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38화 (139/202)
  • 138. 우등생

    여기저기 노랗게 붙어 있는 비품 관리 스티커.

    얼핏 둘러봐도 고가의 가전에는 많은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다. 그 말인즉 공금으로 이 가전과 가구들을 구매했다는 의미.

    이것들이 1층과 손님방에 있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금 과하게 썼다고 경고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게 곽민수 대사 부부의 사적인 공간에 있으면 큰 문제가 된다.

    “그럼 저는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과일 잘 먹을게요.”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 시선을 전혀 의심할 틈이 없었다. 과일을 사진 찍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모든 걸 확인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더 넓고 고급스러운 관저로 옮기지 못해 뿔이 났을 것이다. 그걸 고급 가전과 가구를 구매하는 걸로 해소했을 것이고.

    이전에는 용케도 3년이나 숨겼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홍기석 요리사님, 그럼 간단한 것부터 배워 볼까요?”

    “네 좋습니다.”

    “이전에 만찬 했을 땐 어떤 식으로 했었어요?”

    “음 그냥 밥이랑 찌개랑 반찬 몇 가지 놓는 식으로 했었어요.”

    “코스가 아니라요?”

    “코스여야 하나요? 한식인데?”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만찬들이 중요한 대화를 겸한 거라 코스식으로 내주면 좋습니다.”

    홍기석 요리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홍기석 요리사의 성정은 곽민수 대사완 달랐다. 뭔가를 말하면 하기 싫다거나 어렵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귀담아들으려 노력했다.

    아마 곽민수 대사가 이용하기 위해 이 홍기석 요리사를 채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다가 요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는 사람.

    해외 근무라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으니 지원해 보라 했을 것이다. 최소한의 자격만을 갖춰서 딱 3년만 놀며 돈을 벌어 가라고.

    “이 대사관 요리사가 좀 어렵긴 해도 장덕수 셰프님처럼 실력 있는 사람들이 하기엔 재밌을 거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온전히 나 혼자 만든 나만의 음식을 사람들이 먹잖아요. 게다가 손님들은 대부분 평소엔 보기도 힘든 국회의원이나 유명인들이고.”

    얕게나마 요리사로서 재미를 느끼고 있는 홍기석 요리사였다.

    곽민수 대사의 의도와는 달리 홍기석 요리사는 3년 동안 단순히 시간만 때우러 온 건 아니었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오긴 했는데 기왕 왔으니 좀 제대로 해 보고 싶어요. 3년이면 짧은 시간도 아닌데 뭔가 이루면 좋잖아요.”

    “당연하죠.”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도 폼나고요.”

    “하하 맞죠. 그거 은근히 뿌듯하죠.”

    나도 이 일을 하기 전까지 애국심이란 걸 딱히 느껴 보지 못했었다. 오히려 나라를 욕하기 바빴지.

    하지만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을 한 번이라도 알게 되면 그 맛을 또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제가 있는 동안 많이 알려 드릴게요. 한번 제대로 해 보세요. 그리고 다음에는 곽민수 대사님이랑 떨어져서 일해 보시면 되죠.”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만 잘 되겠어요? 일단은 열심히 해 볼 거지만 막 십 년씩 요리사로 일했던 분들이랑 어떻게 싸움이 되겠어요.”

    “또 모르죠. 좋은 인맥이 생길지도.”

    실력도 중요하지만 요리계에선 인맥 역시 중요했다. 하고자 하는 맘만 있다면 뭐든 길이 안 보일까.

    그래도 홍기석 요리사의 태도가 맘에 들어 다행이었다. 파라과이에서 짜증 나는 기억만 있을 뻔했는데.

    “그래서 낮에 하는 오찬은 보통 5코스, 만찬은 7 또는 9코스까지도 해요. 인원이 좀 적으면 9코스로 해도 좋아요.”

    “와아 혼자서 9가지 음식을 다 만들어요? 대단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홍기석 요리사에게 기본적인 업무를 전부 가르쳤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들이라며 신기해하면서도 꼼꼼하게 메모를 했다.

    “나중에 제가 오늘 말씀드렸던 내용 교육 메뉴얼북 만들어서 보내 드릴 테니 참고하세요.”

    “정말요? 그런 것도 만드세요?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하게 되었네요.”

    “오 저도 열심히 해서 다른 요리사들을 가르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첫날부터 열정적으로 교육을 하니 어느덧 주위가 어둑해졌다. 일찌감치 들어온 대사의 아내는 골프를 치느라 피곤했는지 2층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곽민수 대사가 퇴근 후 관저로 돌아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오 장 셰프. 교육은 잘되고 있나요?”

    “네 홍기석 요리사가 배우려고 하는 태도가 좋아서 금방 늘 것 같습니다.”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나는 일단 쥐고 있는 칼을 최대한 숨겼다.

    이곳에서 아직 1주일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있는 동안 많은 증거를 수집해야 했다. 그러려면 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했다.

    최대한 경계심을 풀게 한 뒤 열심히 칼을 갈고 있었다.

    “이번 주에는 이전에 말했던 중요한 만찬이 있을 테니깐 준비 좀 잘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초대되는 손님들은 어떤 분들이신가요? 파라과이 분들이신가요?”

    아주 중요한 만찬이라면 적어도 외교부 장관 정도 되려나? 나도 파나르에서 첫 만찬이 파나르 외교부 장관이었다.

    “아니요. 전부 한국분들입니다.”

    “전부요?”

    “네 뭐 문제 있나요?”

    “아닙니다.”

    본인이 그걸 먼저 묻는 거 보니 썩 당당하진 않은 모양. 중요한 만찬은 핑계고 내 음식을 한번 먹어 보겠다고 여기까지 부른 게 확실했다.

    “이곳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의 법인장들이랑 한인회 회장님 등등이 모일 테니 한국 음식으로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최고의 음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허허 외교부 최고의 요리사가 직접 그렇게 말하니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내 대답이 흡족했는지 경계하던 태도가 조금은 수그러든 듯 보였다.

    “교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이니 분명 중요한 만찬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대사관이랑 한인회의 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중요합니다.”

    제 발이 저렸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한 번 더 강조를 했다. 나 역시 그 말에 적극 동조하니 그제야 완전히 경계를 푼 것 같았다.

    “나이가 어려도 역시 베테랑은 다르네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술을 좀 할 것 같으니깐 안줏거리가 될 만한 음식으로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 빙빙 돌아온 곽민수 대사였다. 차라리 잘되었다. 저번에 교수들을 술안주로 홀렸던 것처럼 진탕 취하게 만들어 증거를 수집해야겠다.

    * * *

    파라과이 대사관 관저.

    일상식을 하며 홍기석 요리사에게 요리의 기본부터 각종 팁을 알려 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홍기석 요리사의 재능은 꽤 나쁘지 않았다. 스스로도 따로 공부를 하며 내가 알려 주는 걸 전부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동료 한 명 없던 이곳에서 비슷한 또래의 홍기석 요리사와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럼 내일은 재료 사러 갈 거죠?”

    “네 예전엔 어디서 재료를 샀어요?”

    “저는 당연히 마트에서 봤어요. 요리사님은 어디서 주로 사시는데요?”

    마트도 물론 좋지만 세계 어디를 가도 새벽 시장보다 싸고 신선한 제품을 살 수 있는 마트는 없었다. 홍기석 요리사에게 새벽 시장의 묘미를 알려 주고 싶었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깐 빨리 쉬세요.”

    “휴우 제대로 요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머리도 이렇게 써야 하는지 몰랐어요. 몸이 피곤한 건 물론이고.”

    “그렇긴 해도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오면 피로가 싹 풀릴걸요?”

    “맞아요. 그건 이미 여러 번 느꼈어요. 요리사님이 알려 주신 대로 음식을 만들었더니 대사님이 칭찬해 주셨어요.”

    “그래요?”

    “네 친척이라 그런지 딱히 잔소리를 한 건 아니지만 칭찬도 한번 해 준 적 없으시거든요.”

    곽민수 대사는 홍기석 요리사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자신의 행동을 모른 채 넘어가 줄 요리사가 필요했을 뿐.

    뭐가 횡령이고 비리인지도 모르는 홍기석 요리사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만찬 제대로 치러서 칭찬 한번 받아 보시죠. 음식이 맛있으면 종종 팁도 받을 수 있어요.”

    “정말요? 그런 게 있을 줄 몰랐네.”

    홍기석 요리사는 음식으로 누굴 만족시켜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르겠지. 관저에 초대된 해외 귀빈들은 음식에 대한 감사함을 따로 전하는 게 익숙했다.

    * * *

    다음 날 파라과이 중앙 시장.

    나와 홍기석 요리사는 전날 사무실에서 두툼한 만찬 비용을 받아 시장으로 향했다. 인원수에 비해 넉넉한 금액이었지만 전부 다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와아 파라과이에 이렇게 큰 시장이 있는지 몰랐어요.”

    “요리사라면 어디를 가도 시장부터 알아 두는 게 좋아요. 물건도 훨씬 좋고 값도 저렴할 테니까요.”

    “정말이네요. 마트도 싸다 생각했는데 시장은 뭐 말도 안 되네요.”

    바다가 없는 파라과이의 시장에는 다양한 해산물은 없었지만 값싸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가득했다. 또 고기를 많이 먹는 남미 국가의 특성상 질 좋은 고기가 넘쳐 났다.

    “와아 소고기가 한국의 닭보다 싸네요.”

    “남미의 국가들은 보통 고깃값이 싸요. 전 세계에서 고기를 가장 많이 먹거든요.”

    “요리사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제가 아니라 요리사님이 파라과이 요리사 같은데요.”

    “하하 저번에 본부에서 요리 대회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남미 요리사들을 좀 만났어요. 그때 얘기를 많이 들었죠.”

    “오 그런 대회가 있었군요. 요리사님은 몇 등 하셨어요?”

    “저요? 저는 이… 일등이요.”

    “와아 대박. 대단한 줄 알았는데 더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큰 소리로 놀라는 홍기석 요리사 덕에 시장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괜히 쑥스러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빨리 재료나 사러 가시죠.”

    “네! 좋은 재료를 고르는 법도 알려 주십시오 스승님.”

    “스승님이요? 하하.”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역시 시장 구경은 하루 종일 해도 부족했다.

    맛있는 과일이나 고기를 고르는 법, 채소들을 고르는 법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홍기석 요리사는 새벽에 일어나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메모장은 절대 손에서 놓지 않고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사다 보니깐 너무 많이 샀네요.”

    “이렇게 많이 샀는데도 돈이 남았어요.”

    “이걸 다 쓰면 안 돼요. 남겨야 해요.”

    “왜요? 이번 만찬 때 다 써도 된다고 했는데.”

    오늘 대사관에서 준 돈은 만찬을 한 번 치르기엔 과한 금액이었다. 말로는 다 써도 된다고 하지만 나중에 감사가 나오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말이 달라진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요리사가 다 독박 쓸 수 있어요.”

    “네? 왜요? 쓰라고 줬잖아요.”

    “잘 기억해 두세요. 만찬을 치를 때는 보통 1인당 50달러 정도의 금액만 사용해서 재료를 구매해야 해요. 조금 넘어도 되지만 너무 과하게 초과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특히 재료를 직접 구매하는 요리사들한테는요.”

    “아… 이건 생각도 못 했어요. 감사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면 이런 것도 그냥 넘어가겠지만 과도한 공금 사용은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엔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그땐 가장 힘이 약하고 비정규직인 요리사가 독박을 쓸 가능성이 높다. 홍기석 요리사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재료는 거의 다 산 것 같으니 돌아가 볼까요?”

    “근데 우리 이번 만찬 메뉴는 뭔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