낼 게 분명함.”

    첫 번째 종이의 내용을 읽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종이의 내용은… 출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유는 장덕수 요리사가 잘 해낼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호.”

    두 번째 종이에 적힌 내용도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마지막 용지까지 내용은 동일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장덕수 요리사를 신뢰하기 때문에.

    “허허 만장일치네요.”

    김용수 대사가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의견이 여러 가지였지만 우리 모두 장덕수 셰프에 대해선 만장일치네요. 그럼 출연해 보는 걸로 합시다.”

    “네. 더 힘든 것도 해냈는데 또 다 같이 뭉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젠 저도 합류했잖아요. 이전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난데없는 예민희 서기관의 자기 어필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처음에 조금 헤매던 예민희 서기관은 무사히 궤도에 안착했고, 파나르 한국 대사관 역시 강력한 부스터를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요. 내가 언제부터 이런 거 눈치 봤다고 고민했는지 모르겠네요. 모든 결과는 제가 책임질 테니 여러분들의 능력을 맘껏 발휘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사님!”

    파나르 대사관 직원들의 파이팅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 사이의 신뢰가 얼마나 끈끈해져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투표 내용을 전해 들은 장덕수 요리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뭉클함이 올라왔다.

    * * *

    J&J 분식.

    FBC 방송국의 피디를 만나는 날이다. 좀 더 조용한 곳에서 미팅을 하려고 했지만 제스가 굳이 이곳으로 우릴 불러냈다.

    “좀 더 조용한 곳에서 만나도 되는데.”

    “아니에요. 지금 이 바글바글한 장면을 봐야 피디님도 내 추천이 맞다는 걸 더 강하게 느낄 거예요.”

    “그렇게까진 안 하셔도 되는데….”

    아마도 제스가 추천하는 날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겠지. 나이도 어린 데다가 파나르에선 그리 영향력이 없던 나라인 한국인이었으니까.

    제스는 이 가게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말에 힘을 주고 싶어 했다.

    “안녕하세요. 브로냐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장덕수라고 합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FBC 방송국의 브로냐 피디가 도착했다. 다른 스태프들은 아무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 온 브로냐의 첫인상은 당당함 그 자체였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크고 진한 눈, 코, 입들도 모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대한민국 대사관 요리사 미스터 장이고, FBC에서 제일 힘 좋은 브로냐 씨예요. 힘 좋은 건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대충 알죠?”

    제스는 농담에도 브로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 말이 전부 맞는다는 듯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나이도 어리신 분이 대단하십니다. 이 레스토랑 메뉴도 직접 개발하셨다면서요?”

    “제스가 계획한 일을 조금 도와줬을 뿐입니다.”

    “우리 방송 때도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으면 하는데.”

    제스의 전략이 먹혀들었다. 주변은 비록 왁자지껄했지만 이 광경이 브로냐 피디가 카메라를 통해 담고 싶은 장면이었다.

    “사실 한국 요리사는 생각에 없었어요.”

    “그러셨군요.”

    “맘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잘 몰라서요. 사실 파나르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르거든요.”

    브로냐의 말은 정확했다. 우리는 열심히 활동했다지만 파나르에선 아직 한국이란 나라의 인지도가 그리 높진 않았다. 그나마 젊은 층에선 나인티나인 덕분에 좀 알려지긴 했지만.

    “그리고 대부분 요리사들은 그 나라까지 가서 직접 섭외를 해 왔어요. 근데 한국엔 우리가 따로 아는 사람도 없고, 같이 일해 본 사람도 없어서 굳이 포함시키지 않았거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브로냐는 나와 윤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제스가 워낙 추천을 해서 수락하긴 했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한 셰프들이 좀 쟁쟁합니다.”

    “그런가요?”

    브로냐 피디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꺼냈지만 나는 오히려 반가운 감정이 앞섰다. 얼마나 대단한 요리사들이 오길래 이렇게 자신만만한 건가.

    그들의 음식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경험이었다.

    “대사관 요리사 역시 대단한 실력인 건 맞지만 사실 경력으로나 스펙으로도 장덕수 셰프가 밀리는 건 사실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번 모험을 해 보려구요. 좀 더 다양한 음식을 소개해 줄 수 있다면 프로그램 입장에서는 훨씬 좋은 일이니까요.”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하던 브로냐 피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저희는 큰 문제가 없지만 혹시 장덕수 셰프의 푸드 트럭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되면 대사관 측에 이미지 타격이 있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

    “아무래도 공기관이니 저희도 섣불리 다가가는 게 쉽지 않네요.”

    나와 대사관을 걱정해 줘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브로냐 피디의 그 말로 인해 나의 자존심엔 불이 붙었다.

    처음엔 나가도 그만 안 나가도 그만이라 생각했던 이 프로그램에 반드시 참가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보란 듯이 한국 음식을 알리고 싶어졌다.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요?”

    “네 저희 대사님도 이미 검토 후 허락한 부분이고, 저희 직원들 역시….”

    “직원들 역시?”

    “아닙니다. 여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직원들이 나를 전적으로 믿어 주고 있는데 실망시킬 수 없었다.

    “좋습니다. 역시 제스가 추천한 분은 달라도 뭔가 다르네요. 오히려 연륜 있는 요리사들보다 이렇게 젊고 패기 있는 요리사 한 명이 껴 있어도 좋을 것 같네요.”

    “내가 말했잖아요. 실력으로 봐도 흥행 카드고, 그냥 사람 자체만으로도 흥행 카드라니까요.”

    브로냐 피디는 제스의 말에 피식하고 웃어넘겼다. 두 사람의 관계는 편하게 농담을 할 만큼 편해 보였지만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피디님.”

    “네 요리사님.”

    브로냐 피디가 하고 싶은 말은 다 끝이 났으니 이젠 내가 물을 차례였다.

    “프로그램 내용이 푸드 트럭으로 장사를 해서 준비한 음식을 가장 많이 판 팀이 이긴다는 건데 그게 맞나요?”

    “네 맞아요. 각국의 음식을 기본으로 푸드 트럭에 적합한 음식으로 변형해서 파는 걸 기획하고 있어요.”

    “음… 전통적인 음식이 아니라요?”

    브로냐는 자신이 기획한 프로그램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했다.

    “1화에서 각국 음식과 식문화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건 전통음식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퓨전 음식들을 만들어 줬으면 해요.”

    “퓨전 음식이요?”

    “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 나라의 음식이요. 심지어 그 나라 사람도 본 적 없는 그런 음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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