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최선을 다한 만찬
만찬 당일.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인 파라과이 관저의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곽민수 대사는 오후에 점심을 먹으러 관저에 왔다가 그 길로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뭐 오늘 만찬이 공식적인 행사이니 이 정도 일탈은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임한 지 겨우 2달 만에 이렇게 자기 맘대로 근무 시간을 조절한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행동할지 훤히 보였다.
“자 들어갑시다.”
잠시 후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검은 차 몇 대가 들어오더니 마당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오늘 초대될 손님들은 곽민수 대사를 제외하곤 다 함께 있다가 온 것 같은 모양새.
곽민수 대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저 없이 필드 나갔다 오니깐 재밌었습니까 다들?”
“하하 그러니깐 대사님도 오시라니까요.”
“그러고 싶었는데 오전에 꼭 끝내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에이.”
대화를 나누는 걸 들어 보니 곽민수 대사를 제외한 손님들은 관저에 오기 전 또 골프장을 다녀온 걸로 보였다. 복장도 편안해 보였고, 이미 다 같이 사우나라도 다녀온 차림새였다.
“그래서 오늘 누가 꼴등 했습니까?”
“휴우 오늘은 접니다.”
누가 꼴등이었냐는 물음에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곽민수 대사에게 종이 가방 하나를 건넸다.
“이거 17년산 아니고 21년산입니다 21년.”
“와악! 오늘 법인장님 돈 좀 쓰셨네요.”
“몇 푼 벌어 보려다가 다 털렸습니다. 이 매정한 사람들.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도 사우나는 우리가 냈잖아요.”
예상대로 내기 골프를 마치고 사우나까지 다녀오는 길이었다. 작정하고 하루 종일 일정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아 곽 대사님. 사우나는 이제부터 M호텔로 가시죠. 훨씬 좋더라구요.”
“그래요? 근데 뭐 땀 흘릴 일이 있어야 사우나도 가죠. 일단 들어갑시다. 비싼 술이라도 마시게. 약 올라서 안 되겠네요.”
“좋습니다. 들어가서 맛난 것 좀 먹어 봅시다.”
다들 이미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들떠 있었다. 잔뜩 신이 난 채로 관저로 몰려 들어와 식탁에 앉았다.
“오늘 음식을 준비한 요리사가 외교부에서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내가 오늘 만찬을 위해서 특별한 곳에서 초청했습니다.”
“아주 기대가 됩니다. 하하하.”
일단 중요한 만찬이란 말은 확실히 거짓이었다. 본인들한테는 중요할지 몰라도 한국인들끼리 먹고 마시기 위해 모인 자리.
이걸 위해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게 억울했지만 일단은 꾹 참았다.
곽민수 대사의 사전 요청대로 술안주로 적합한 메뉴들 중 첫 번째 음식을 가지고 나갔다.
“첫 번째 음식은 잣죽입니다.”
“잣죽? 뭐야 첫 번째부터 김새게.”
어디서나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잣죽이 나오자 모두 실망한 티를 숨기지 않았다.
쉬워 보여도 이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요리인데, 새끼손톱보다 작은 잣을 일일이 손질해서 만든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었다. 뭣도 모르면서 실망하기는.
“실망스럽겠지만 이건 꼭 드셔야 하는 코스입니다.”
“대단한 요리사라고 하길래 엄청 기대했더니 첫 요리부터 실망인데요?”
곽민수 대사는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면박을 줬지만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만찬만큼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홍기석 요리사가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최대한 사적인 감정은 숨기려 노력했다. 그렇기에 이 잣죽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음식이었다.
“오늘 대사님께서 술을 많이 드실 것 같아서 일부러 준비해 봤습니다. 멥쌀을 곱게 갈아 하얀 잣물을 섞여서 끓여 낸 이 잣죽은 위를 보호하고, 많은 술이 들어가도 무리가 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곽민수 대사를 김용수 대사처럼 생각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물론 김용수 대사는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지 않지만 오늘 같은 상황이 온다면 난 첫 번째 요리로 잣죽을 준비했을 거다.
본의 아니게 과음을 하더라도 다음 날 속이 덜 상하도록.
“오호 그런 의미였군요. 그건 또 몰랐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럼 다음 메뉴부터 본격적으로 기대해도 되는 거죠?”
“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잣죽 뒤로 이어지는 그다음 메뉴도 자신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코스가 시작하기도 전에 각종 술의 병뚜껑이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음 요리는 참치 육회를 준비해 봤습니다.”
“참치 육회? 소고기가 아니라?”
“네 냉동 참치로 만든 두 가지 맛의 육회입니다.”
파라과이엔 바다가 없어 냉동으로 된 해산물밖에 구할 수 없다.
그중에서 술안주로 활용할 만한 게 냉동 참치였다.
그리 고급 부위는 아니었지만 미지근한 물에 소금을 살짝 넣어 살얼음이 씹힐 정도로 참치를 해동해 사용하면 꽤 먹을 만한 식감이 살아난다.
“거기에 간장, 설탕, 마늘, 파, 참기름으로 양념을 한 육회와 과일을 갈아 넣어서 숙성한 초고추장으로 버무린 두 가지 육회를 준비해 봤습니다.”
음식을 설명하는 도중에 여기저기서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상태가 조금 나빠진 고기를 육회로 먹을 때 양념 맛을 강하게 해서 만들긴 하지만 내가 만든 특제 소스는 신선한 육회에 비해서도 꿀리지 않았다.
“이야 참치로 육회라니. 파라과이에 있으면서 신선한 회가 당길 때가 많은데 이렇게라도 먹으니 좋네요.”
“키야 이건 21년산이고 뭐고 그냥 소주가 정답이네.”
“술이 술술 들어가는구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요놈 참 별미네 별미야.”
잣죽에서 실망한 사람들의 태도는 금세 돌변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홍기석 요리사는 그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저 같았으면 잣죽을 내고 나서 저런 반응이면 기가 죽어서 다음 요리는 제대로 설명도 못 했을 거예요.”
“자기 요리에 자신을 가지면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저는 제 요리에 자신이 없어서….”
“곧 생기게 제가 도와줄게요.”
홍기석 요리사를 격려하며 다음 요리를 가지고 나갔다. 이번 음식도 술꾼이라면 아주 반가워할 요리였다.
“다음 요리는 저와 홍기석 요리사가 정말 고생해서 만든 음식입니다.”
“우리 요리사도 같이 도왔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주 재능이 많더라구요. 금방 늘 겁니다.”
“반가운 소리네요.”
쑥스러워하는 홍기석 요리사는 다음 음식을 직접 식탁 위로 올렸다.
“새벽부터 직접 삶은 족발로 만든 냉채족발입니다.”
“우와 족발? 게다가 직접 삶았다고?”
파라과이 역시 파나르와 같이 족발은 아주 싼값에 구할 수 있었다.
소주와 생강, 월계수 잎 등을 잔뜩 넣어서 잡내를 없애고 4시간 넘게 삶아서 만든 수제 족발이었다.
“여기 한식당들은 번거롭다고 절대 안 만들어 주는 족발을 여기서 먹게 되네.”
“게다가 맛도 장난 아닌데?”
윤기 나는 갈색의 족발의 껍질이 어찌나 쫄깃하지 여기저기서 쩝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족발은 너무 오래 삶아도 식감이 줄어들 수 있다. 살점은 적당히 양념이 배어서 부드럽고, 껍질은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도록 시간을 맞춰 삶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종물이라 불리는 족발 양념이었다.
“이 족발 이거 돈 주고 먹으라고 해도 먹겠는데요? 관저에 올 때마다 사 먹게 해 주면 안 됩니까?”
“장덕수 요리사 다시 돌아가면 못 먹을 텐데….”
그럴 줄 알고 오늘 만든 족발의 종물을 남겨 두고 갈 생각이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 깊은 맛은 없겠지만 홍기석 요리사의 경험이 쌓이듯이 종물의 깊이도 깊어질 것이다.
“제가 잘 알려 주고 갈 테니 홍기석 요리사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됩니다.”
“우리 요리사도 이걸 만들 수 있다구요?”
“네 몇 번 연습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못 미덥다는 눈빛으로 홍기석 요리사를 바라봤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의 말대로 내가 홍기석 셰프를 제대로 가르쳐 주길 바란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거 한 병 가지고는 턱도 없겠는데? 한 병 더 사라고 할 거 그랬나 봐요.”
“아이고 골프 한 번에 얼마나 쓰라고요? 이제부터 그냥 소주로 마십시다. 안주들이 딱 소주 안주네.”
“그럽시다. 위스키고 와인이고 다 집어치우고 소주나 진탕 마십시다.”
없던 격식을 차려 보려다가 이내 포기한 사람들은 소주로 노선을 바꿨다.
소주는 언제부터 준비되어 있는진 몰라도 지하 창고에 박스째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메인 요리는 제가 개발한 특별 레시피로 만든 요리입니다. 아직 파나르 만찬 때도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건데 여기서 처음 공개하는 겁니다.”
“오오오오오 최초 공개?”
“최고의 요리사가 최초로 공개하는 요리라니. 벌써부터 군침이 도네.”
진짜로 이번 음식은 최초로 공개하는 레시피였다.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완성해 놨었는데 아직 써먹질 못하고 있던 레시피였다.
내가 이 수모를 당하고도 여기서 레시피를 공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코스마다 소주 1병씩 드실 수 있도록 음식을 준비해 봤습니다.”
“그래서 이 음식의 이름은 뭡니까?”
“이건 그냥 스테이크 아닌가?”
메인 요리로 내가 선보인 음식은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보통 스테이크와는 달랐다. 한식으로 주로 구성하는 관저 만찬에 어울리는 퓨전식 스테이크.
“소고기 안심을 갈비 양념으로 6시간 동안 수비드 한 갈비찜 스테이크입니다.”
“수… 뭐요?”
“수비대?”
홍기석 요리사 이 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비슷한 반응이었다. 요리사가 아니라면 단어조차도 생소했다.
수비드는 그 당시 한국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던 저온 요리 기법이었는데 원조인 프랑스 요리는 물론이고, 찜이나 조림이 많은 한식에도 적용할 수 있는 메뉴가 많았다.
“수비드라는 저온 조리 기법인데, 손질한 소고기 안심을 갈비 양념에 재워 두고, 그걸 58도 정도의 미지근한 물에 6시간 정도 천천히 익혀 주면 됩니다.”
이번에는 설명을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소리보다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 제쳐 두고 일단 드셔 보시죠. 그러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포크와 나이프를 들이댔다. 하지만 수비드 기법으로 요리한 음식은 나이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식감이 부드러웠다.
겉면을 시어링해서 바삭하게 구워 줬지만 나이프를 갖다만 대도 결을 따라 부드럽게 찢어졌다.
“와아… 이거 뭐야. 진짜 말 그대로 입에서 녹네?”
“그러니까요. 그만큼 부드럽다는 표현이 아니라 진짜 입에서 녹아내리는데?”
“거기다가 이 달짝지근한 양념이 배어 있어서 소스가 따로 필요도 없네.”
설명을 듣고도 뭔 소린가 하던 사람들은 스테이크를 한입 넣자마자 모든 게 이해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수비드인가 수비대인가가 뭔진 몰라도 최고라는 건 알겠네.”
“내 살다 살다 이런 고기 맛은 처음이네.”
“내가 뭐랬습니까? 멀리서 부른 보람이 있지요?”
“우리 주기적으로 관저에서 모임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하.”
곽민수 대사와 손님들은 내가 직접 만든 양갱까지 디저트로 먹고선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준비한 음식은 전부 끝이 났지만 여전히 만찬은 끝나지 않았다.
음식은 없어도 지하 창고에 쌓아 둔 술은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미 고주망태가 되었지만 내일 당장 죽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술을 들이붓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이런 광경이 펼쳐지길 바라긴 했지만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들을 보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홍기석 요리사님. 잠시만 나오시겠어요?”
“지금요?”
나는 또다시 가슴팍에 카메라를 실행한 스마트폰을 넣어 두고 손님들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