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6화 (147/202)

146. 섭외

따르르릉.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밤낮으로 서늘하던 기운이 이제는 거의 사라져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늦은 오후 고요하던 사무실에는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제가 받을게요.”

열려 있는 방문 사이로 예민희 서기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어떠한 업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민희 서기관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주파나르 대한민국 대사관 예민희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친절한 한국어로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편에선 파나르어가 들려왔다.

예민희 서기관의 파나르어는 이곳에 올 때부터 꽤 능숙했지만 아직 전화로 원어민을 상대하기엔 다소 버거웠다.

그래도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싶어 차근히 통화를 계속 이어 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스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제스 씨.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업무 협조를 요청하려고 하는데요.

-네 어떤 업무를 누구에게 요청하려고 하시나요?

-미스터 장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미스터 장이요? 그런 분은 여기 안 계신데.

예민희 서기관은 평소 근무지가 다른 장덕수 요리사를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다. 제스라는 사람 또한 누군지 알지 못했으니 곧바로 두 사람을 연관 짓지 못했다.

‘요리사님. 요리사님.’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윤아가 미스터 장이 장덕수 요리사를 지칭한다는 걸 알려 주었다.

-아! 미스터 장. 장덕수 요리사 말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미스터 장을 공식적으로 섭외하려면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

-셥외요?

제스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 예민희 서기관은 알아보겠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모르는 말투성이었다.

-제가 자세한 건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미스터 장에겐 제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네.

전화를 끊은 예민희 서기관의 머릿속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재외 공관 요리사에게 섭외라는 단어가 적합한 건가? 게다가 방금 통화한 제스라는 사람은 장덕수 요리사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장덕수 요리사를 섭외하고 싶다는데, 섭외라는 말이 파나르에선 다른 의미로 쓰이나요? 뭐 연예인이나 가수 섭외한다 이럴 때나 쓰는 말 아닌가요?”

“우리 요리사님이라면 그럴 수 있죠.”

“그럴 수 있다뇨?”

예민희 서기관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다른 직원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파나르에선 이젠 거의 연예인이라고 해도 되죠.”

“그 정도예요?”

“당연히 농담이죠. 근데 굵직한 사건들을 맡아서 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섭외는 처음인데? 진짜 방송 같은 건가?”

“어디서 연락 온 거예요?”

직원들은 방금 걸려 온 통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스라고 하던데요. 근데 제스가 누구예요? 요리사님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것 같던데.”

“아아 요리사님이 제스라는 사람의 식당을 오픈하는 데 도움을 줬어요.”

“네? 우리 요리사님이요?”

“네 혹시 대사관 뒷문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있는 J&J라는 식당 보신 적 있으세요?”

“네! 당연히 봤죠. 크기도 엄청 커서 둘러봤더니 한국 음식을 팔고 있길래 엄청 반가웠는데, 설마 거기가?”

“네 맞아요. 그 식당의 메뉴를 우리 요리사님이 개발해 주셨어요.”

“헐 대박이네. 아니 대사관 요리사가 그런 것도 해요? 그 정도면 섭외할 만하네.”

한국 교민들의 식당을 도와주는 것 정도는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규모가 크고, 현지인의 사업에 깊이 관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장덕수 요리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인물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근데 제스는 요리사님을 뭘 어디에 섭외하고 싶다는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 준다고 했어요.”

“뭔진 몰라도 장덕수 요리사의 일은 대부분 대사님이 직접 관여하세요. 다시 연락해서 정확하게 무슨 섭외인지 물어본 뒤 대사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겠네요. 그럼 윤아 씨가 좀 해 주시겠어요? 노력해 봤는데 저는 아직 힘드네요.”

“네. 제가 해 볼게요.”

이제 예민희 서기관은 자신이 없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른 직원들에게 쉽게 부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윤아를 비롯해 다른 직원들 역시 기분 좋게 부탁을 받아들였다.

-여보세요 제스. 저 윤아예요.

-아아 잘 지내셨어요?

-네 제스는요?

-J&J 분식 덕분에 정신없이 바쁩니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와요.

제스는 덕수의 통역을 담당하는 윤아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요리사님 섭외 때문에 전화하셨다면서요?

-네 맞아요. 일단 미스터 장에게 물어보기 전에 섭외를 하는 공식 루트가 어떤지 알고 싶어서요.

-그랬군요. 근데 저번처럼 제스가 필요해서 섭외하려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저희 대사님을 통해서 허락을 맡으면 돼요. 정해진 공식 루트는 협조 공문을 보내거나 하는데 간단한 거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J&J 분식의 메뉴 개발을 하는 일도 제법 큰 프로젝트였지만 제스와 장덕수 요리사는 공문 같은 걸 주고받진 않았다. 그냥 서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고 보상에 대한 내용도 그냥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만 얘기를 나눴을 뿐.

그랬던 제스가 갑자기 공식 루트를 알고 싶어 했다.

-내가 섭외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FBC 방송국에서요.

-FBC요? 그 파나르 방송국 FBC요?

-네 맞아요. 딱 장덕수 셰프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찾는 사람에 어울릴 것 같아 제가 추천해 보려구요.

-무슨 일인데요?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할까요? 미스터 장에겐 윤아 씨가 연락 좀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능한 시간 물어보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고마워요.

윤아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벙쪄 있었다.

FBC는 파나르의 최대 규모의 공영 방송국이었다. 그런 곳에서 섭외 요청이라니.

자세한 내막은 아직 모르지만 FBC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윤아는 곧바로 덕수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약속을 잡았다.

* * *

J&J 분식.

평일이지만 J&J 분식의 주차장은 물론이고, 내부도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픈을 한 뒤에도 꾸준히 손님이 줄지 않은 채 인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스. 잘 지냈어요?”

“어서와요 미스터 장. 보다시피 여기 하나만 신경 쓰기도 바빠요.”

“요즘은 매일 여기로 출근해요?”

“아니에요. 요즘은 다른 일이 많아서 직접 오지는 못해요. 그래도 좀 더 애정이 가는 가게라 그런지 자주 오게 되네요.”

제스는 원래도 몇백 개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J&J 분식이 오픈하기 전에도 충분히 바쁘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씩이라도 이곳을 찾는 걸 보면 J&J 분식에 얼마나 애정을 쏟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근데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했어요? 뭐 섭외 그런 얘기를 하셨다면서요.”

제스는 방금 손님이 나간 자리를 직접 치우더니 그쪽으로 우릴 안내했다.

“일단 여기 앉으세요. 다름이 아니라 내가 원래 쭉 하던 방송이 있었거든요.”

실력뿐만 아니라 재치 있는 말재주까지 가진 제스는 안스타며, 너튜브며 방송이며 많은 분야에서 제법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특히 방송 쪽에선 장사나 음식으로 관련된 전문가 포지션을 꽉 잡고 있었다. 한국의 백정원 선생님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준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근데 이번에 내가 잘 아는 피디 한 명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거든요.”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여기까지만 들어도 왜 나를 찾았는지 짐작이 갔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날 캐스팅하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거겠지.

“음… 장사.”

“장사요?”

“네 푸드 트럭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역시나 음식과 관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히 요리가 아니라 장사가 메인 주제라는 점이 차이였다.

“엄청 오랫동안 할 건 아니고, 일단은 파일럿으로 구상하고 있어요.”

“몇 회나요?”

“뭐 일단 계획된 건 3회 분량 정도예요. 팀 소개하고, 아이템 선정하고, 장사해서 결과까지.”

마치 자신이 담당 피디라도 된 사람처럼 프로그램 설명에 적극적인 제스였다.

“파나르 광장에서 푸드 트럭 세워 두고, 세계 여러나라 음식들을 팔 거예요. 그중에서 제일 잘 파는 사람이 1등 하는 걸로.”

“재밌겠네요.”

“여러나라 요리사를 섭외할 예정인데 한국 요리사는 내가 미스터 장을 추천했어요.”

“음… 그래서 공식적인 루트가 필요했던 거구나.”

“맞아요. FBC 측에서 공식적으로 협조 공문을 보내야 하니까요.”

통역을 하던 윤아도 이제야 전부 이해가 된 표정이었다.

“근데 난 요리사지 장사꾼은 아닌데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괜히 나갔다가 꼴등이라도 하면 문제가 생길 거 같은데. 게다가 저는 대사관 직원이라서요.”

프로그램 기획 자체는 구미가 당겼다. 방송이란 것도 얼굴이 전부 드러난 한국에서 하는 것보다 날 아는 사람이 적은 파나르에서 출연해 보는 게 덜 부담스럽기도 했고.

게다가 세계 여러나라의 푸드 트럭용 음식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관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미스터 장이 장사꾼이 아니라구요?”

“네 저는 평생 호텔에서 요리나 했지 따로 장사를 해 본 적은 없어요.”

평생 호텔에서 요리를 했다는 말실수를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엔 줄곧 호텔에 있었으니까.

나는 요리를 시작한 뒤 쭉 호텔에만 있었다.

“미스터 장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네? 제가요?”

“물론 요리 실력이 더 뛰어나긴 하지만 미스터 장은 장사꾼으로서도 충분히 능력이 있어요.”

“그럴 리가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지만 제스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장사는 자신의 전문 분야라 그런 건가.

“이건 내 전문 분야라 확신할 수 있어요. 한 번도 안 해 봤어도 미스터 장의 장사 능력은 대단할 거예요. 내가 요리 실력을 보고 미스터 장을 추천한 것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만 보고 FBC에 추천을 한 건 아니에요.”

도대체 뭘 보고 날 타고난 장사꾼이라 판단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칭찬은 고마우나 맞는 건 맞고 아닌 건 아니지.

“내가 미스터 장을 처음 봤을 때 기억이 나요?”

“네 국경일 행사 때 말씀이시죠?”

제스는 그때 내 음식이 인상 깊었다며 알렉스를 통해 말을 걸어왔었다.

“그때 내가 단순히 미스터 장의 음식이 맛있어서 말을 건 줄 알았죠?”

“그런 거 아니었어요? 제 음식 칭찬 엄청 하셨잖아요.”

그래도 파나르에서 최고라고 하는 음식 전문가인데 내 음식을 보고 과도하게 칭찬을 해 줘서 놀랐긴 했다.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제스는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음식도 당연히 맛있었지만 나는 미스터 장이라는 사람의 매력에도 빠졌었어요.”

“제… 매력이요?”

주춤한 나를 보며 제스는 웃음으로 말을 이어 갔다.

“원래 식당이라는 게 단순히 음식만으로 성공 유무를 판단할 수 없는 거거든요. 맛은 당연한 거고, 식당에 나오는 음악, 손님들이 걸어 다니는 동선, 직원들의 태도, 테이블의 크기, 심지어는 화장실 위치에 따라서도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아….”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선 내가 담당한 접시에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내가 작은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라도 해 봤다면 제스의 저 복잡한 말을 완전히 공감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근데 그 국경일 행사는 그런 레스토랑과는 상황이 달랐잖아요. 테이블이나 의자도 불편하고, 환경이 쾌적하지도 않고, 사람이 많아서 시끄럽고 그랬을 텐데.”

“맞아요. 거긴 일반 레스토랑과는 비교할 수가 없죠. 그래서 미스터 장의 능력을 바로 볼 수가 있었죠.”

제스는 아리송한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무슨 능력을 봤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