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2화 (143/202)
  • 142. 새 직원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교육 매뉴얼이 완성되고 있었다.

    “좀 더 현실적인 내용을 넣어 달라고 말했어요. 이번 파라과이 사례를 보니 정말 몰라서 넘어간 요리사들도 많을 것 같더군요.”

    “네 맞습니다.”

    오, 만찬 때 활용할 수 있는 음식들의 레시피나 표준 원가는 물론이고, 외국의 시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나 식재료의 공사 구분을 해서 사용하는 법 등.

    재외 공관 요리사의 OJT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많은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 자료가 배포되면 요리사들의 교육은 물론이고, 우리 공관들은 어느정도 자정 능력을 갖추게 될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당장은 미비하겠지만 이 메뉴얼을 통해 기준이 자리 잡힌다면 과도한 지출이나 재고 장난은 앞으로 점차 사라질 것이다.

    관저에서 함께 생활하는 요리사는 직원인 동시에 공관장의 일탈을 감시하는 역할을 병행하게 될 것이고.

    김용수 대사가 굳이 감사팀에 고발하지 않았던 이유도 자체적으로 좀 더 건강한 조직 문화가 생기길 바랐던 것이다.

    “대신 장 셰프가 고생한 만큼 대대적으로 생색 좀 내 달라고 했어요.”

    “에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이런 것도 없으면 거기까지 가서 고생한 보람이 없죠.”

    내가 제작에 참여한 교육 매뉴얼은 전 공관에 배포되었고, 외부에서도 옳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해외 공관의 긍정적인 사례로 보도되었다.

    물론 내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건 덤으로.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파라과이 대사관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상 궤도에 올라왔고, 홍기석 요리사의 실력 또한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곽민수 대사는 자신이 가진 협상 능력을 통해 많은 법인장들과 교민들의 지지를 받는 대사가 될 수 있었다.

    회귀 전 많은 기업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기고, 공금을 자기 돈처럼 사용하는 곽민수 대사는 이제 없었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사무실.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오후였다.

    한국에서 새로운 직원이 넘어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누구도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수석 합격이라는 말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풍기는 아우라가 강해서인지 이상하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저… 예민희 서기관님.”

    윤아가 문을 열어 말을 걸었지만 대답도 없이 고개만 들어 올리는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점심시간인데 식사 안 하세요?”

    “저는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젠 점심 먹을 거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됩니다.”

    윤아는 싸늘한 시선에 두 번 물어볼 것도 없이 문을 닫고 돌아섰다. 이렇게 거절당하기를 몇 번째. 예민희 서기관 역시 윤아에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안 드신대요?”

    “알아서 드신다고 저희끼리 먹으래요. 이제는 물어보지도 말래요.”

    “차라리 잘됐네요. 근데 원래 점심은 안 드시나?”

    파나르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예민희 서기관이 점심 먹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에게 냉랭하게 대하는 민희였기 때문에 함부러 방문을 열지도 못했다.

    “낯을 엄청 많이 가리는 성격인가 봐요.”

    “언제까지 낯을 가릴 거예요.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그래도 뭐 일은 칼같이 하잖아요. 여기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도 벌써 1인분은 거뜬히 하고 있으니까.”

    “그렇긴 하죠. 퇴근도 거의 제일 늦게 하던데.”

    “뭐 김용수 대사님이 야근을 강요하는 타입도 아니니깐 우린 우리 페이스대로 가자구요.”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한 팀이 된 파나르 대사관의 직원들은 애써 쌓은 팀워크가 무너지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덜 쓰기로 했다.

    일단 수석 합격자라 그런지 업무 능력은 뛰어났으니깐 친해지는 건 차차 하면 되는 일이었다.

    김용수 대사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괜히 이유를 묻고 억지로 바꾸려 해 봤자 역효과가 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께 아침을 먹으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 파라과이 대사관에서 크게 한 건 한 거 같던데요?”

    “정말요?”

    “네 파라과이에서 제일 긴 터널을 뚫는 사업을 우리나라 기업이 따냈나 봐요. 그때 곽민수 대사의 역할이 컸다고 하네요.”

    “우와 능력이 대단하네요.”

    “능력으로 그 자리에 간거니깐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분명 도움이 되는 사람이죠.”

    다행히도 곽민수 대사와 홍기석 요리사는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김용수 대사의 방법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나저나 대사님. 예민희 서기관은 여전히 낯을 가리시나요?”

    나는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처음 왔을 때부터 뭔가 분위기가 싸하다는 건 여기저기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본래 그런 성격의 사람이라도 보통은 공관장에겐 조금 상냥해지기 마련인데 예민희 서기관은 김용수 대사에게도 차가웠다.

    “아직까지는요. 그렇지만 게으르다거나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다른 분들이 조금은 어색해졌겠어요.”

    “아무래도 이전보다 분위기가 조금 딱딱해진 건 있죠.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예민희 서기관이 와서 빠르게 도움을 주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좀 달라지겠지라며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장 셰프. 본부에서 완성된 메뉴얼이 도착했는데 내일쯤 사무실에 와서 한번 확인해 봐요. 김준우 서기관이랑 같이 더 추가할 건 없는지 확인해 보고 장 셰프도 하나 가져가요. 제작에 장덕수라는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으니까요.”

    “오호 좋네요.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내 이름이 적힌 완성된 교육 매뉴얼을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직원들의 얼굴을 볼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안녕하세요. 저 왔습니다.”

    “요리사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안지용 참사관은 물론이고, 김준우 서기관, 윤아 그리고 새로 온 현지인 직원 카리나 씨까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을 보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요리사님 저 방에 가시면 예민희 서기관님 계신데 인사드리고 오세요. 그러고 나서 같이 확인 한번 해요.”

    “아! 지금 계세요?”

    “네 아직 얼굴 뵌 적은 없으시죠? 그래도 처음이니깐 인사라도 나누는 게 좋겠죠.”

    “당연히 그래야죠.”

    예민희 서기관은 본의 아니게 사무실마저 따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까워지려 해도 가까워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두드리자 예상외로 상냥한 말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는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안녕하세요. 관저에서 일하는 요리사 장덕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장덕수 셰프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야 얼굴을 뵙네요.”

    “그러게요.”

    예민희 서기관의 첫인상은 다른 직원들이 말했던 것처럼 많이 차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곧바로 정적이 흘렀다. 나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바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바쁘신 거 같으니 가 보겠습니다.”

    “아…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민희 서기관 역시 방을 나가는 날 붙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뒷걸음질로 나오면서 사무실 내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상과 책꽂이들.

    칼같이 정리되어 있는 사무실에 넘치기 직전인 쓰레기통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예민희 서기관님이랑 인사했어요?”

    “네. 딱 인사만요.”

    모두가 모여 있는 사무실로 돌아오자 다들 예민희 서기관의 반응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요리사님한테도 얄짤없는 거 보니 그냥 원래 성격이 그런가 봐요.”

    “다들 아직도 서먹서먹해요?”

    “우린 안 그럴려고 하는데 예 서기관님이 좀 피하는 거 같아요.”

    “에이 설마요. 일부러 피하기야 하겠어요?”

    “그게 아니면 우리가 뭐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대하잖아요.”

    처음엔 낯선 곳에 왔으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던 분위기에서 조금씩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민희 서기관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파나르 대사관의 분위기는 최상이었으니까.

    특히 김준우 서기관은 팀워크가 깨져 인사 고과에 영향이라도 생길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참아 주는 것도 어느 정도지 계속 저런 식이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나이도 더 많고, 선배인데.”

    “뭐 좀만 더 기다려 보시죠. 아니면 회식 같은 걸 해서 술이라도 한잔 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안 그래도 오늘 마치고 다 같이 맥주 한잔하자고 물어봤는데 알겠대요.”

    “오 정말요? 잘됐네요. 거봐요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네요.”

    “요리사님도 같이 가요. 여기서 일 끝내고 다 같이 가요.”

    “저야 당연히 콜이죠.”

    예민희 서기관의 공식적인 환영 만찬은 조만간 관저에서 할 예정이었다.

    원래는 오자마자 할 예정이었는데 이마저도 예민희 서기관이 몇 주 연기를 시켜 버리는 바람에 한참 후에 하게 됐다.

    “그래도 회식을 거절 안 하는 거 보면 딱히 사람들이 싫은 건 아닌가 봐요. 사람이 싫으면 회식도 거절했을 텐데.”

    “그렇다 해도 계속 저런 태도면 우리가 영 불편해요.”

    “저도 좀 그래요. 뭐 말 거는 게 쉽지 않아요.”

    “저두요.”

    그나마 선배인 안지용 참사관과 김준우 서기관은 상황이 좀 나은 편이었지만 윤아와 카리나는 근무 시간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특별히 언성을 높이거나 지적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더 무섭다고 했다.

    “그래도 오늘 다 같이 맥주 한잔하고 나면 좋아지겠죠.”

    “그렇겠죠? 제발 그러길.”

    근무지가 달라 내가 피부로 느끼는 불편함은 없으니 완전히 공감할 순 없었다. 하지만 파나르 대사관의 팀워크가 깨지는 건 나 역시 결사반대였다.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최대한 돕고 싶었다.

    “자 다들 끝났으면 일찍 일어날까요?”

    “네 바로 가시죠.”

    하루도 빠짐없이 야근을 자처하던 예민희 서기관 역시 오늘은 제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큰 발전이었다.

    외부에서 저녁 일정이 있는 김용수 대사를 제외하고 모든 직원이 근처 맥줏집으로 향했다.

    “안주는 뭘로 시킬까요?”

    “안주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시키세요. 저는 맥주만 있으면 됩니다.”

    안지용 참사관의 취향은 여전했다. 오직 알코올.

    술 말곤 모든 음식에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럼 요리사님이 한번 추천해 주세요.”

    “저요? 저보단 카리나 씨가 추천해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저는 여기가 처음이라서요.”

    기왕이면 맛있는 걸 먹는 게 좋지.

    현지 사정에 빠삭한 카리나 씨에게 주문을 떠넘겼다.

    “여기는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요. 아무거나 시켜도 돼요.”

    “그래요? 그럼 먹고 싶은 걸로 하나씩 골라 볼까요?”

    그때였다.

    잠자코 앉아 있던 예민희 서기관이 메뉴판 하나를 낚아챘다.

    “오! 예민희 서기관님 특별히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잠시만요.”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바라보던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그런 예민희 서기관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고.

    “여기서부터 여기 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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