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0화 (141/202)

140. 증거

다들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홍기석 요리사는 이런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홍기석 요리사를 옆에 세워 두고 입을 열어 큰 소리로 말했다.

“음식은 맛있게 드셨습니까?”

“완전 잘 먹었어요. 따봉따봉.”

“역시 채궈에호.”

혀가 꼬인 상태에서도 엄지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이었다. 한껏 기분이 업되어 있는 그들을 향해 본론을 꺼냈다.

“그럼 오늘 제일 고생한 홍기석 요리사님한테 팁 좀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요리사님 괜찮아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만류하는 홍기석 요리사를 뿌리치고 그들의 주머니가 열릴 수 있도록 계속 자극했다.

“제가 여기 머무르는 동안 홍기석 요리사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노하우를 알려 줬습니다. 그렇죠?”

“네 그건 맞지만….”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홍기석 요리사.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이런 음식들 계속 드실 거면 여기 있는 홍기석 요리사한테 잘 보여야 할 겁니다.”

“……!”

“아!”

처음엔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던 사람들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그제야 내 말뜻이 이해가 되었는지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기 시작했다.

“옳은 말이네! 파라과이에서 이런 음식 어디서 먹어 보겠냐? 홍 셰프, 이리로 와서 이거 받아요.”

“옜다 내 거도 받아요. 제대로 배운 거 맞죠?”

“골프 한번 안 쳤다 생각하면 되지. 앞으로도 맛있는 음식들 잘 부탁해요.”

곽민수 대사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가 홍기석 요리사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팁을 건넸다.

나에게 건네주는 몫까지 모두 홍기석 요리사에게 전해 준 뒤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다.

“근데 일하면서 이런 거 받아도 돼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냥 말 그대로 고맙다는 의미니까요. 그리고 이런 재미도 있어야지요.”

“저야 좋지만.”

“저런 거 주면 거절하지 말고 받으세요.”

저들은 공금을 자기 돈처럼 쓰는데 오늘 하루 고생한 홍기석 요리사가 이 정도쯤은 받아도 된다. 그리고 나는 이 돈은 허투루 쓰게 놔둘 생각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돈 다른 데 쓰지 말고 칼 한 자루 사는 게 어때요?”

“칼이요?”

“네 홍기석 요리사님 개인 칼 없으시죠?”

“네 그런 건 없어요.”

그래도 요리사로 일하기로 했다면 자기 이름이 새겨진 조리복 한 벌과 자기 손에 꼭 맞는 칼 한 자루쯤은 있어야지. 제대로 된 조리복도 없이 일을 하는 홍기석 요리사를 보며 팁을 받아 주기로 맘먹었었다.

“제가 칼 고르는 방법도 알려 줄 테니 파나르로 돌아가기 전에 같이 가요. 그리고 재외 공관 요리사 조리복엔 태극기도 하나 박아서 입어야죠.”

“오 태극기요?”

“네 국가 대표처럼이요.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마음가짐이 달라지더라구요.”

홍기석 요리사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졌다.

나 역시 가슴팍에 꽂아 뒀던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 제대로 촬영이 되었는지 확인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많은 영상과 사진들이 새롭게 추가가 되었다.

이제 이걸 감사팀에게 넘기기만 한다면 이전처럼 곽민수 대사의 임기 말에 퇴임 같은 파면으로 퉁치고 넘어가진 못할 거다.

제대로 된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홍기석 요리사에게도 다른 대사를 만나서 많은 만찬을 치르는 게 도움이 될 테고.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여기에 온 게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아니었단 확신이 들었다.

몇 시간 후.

해가 지기도 전에 시작한 중요한(?) 이 만찬은 다음 날 새벽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홍기석 셰프 님 피곤하시죠?”

“네 장난 아니네요. 이런 걸 어떻게 매주 합니까? 잠도 제대로 못 자겠네요.”

“원래 정상적인 만찬이라면 이렇게 늦게 끝나진 않아요.”

“정상이요? 그럼 오늘 만찬은 비정상인가요?”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싱긋 웃고 넘어갔다. 오늘 같은 만찬은 굳이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만찬이었다.

피 같은 국민들의 세금을 이용하는 공관인 만큼 최대한 정확하고, 투명하게 비용을 사용해야 했다. 식재료를 직접 구입하는 요리사들이 머리가 조금 아프겠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홍기석 셰프 역시 겉으론 말하지 않았지만 파라과이 대사관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 *

파나르로 돌아가는 날.

처음 도착한 날과는 다르게 곽민수 대사가 직접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때와 변한 게 있다면 나에 대한 태도가 조금은 상냥해졌다는 거?

하지만 그걸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평일이었지만 역시나 골프복 차림이었다. 새벽까지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또 골프장으로 향하는 곽민수 대사였다.

“장덕수 셰프. 덕분에 중요한 만찬을 잘 치를 수 있었어요. 우리 홍기석 셰프도 배운 게 많다 하니 여기까지 온 게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던 것 같네요.”

“저도 아주 중요한 만찬의 결과가 좋은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 어제의 만찬 때 나눈 의견 덕분에 파라과이 교민들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겁니다. 그런 의미로 며칠 더 있다 가면 어때요? 중요한 만찬은 많은데.”

“파나르도 요즘 많이 바빠져서요.”

난 곽민수 대사의 진심이 담긴 농담을 단칼에 거절했다. 중요한 만찬이란 말은 어차피 거짓말일 게 뻔했으니. 교민들을 거론하는 저 입에서도 가식이 느껴졌다.

이 바이러스가 더 커져서 손을 쓸 수 없기 전에 잘라 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대신 홍기석 요리사에겐 사실을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홍기석 요리사님 잠시만요.”

“네.”

볼일이 있다며 일찍 돌아간 곽민수 대사를 뒤로하고 홍기석 요리사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홍기석 요리사님. 이런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요리사님께 꼭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뭔데요?”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에 홍기석 요리사의 동공이 커지고 고개가 사방으로 몇 번 돌아갔다.

“앞으로 어느 나라를 가든 여기처럼 일하시면 안 돼요.”

“네? 왜요?”

“지하 창고에 그렇게 많은 술을 보관해 놓는 것도 식재료를 구매할 때 과도하게 돈을 쓰는 것도 안 됩니다. 그리고 곽민수 대사님처럼 근무 시간에 골프를 쳐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손님과 만남이라고 해서 괜찮다고 하시던데.”

“진짜 중요한 만남은 조용한 곳에서 해야겠죠. 골프를 치면서 나눠야 할 중요한 대화는 없습니다.”

곽민수 대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확실히 알고 한 행동이지만 홍기석 요리사는 진짜 몰라서 가만히 넘어갔을 수 있다.

그냥 곽민수 대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거고 조금 의아했어도 집안의 어른이니 별다른 말을 못 했을 것이다.

설령 알게 되더라도 자기가 있는 동안 쉽게 월급이나 벌어 가라며 입을 막았을 테고.

하지만 이 사실을 내가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몰라서 그랬다는 면죄부가 홍기석 요리사에게만이라도 적용되도록 빨리 사실을 알려야 했다.

“지금 곽민수 대사님이 하시는 많은 일들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그 정도인가요?”

“네 홍기석 셰프님도 그땐 마냥 몰랐다고만 하는 게 큰 의미는 없을 거예요. 제가 파나르로 돌아가고 나면 많이 변화가 생길 겁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가 알려 준 내용 머리에 잘 새기시고 잘 헤쳐 나가길 바라겠습니다.”

노골적으로 고발이니 뭐니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사례뿐만 아니라 진짜 실력을 가진 젊은 요리사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빨리 매뉴얼을 완성시켜야겠다.

비슷한 일들로 어려움을 겪을 후배(?)들을 위해 어깨가 무거워졌다.

* * *

파나르 대사관 관저.

김용수 대사는 내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일주일 동안의 시간이 일 년처럼 느껴졌다는 김용수 대사.

“장 셰프 너무 고생 많았어요.”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장 셰프 없던 일주일이 어찌나 길던지.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짐작이 안 가네요.”

“괜찮았습니다. 생각보다 재밌었어요.”

“재미요?”

재밌었다는 말에 김용수 대사의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답변이었을 터.

이른 아침이었지만 파라과이에서 겨우 적응한 시차 덕분에 내 눈은 초롱초롱했다. 덕분에 가장 맑은 머리로 파라과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할 수 있었다.

“역시 곽민수 대사는 악명대로 아주 독특하더라구요.”

“그래요? 뭘 어떻게 힘들게 하던가요?”

만나자마자 피곤한 몸으로 꼴랑 인사만 하러 간 일, 휴가임에도 지각을 했다며 가스라이팅을 한 일 등등 날 괴롭혔던 일들을 속속들이 말해 주었다.

“이런 개… 나쁜 자식. 우리 귀한 직원을 그렇게 대하다니.”

차마 심한 욕은 하지 못하고 애써 화를 억누르는 김용수 대사였다.

“내가 우리 장 셰프 복수라도 해 줘야 하는데. 어휴 참. 본부에서도 아니꼬워도 어쩔 수 없으니 한 번만 참아 달라고 하고.”

답답해하는 김용수 대사에게 오아시스 같은 쾌감을 선사할 차례였다. 파라과이에서 모아 온 이 증거 자료면 곽민수 대사를 파면시키기에 충분했다.

“흥분을 좀 가라앉히세요 대사님.”

“내가 가라앉히게 생겼어요?”

“하하 그럴 줄 알고 제가 준비해 온 게 있습니다.”

“준비요?”

나는 파라과이에서 수집한 증거들을 김용수 대사의 앞에 펼쳐 놓았다.

근무 시간에 골프복을 입고 있는 곽민수 대사의 모습과 지하 창고에 가득 차 있는 술과 식재료들.

그리고 사적으로 사용 중인 공공 물품 등까지.

한참 동안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김용수 대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예상했던 대로네요. 3년 동안 뽑아 먹을 건 전부 다 뽑아 먹겠다는 의지가 사진에서도 느껴지네요.”

“그렇죠? 이번 만찬도 공식적으론 법인장들과 한인회 회장의 만남일지 몰라도 그냥 술판을 벌인 것뿐입니다.”

“그렇겠죠. 교민들을 위한 회의 따윈 하지 않았을 거고, 그냥 자기 맘에 맞는 한국 사람들 모아서 거하게 술 한잔하겠다는 거죠. 안 봐도 훤합니다.”

김용수 대사 역시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증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더욱 처참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 봤자 이런 사례가 한 번이라도 밖에 알려지면 밑 빠진 독에 물 부은 격이 되겠네요.”

김용수 대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인생을 바친 직장을 누군가가 망치려 한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할 터.

이제 내가 모아 온 증거를 정리해서 감사팀에 고발을 할 차례였다.

2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거기까지 간다고 나선 이유가 이거였으니까.

외부에서 알려지는 것보단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정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나았다.

“감사팀에 연락해서 이 증거들을 보내시죠. 제가 하는 것보단 대사님이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그 과정에서 조금의 상처가 나는 건 불가피하겠지만 대의를 위해선 지금 뿌리를 뽑는 편이 낫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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