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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1화 (14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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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세프.”

    “네 대사님.”

    김용수 대사의 표정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결연함이 느껴졌다.

    “이번에 먼 곳을 다녀오느라 너무 수고 많았어요. 근데 이 증거들은 내가 다른 방법으로 활용해도 될까요?”

    “다른 방법이요? 고발이 아니라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이 증거들을 보면 김용수 대사가 더욱 신이 날 줄 알았는데.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분노를 표출하던 김용수 대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냥 넘어가겠다는 건가 아니면 더 묵혀 두었다가 크게 터트리려고 하는 건가.

    일단은 김용수 대사의 말을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장 셰프가 거기까지 간 이유는 후배 요리사들을 위해 교육을 해 주고, 그 매뉴얼을 만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죠? 만찬은 알다시피 핑계였고.”

    “네 그렇긴 했습니다. 그래서 증거를 모으는 것 말고도 홍기석 요리사의 교육에 최선을 다했구요.”

    내가 회귀 전 그때의 기억이 없었다면 곽민수 대사의 불손함에 휘둘리다가 돌아왔을 것이다.

    화를 누그러트리지 못해 홍기석 요리사의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거고.

    아니, 하기 싫었을 거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 버렸으니 같은 종자라고 단정 지었을 것이다.

    “이번 출장은 교육을 하고, 매뉴얼을 마무리한 걸로 넘어갑시다. 곽민수 대사의 일은 내 방식대로 해결해 볼게요.”

    “대사님 방식으로요?”

    “네 정 안되면 그때 돼서 감사팀에 고발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꼭 약속할 테니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어렵게 구해 온 증거라 그런지 김용수 대사의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사실 난 김용수 대사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생각이었다. 여태까지 일해 본 결과 항상 옳은 결정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맘 같아선 빵 하고 터트리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김용수 대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곽민수 대사의 문제는 쉽게 생각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나보단 장 셰프의 미래를 위해서요.”

    “제 미래요?”

    “나야 뭐 여기서 끝이 나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이니깐 상관없지만 장 셰프는 그게 아니잖아요.”

    김용수 대사가 하는 말뜻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방식도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 * *

    늦은 밤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김용수 대사는 시차를 계산해 잠들기 전에 수화기를 들었다. 역시나 파라과이 대사관에서는 곽민수 대사가 부재중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오늘도 역시 외부 일정이란 핑계로 골프나 치고 있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김용수 대사는 곧바로 곽민수 대사의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이나 가도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래도 안 받나 보자.’

    김용수 대사는 받지 않는 전화를 보면 장덕수 셰프의 말대로 해 버릴까라는 후회가 잠시 들었지만 다시 한번 시도했다.

    다시 전화를 거는 방법 대신 사진 몇 장을 보내는 방법으로.

    -아! 여보세요. 김용수 대사님 전화하셨군요. 외부 일정 중이라 전화가 온지 몰랐습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습니다 곽 대사.

    곽민수 대사의 말투는 정중했다. 그때와는 180도 달라진 태도.

    협상의 귀재라더니 상대방은 물론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란 것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곽민수 대사였다.

    -이번에 장덕수 셰프 덕에 아주 중요한 만찬을 잘 치렀습니다. 먼저 전화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중요한 만찬 잘 끝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만찬 잘못했다간 외교부 전체에 문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두 사람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단 걸 잘 알고 있었다.

    곽민수 대사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사진과 영상들이 장덕수 셰프의 행동이란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장덕수 셰프가 참 영특해요. 그렇죠?

    -네… 네 맞습니다. 그런 셰프를 얻으셔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대사님은.

    -맞아요 아주 좋아요. 덕분에 게으르고 불친절하다는 해외 공관들의 이미지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거든요.

    -아… 하하하. 다행이네요.

    -근데 우리 곽 대사께서 장 셰프가 어려서 그런지 좀 쉽게 보셨나 봐요.

    -네? 쉽게 보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다. 장덕수 셰프의 요리는 아주 훌륭했고 저 역시 어리지만 충분히 존중했습니다.

    성급히 변명을 해 댔지만 김용수 대사가 말하는 뜻은 그게 아니었다.

    장덕수 셰프의 음식에 대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아니면 우리 셰프가 거기까지 가는데 지하 창고에 술을 가득 채워 두고, 식재료는 과도하게 사서 쟁여 두고, 골프장에서 인사를 하게 해요? 그것도 근무 시간에?

    -네? 아… 저 그건….

    곽민수 대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보낸 건 사진 몇 장이지만 그 뒤에 많은 증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공관장들은 요리사와 가장 친하게 지내면서도 동시에 가장 조심해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조심해야 한다구요?

    곽민수 대사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자신이 왜 부하 직원, 그것도 외교관도 아닌 일개 요리사를 조심해야 하는 건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요리사들은 내 집이나 다름없는 관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 나의 진짜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이에요.

    관저는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공간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공관장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게 쉽지 않다. 항상 단정하고, 근엄한 공관장의 모습만 볼 뿐.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긴장이 풀리고, 편한 복장에서 나오는 본성은 같은 건 관저에서 일을 하는 요리사만 볼 수 있다.

    -가족을 제외하고 내 본모습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치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요리사예요. 그런 사람들과 적이 되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겠죠?

    -…….

    -곽 대사님은 그 치부를 우리 요리사에게 들킨 겁니다. 우리 요리사는 홍기석 요리사처럼 당신 가족이 아니거든요.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곽민수 대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그냥 하도 유명하다길래 그 음식이 한번 먹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의 근무 태도라든가 과하게 구매한 식재료까지 문제 삼을진 몰랐다.

    -홍기석 요리사는 가족에다가 초짜이니 속이기 쉬웠을 테고, 자신의 직속 부하 직원들은 인사 고과 점수 때문에 곽 대사가 하는 일에 함부러 토 달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죠?

    -…네.

    곽민수 대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용수 대사의 말은 전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 장덕수 셰프는 당신의 가족도 아니고, 직속 부하 직원도 아니니 곽 대사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을 겁니다. 우리 파나르 대사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행동들이었을 테니까.

    김용수 대사의 말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장덕수 셰프가 이 증거들을 주면서 나한테 말하더군요. 감사팀에 보고하라고요.

    -감… 감사팀이요?

    예상했던 수순이었지만 감사팀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곽민수 대사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두려움보단 여태 누렸던 것을 전부 포기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클 것이다.

    -그렇지만 난 장덕수 셰프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습니다.

    -네? 왜… 요?

    곽민수 대사는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왜냐고 되물었다.

    -장 셰프가 감사팀에 고발을 하라면서 하는 말이 홍기석 요리사가 제대로 된 공관장 밑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하더군요.

    -아….

    -알고 있었어요? 홍기석 요리사가 꽤 진지하게 그 일을 해 보고 싶어 한다는 걸요?

    -…….

    그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가족이니까 그냥 입막음이 쉬운 사람 정도로 생각했겠죠.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되든간에.

    -네….

    -곽 대사가 파라과이에 부임한 지 이제 겨우 두 달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남은 기간 동안 제대로 해 봐요.

    곽민수 대사는 김용수 대사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네?

    -당신의 가족인 홍기석 요리사를 위해서라도 3년간 최선을 다해 보란 말이에요. 거기서 퇴직하고 나서 뭐할 거예요? 인생 아주 길어요. 지금 그렇게 하는 거 안 걸릴 거 같죠? 아니, 걸려도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죠?

    김용수 대사는 파라과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 본인들에게도 큰 타격이 올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거기서 퇴직할 때까지 이 증거들은 내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깐 모르는 게 있으면 다른 공관장들에게 물어보고, 당신의 가족에게는 최소한의 의리를 지키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입니다.

    아직은 작은 비리지만 언론들은 여태 해외 공관들에게 쌓여 왔던 의혹을 뿌리 뽑겠다며 대대적인 감사를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대놓고 털기 위해 들어오는 감사팀을 버텨 낼 공관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 공관들의 이미지는 더 나락이 될 것이고, 그곳 요리사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요리사들 역시 식재룟값을 부풀려서 사리사욕을 채웠을 거라고.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소문이 돌기만 해도 타격이 있을 테니까.

    김용수 대사는 당장의 시원함보다 대의를 선택했다. 장덕수 셰프를 위한 것은 물론이고, 외교부 전체를 위한 일이었다.

    물론 잠시 지켜본 뒤 변할 기미가 안 보이면 곧바로 고발할 생각이었다. 그땐 일말의 관용 따윈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끊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단호하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한 말로 곽민수 대사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생각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면 달라질 것이다.

    청와대 요리사라는 꿈을 가진 자신의 부하 직원의 길을 막지 않길 바라며 김용수 대사는 잠이 들었다.

    * * *

    며칠 후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나는 시차에 적응하라는 김용수 대사의 배려로 며칠을 쉬고 출근을 할 수 있었다. 겨우 며칠로 크게 달라질 건 없었지만 이런 사소한 것에 기분이 좋아지는 게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오늘 얼굴이 좋아 보시네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전해 줄 좋은 소식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감사팀에 고발하지 않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후로 어떻게 했는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속이 시원해 보이는 김용수 대사의 표정을 봐선 잘 해결된 것 같았다.

    애써 모은 증거가 허투루 쓰이지만 않았으면 된다. 김용수 대사가 나보다 더 의미 있게 사용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좋은 소식이란 게 뭔가요?”

    “두 개가 있습니다.”

    “와우 두 개나요?”

    “네 장 셰프가 파라과이에 가 있는 동안 파나르에 새로운 직원이 채용되었습니다. 곧 본부에서 출발할 예정인데 무려 수석 합격자라고 합니다.”

    “와아… 수석이요? 대단하네요.”

    외무 고시 수석 합격자가 파나르로 온다는 건 그만큼 파나르 대사관의 위엄이 커졌다는 의미였다. 그런 곳에서 일을 하는 나에게도 기쁜 일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 역시 본부에서 온 연락입니다.”

    “무슨 소식인가요? 빨리 말해 주세요.”

    기쁜 소식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궁금했다.

    파나르에 온 이후로는 줄곧 좋은 소식들만 들었지만 여전히 설레는 단어였다.

    “본부에서 교육 매뉴얼 초안이 완성되었답니다.”

    “오 정말이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네 맞아요. 단순히 요리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업무에 대한 내용도 많이 추가되었다고 하네요.”

    “업무에 대한 내용이요?”

    김용수 대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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