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3화 (144/202)
  • 143. 부담감

    “이걸 전부 다요?”

    주문을 듣고 놀라서 되묻는 건 맥줏집 직원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나와 대사관 직원들 역시 예민희 서기관을 쳐다보며 저지해 보려 했지만 단호했다.

    “계산은 제가 다 할 테니깐 이거 다 주세요.”

    제일 연장자인 안지용 참사관에게 시선을 돌려 도움을 요청해 봤지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연했다.

    “음식을 그렇게 많이 시킬 거면 술도 좀 더 시켜야겠군요 하하.”

    “하하….”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같이 밥 한번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의 양을 알 수 없는 거였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양을 먹는 사람일 수도 있지.

    예민희 서기관의 주문 덕에 푸짐한 한 상이 차려졌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 건배!”

    “건배!”

    “수고하셨습니다.”

    모두가 시원하게 물방울이 맺힌 맥주잔을 들어 올렸지만 예민희 서기관만이 포크를 먼저 집어 들었다.

    “예 서기관님, 맥주는 한잔 안 하세요?”

    김준우 서기관이 건배사를 잠시 멈추고 물었지만 예민희 서기관은 맥주엔 관심도 없다는 듯 음식을 씹으면서 대답했다.

    “술은 안 해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드세요.”

    “아… 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나도 대충 캐릭터 파악이 완료되어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맥주를 입에 갖다 대었다.

    “캬아 좋네요. 역시 맥주는 파나르가 최고예요.”

    “파라과이 맥주는 어땠어요?”

    “거기선 술 입에도 안 대었는데요?”

    “아니 거기까지 가서 그럴 수가 있어요?”

    안지용 참사관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그땐 마실 시간도 없었고,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했었다.

    “근데 예민희 서기관님은 원래부터 술을 아예 안 하세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예민희 서기관에게도 관심이 돌아갔다. 조금 어색해도 술이 한잔 들어갔을 때 대화를 더 나누는 편이 나았으니까.

    “벌써 다 드셨어요?”

    “네 배부르네요.”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포크를 내려놓은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잠시 쉬는 게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자리를 정리한 상태.

    누가 봐도 식사가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다 드시려고 시키신 거 아니었어요?”

    “주문할 때 항상 그럴 맘으로 주문하지만 쉽지 않네요.”

    “그렇다기엔 다 한 입씩밖에 안 먹었는데.”

    “음식은 뭔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어야 맘이 편해지더라구요 호호.”

    두 눈만 웃으며 가만히 앉아만 있는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덕분에 한참 동안 어색한 자리가 계속되었다.

    “예민희 서기관님, 식사 다 하셨으면 먼저 일어나셔도 괜찮아요. 저희는 좀 오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술도 안 드실 거면 굳이 있을 필요가 없죠.”

    김준우 서기관의 제안에 예민희 서기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대신 지금까지 먹은 건 제가 계산할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민희 서기관은 기어코 술값을 계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그러게요. 진짜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네요.”

    예민희 서기관이 나가자 다들 쌓여 있던 불만을 하나씩 내뱉었다.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어제는 간단한 서류를 작성해서 올렸는데 쉼표 하나 안 찍었다고 서류 전체를 반려하시는 거예요. 그냥 자기가 하나 찍어서 수정하면 되지.”

    “저는 문법이 조금 어색하다고 뭐라고 하신 적 있어요. 제가 파나르 사람인 걸 까먹었나 봐요.”

    막내급인 윤아와 카리나를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준우 서기관 역시 예민희 서기관의 선배임에 불구하고 함부로 일을 부탁하지 못했다.

    “나는 손이 좀 부족해서 일 하나를 부탁했는데 이것까지 제가 해야 하냐고 하길래 아무 대답도 못 했네요.”

    “아니 김준우 서기관님은 선배시잖아요. 선배가 시키면 해야지!”

    “그러니깐요. 한국 문화는 위아래가 확실한 거 아닙니까?”

    윤아와 카리나는 흥분해서 김준우 서기관을 부추겼다.

    “사실 내가 해야 할 일은 맞는데…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면 좀 도와줄 수도 있지.”

    “그러게요.”

    나는 예민희 서기관과 업무적으로 겹칠 일이 없어서 그냥 듣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한창 불평을 늘어놓는 사이 예민희 서기관이 머물렀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잘게 찢어져 돌돌 말려 있는 휴짓조각들이나 돌탑처럼 쌓아 둔 과자가 보였다.

    “…….”

    별생각 없이 한참을 빤히 쳐다보니 예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기억 속엔 오늘 예민희 서기관과 비슷한 모습의 내가 있었다.

    “하아….”

    한시도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뭔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로 인해 내가 머물렀던 자리 역시 어수선했다.

    그 불안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은 주변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

    퇴근 후 배달 음식을 잔뜩 시켜 놓고는 두어 개만 집어먹고 잠이 들곤 했었다.

    특별히 배가 고픈 게 아니라 푸짐한 음식이 눈앞에 있어야지만 맘이 조금 편해졌었다. 아마도 보상 심리였던 것 같다. 이 정도쯤은 나에게 선물을 해 줘도 된다는 보상 심리.

    H호텔에서 주방장이 처음 되고 나서 내 모습이었다. 아주 작은 실수라도 하지 않기 위해 예민한 상태를 24시간 유지하려 노력했다.

    맡은 업무 중에 아직 잘 모르는 게 있거나 처음 해 보는 일이 생기면 밤을 새워서 공부하는 건 일상이었다. 혹여나 어설픈 모습을 들킬까 봐 익숙해지기까지 일부러 직원들을 피하기도 했다.

    예민희 서기관에게서 예전의 그런 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근데 예민희 서기관님 환영식이 언제랬죠?”

    “환영식이요? 일단은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긴 한데 또 모르죠. 갑자기 연기하자고 할 수도 있어요.”

    “다음 주요? 알겠습니다.”

    “계속 저런 식이면 환영식이고 뭐고 해 줄 맘이 없어지겠네.”

    이유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파나르에서 3년 동안 함께 으쌰으쌰 하며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데 이런 일로 지체할 수 없었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그래도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 같은 김용수 대사에게 조언을 구해 보기로 했다.

    “어제 회식은 재밌었나요?”

    “네 덕분에 맛있는 거 많이 먹었습니다. 대사님도 같이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허허 내가 가면 자리가 불편해지잖아요. 그리고 마침 외부 약속도 있었구요.”

    아니라고 손사래 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용수 대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분위기를 딱딱하게 만든다.

    아무리 편하게 하라고 해도 회사의 최고 상사 앞에서 완전히 풀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김용수 대사는 절대 과음도 하지 않고 항상 정장 차림을 고수했으니깐 더욱 그랬다.

    그건 김용수 대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예민희 서기관은 좀 어떻던가요? 술 한잔하니깐 좀 친해졌나요?”

    “아니요.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질 않고, 한 30분 정도 앉아 있다가 갔습니다.”

    “허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다른 직원들이 불편해하는 거 같아 먼저 보냈습니다.”

    김용수 대사에게 어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알려 줬다. 그리고 걱정하는 김용수 대사에게 내가 느꼈던 생각을 말해 보았다.

    “제 생각인데 예민희 서기관이 파나르에서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담이요?”

    “네 최근에 한참 잘나가는 파나르 대사관에 수석 합격자로서 파견되어 얼마나 더 대단한 성과를 낼지 주위에서 부담 아닌 부담을 줬을 겁니다.”

    “흠….”

    “대부분 농담이었겠지만 본인은 첫 부임지기도 하고, 개인적인 욕심도 있고 해서 과도하게 부담을 가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무실에 군것질거리 봉지로 가득 찬 쓰레기통이나 강박증을 의심해 볼 정도로 잘 정리된 책장, 그리고 과하게 주문해 놓고 제대로 먹지도 않은 음식들 등.

    여태 보고 느낀 것을 말해 주자 김용수 대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요. 사실 예민희 서기관은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외교부 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어요. 역대급으로 높은 점수를 취득하고 합격을 했거든요.”

    “역시… 주위에서 그냥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담이 될 수도 있었겠네요.”

    “특히 해외 생활은 처음이니 더 그랬겠죠.”

    한국에서는 그런 부담이 그나마 익숙했을 것이다. 공부나 시험은 자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고, 게다가 그게 해외였으니 두렵고 겁이 났을 것이다. 거기다 겹쳐서 온 향수병은 더욱 멘탈을 흔들었을 테고.

    “그래서 말인데요. 예민희 서기관님 환영식 때 그 부담감을 조금 없애 줘 보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말로는 쉽지만 우리가 없애고 싶다고 없앨 수 있나요?”

    “제가 생각해 본 게 있습니다.”

    “뭔가요?”

    김용수 대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칫하면 김용수 대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말을 했다.

    “좋습니다. 한번 해 봅시다. 근데 직원들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네요.”

    “그렇다고 대사님이 잘못하신 건 아니구요 굳이 따지자면 대사라는 직책 자체가 문제인 거죠.”

    “분위기가 다시 좋아질 수만 있다면 내 기꺼이 망가져 주겠습니다. 대신 음식은 장 셰프가 책임지고 예민희 서기관이 맘을 열 수 있도록 준비해 줘요.”

    “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김용수 대사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 낸 뒤 환영회 준비에 돌입했다. 이번 환영회의 성공 여부는 김용수 대사의 태도였으니까.

    일단은 예민희 서기관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아는 것이 중요했다. 생각과는 달리 아예 핀트를 잘못 잡고 있을 수도 있으니 과거를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이 말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전화를 들었다.

    -안지용 참사관님.

    -요리사님이 저한테 직접 연락을 주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도와 드릴 거라도 있나요?

    -역시 척 하면 척이네요.

    술을 좋아하고 조금 허술해 보여도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본업을 할 땐 그 누구보다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민희 서기관님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예민희 서기관이요? 왜요? 뭐 약점이라도 잡아 놓으시게요?

    -에이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환영회 준비 때문에요.

    -무슨 환영회를 하는데 뒤까지 캡니까?

    뒤를 캔다는 표현은 과장됐다.

    외교부 직원이라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정보를 비롯해 언론에 알려진 내용 등 정도를 알면 된다. 정상적인 범위 내에서 안지용 참사관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고 허락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저는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 예민희 서기관의 옛날 인터뷰나 자소서 같은 데 고향이나 좋아하는 음식 같은 게 거론된 게 있나 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그거면 됩니까?”

    -네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도 안 참사관님이 더 뛰어나실 것 같아서요.”

    -제 전문이죠.”

    -그럼 부탁 좀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내일 중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민희 서기관의 공개된 정보가 수집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지용 참사관이라 한들 큰 수확은 없었다.

    -알아봤는데요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더라구요. 음식에 대한 건 더더욱 없어요.

    -음… 그렇군요. 저 정도로 공부한 사람들이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었겠어요?

    -그렇긴 하죠.

    이력서나 자소서뿐만 아니라 예민희 서기관이 학창 시절 했던 대외 활동을 전부 다 살펴봤지만 별로 쓸 만한 정보가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그럼 예민희 서기관 어머님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그거야 뭐 비상 연락망이 있으니깐 바로 알려 드릴 수 있죠.

    가장 만만한 게 집밥의 추억을 건드리는 거지.

    그러다가 예민희 서기관이 집착하던 음식이라도 찾는다면 성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 장덕수라고 합니다. 예민희 서기관님의 환영식 때 나눠 먹을 음식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아직 취향을 잘 몰라서 연락드립니다. 통화가 괜찮을까요?]

    전화를 걸기 전 놀라지 않도록 메시지를 남겼다. 국제 전화번호로 걸면 그냥 거절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외국에 나가 있는 자신의 딸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 준다는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몇 분 지나지 않아 금세 답장이 왔다.

    [네 언제든지 통화 괜찮습니다.]

    답장을 받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예민희 서기관의 어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반가운 말투로 대뜸 사과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요리사님. 우리 딸 성격이 좀 지랄맞죠? 엄마로서 죄송합니다.

    -하하 안녕하세요. 저는 같이 일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딸 성격은 제가 잘 알죠. 집에서도 어찌나 지랄맞은데요. 거기서 또 보나 마나 유난을 떨었을 거예요.

    목 끝까지 그렇다는 대답을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내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건 없었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이번 환영식 때 예민희 서기관님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 좀 해 보려구요. 여기 음식을 영 못 드시는 거 같더라구요.

    -음… 우리 딸이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잘 없는데.

    -뭐 자주 먹는 음식 같은 건 없나요?

    예민희 서기관의 어머니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민희가 어릴 적에 환장하던 음식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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