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파라과이 대사관
“장 셰프님은 저랑 대사님 관계에 대해서 모르시죠?”
“네? 공관장과 요리사 관계가 아닌가요?”
아직 이름 말곤 거의 아는 게 없는 사이였다.
홍기석 요리사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지만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의 볼륨을 줄이며 말했다.
“사실 곽민수 대사님이랑 저랑 먼 친척 관계입니다. 저희 외숙모의 오빠 되시는 분이 대사님이세요.”
“엥? 친척이라고요? 외삼촌의 매형?”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어쩌다 보니라니.
왜 제대로 면접도 보지 않고 이 요리사를 뽑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혈육을 채용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나 봐요. 덕분에 별 스펙도 없는 제가 뽑히긴 했지만요.”
“그럼 요리사로 일한 경험이 아예 없는 건가요? 취미 생활로도?”
“네. 대신 자격증은 하나 있어요. 이력서에 적어도 조리사 자격증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해서 오기 전에 부랴부랴 땄죠.”
너무나도 솔직하게 말해 주는 홍기석 요리사.
순수한 건지 아니면 겁이 없는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근데 이런 거 저한테 말해 주셔도 돼요?”
“뭐 비밀도 아니고 이력서에 다 썼는데요. 본부에서도 다 알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길래….”
“그냥 습관저럼… 그리고 대사님도 특별히 숨길 필욘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본인들도 100% 당당하진 못한 거겠지.
보나 마나 곽민수 대사가 우기고 고집을 부렸을 거다. 나를 이곳에 부를 때처럼.
친척을 채용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고 홍기석 요리사는 경험이 없어도 자격증이라는 스펙 한 줄이 있었으니까.
우기기엔 충분한 상황이었다.
설령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한 번 하고 말 공관장이라 거칠 게 없었다. 곽민수 대사에겐 성과나 인사 평가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협상을 잘한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였나.
“그럼 저는 왜 부르신 거예요? 친척이면 좀 부족해도 배워 가면서 하면 될 텐데요.”
시스템이 아주 잘되어 있다곤 할 수 없어도 공관장 재량으로 온라인 수업도 들을 수 있게 해 주고, 책도 구입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었다. 친척이라면 좀 느려도 그렇게 배우면서 했으면 될 텐데.
“대사님이나 저나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다른 공관에서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요. 아시다시피 저희 대사님도 물어볼 곳이 없으셔서요.”
“아….”
동기며 아는 선후배가 없을 테니 물어볼 데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저 지랄맞은 성격이라면 적이나 더 만들지 않았으면 다행.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만찬이 잡히면 하긴 해야 하잖아요. 기왕이면 제일 실력 좋은 요리사한테 배워 보고 싶어서요. 장덕수 셰프님이 외교부에서 제일 유명하시다면서요.”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저를…?”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홍기석 요리사는 눈치가 보였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얼마 후에 중요한 만찬이 잡혔대요. 지금까진 아쉬운 대로 했지만 이번 거는 좀 제대로 해야 한다더라구요.”
“그럼 그냥 호텔이나 한식당에서 하면 되죠.”
“중요한 손님이라 꼭 관저에서 해야 한다던데요.”
뭐 얼마나 중요한 손님이길래 그렇게 고집을 부리나. 일단 상황 파악은 이쯤 끝내 두고 할 일을 해야겠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여긴 뉴스 속의 그곳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면 일단 관저 좀 돌아볼까요.”
“네 한번 둘러보세요. 주방이랑 지하실에 창고가 하나 있는데 그것 말곤 요리사가 신경 쓸 곳은 없어요.”
“근데 이 관저는 곽민수 대사님이 고르신 건가요?”
“아니요. 여기는 아예 대사관에서 구매를 해서 쭉 사용하는 곳인 거로 알고 있어요. 바꿀 수 없대요.”
“아 그랬군요.”
역시나 그럼 그렇지.
주위만 둘러봐도 훨씬 크고 좋은 저택들이 널렸는데 곽민수 대사가 이곳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이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나 싶었지만 그 뒤엔 또 다른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엔 사모님이 관저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바꿔 달라고 난리를 쳤었는데 결국 거부당했어요. 지금도 관저 이상하다고 자주 말씀하세요.”
“사모님이요? 저희 대사관엔 사모님이 안 계셔서 몰랐네요.”
그래 부부는 끼리끼리 만나는 거겠지.
남편의 힘을 등에 업고 얼마나 난리를 쳤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럼 요리사님. 지하 창고 좀 보여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홍기석 요리사는 당당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뭔가 자랑할 장난감이 많은 방으로 친구를 데리고 가는 같은 걸음걸이였다.
“일단 여기는 술만 따로 보관하는 술창고예요.”
“와아… 이게 도대체 몇 병이야.”
지하의 서늘한 방 하나엔 온갖 종류의 술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은 물론이고 위스키나 코냑, 게다가 소주까지 박스째로 보관되어 있었다.
“아니 무슨 술이 벌써 이렇게 많이 쌓였어요?”
“쌓이다니요?”
수많은 오, 만찬을 하다 보면 준비한 술이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한다. 남는 술들은 창고에 보관해 뒀다가 다시 쓰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선물로 받은 술들을 같이 보관하다 보면 여분의 술이 쌓이기도 한다.
근데 부임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공관장이 벌써 이렇게 술을 많이 구비해 두다니. 이건 딱 봐도 남은 게 아니라 새 술이었다.
“웬만한 술집보다 양이 많네요.”
“술은 묵혀 둬야 한다면서 오시자마자 사 들이시던데요.”
“굳이 직접 묵혀 둘 필요는 없는데….”
술 창고를 보자 확신이 섰다. 여기가 그리고 곽민수 대사가 그 뉴스의 주인공이 확실했다. 술 창고가 이 정도면 다른 것들은 보나마나였다.
곧바로 냉장고들을 뒤졌다. 냉장고 역시 과도하게 개수가 많았다. 그 안에 차 있는 고기나 생선들은 말할 것도 없이 마치 마트처럼 가득 차 있었다.
“여태까지 만찬 몇 번이나 하셨어요?”
“관저에서요? 한 3번 정도?”
“손님 숫자는요?”
“보통 서너 명 왔던 것 같아요.”
두 달 동안 겨우 3번의 만찬에 초대된 손님은 기껏해야 서너 명. 그런데도 가득 차 있는 술 창고와 냉장고.
이건 계산기를 두드려 볼 것도 없이 횡령이었다.
“이 식재료들 대사님 식사 때 쓰시죠?”
“당연하죠.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아 맞아요. 다른 곳도 다 그렇게 해요.”
잠시 불안한 눈빛을 비치더니 내 대답을 듣고 안심하는 홍기석 요리사였다.
경험이 없으니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일반 레스토랑에서도 직원용과 판매용 식재료는 구분해서 구매를 하는데 그런 것도 모르니 내가 하는 말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식사하실 때 술도 드세요?”
“술이요? 술은 음… 거의 손 안 대세요.”
그래도 술까지 손대는 건 본인도 좀 과하다 생각했는지 쭈뼛거렸다. 그런 기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보탰다.
“저희 대사님도 거의 매일 맥주 한 캔씩 꼭 드시거든요.”
“그래요? 다들 그러는구나.”
“뭐 겨우 맥주 한 캔 가지고요.”
“저희 대사님은 두 분이서 와인 한 병씩은 꼭 드세요.”
“아 그렇구나.”
물론 김용수 대사가 마시는 맥주는 사비로 구매해 두고 마시는 것이었다. 여기처럼 공금으로 구매한 게 아니라.
홍기석 요리사는 자신이 증거를 전해 주고 있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주머니 속엔 스마트폰의 녹음 버튼이 눌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여기 술 창고랑 식재료 창고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사진은 왜요?”
“홍기석 요리사님이 너무 정리를 잘해 두셔서요. 저도 돌아가서 참고 좀 하려구요.”
“아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찍으세요.”
칭찬 몇 마디로 경계를 푼 뒤 사진까지 증거로 남겼다.
다른 건 더 찾아봐야겠지만 일단 이것만으로도 곽민수 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전부 설명이 되었다.
단순히 성격만 개차반이 아니었다.
“어? 사모님 오셨다.”
“사모님이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자 곽민수 대사의 아내가 관저로 돌아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골프장을 다녀온 복장.
관저로 들어오며 아주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장덕수 셰프. 그땐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반가워요.”
단번에 가식이 느껴지는 말투.
그래도 대놓고 무시하는 것보다 나았다.
“네.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우리 홍 셰프 교육 좀 잘 부탁해요. 홍 셰프가 아직 부족해서 우리 곽 대사님이 중요한 만찬이 많이 밀려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 2층으로 과일 좀 올려 줘요.”
“네? 제가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나는 이런 걸 하러 온 게 아닌데 날 가정부라 생각하는 건가. 불쾌했지만 번뜩 든 생각이 있었다.
파라과이 관저는 총 3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주방과 손님 접대 공간, 2층은 대사 내외의 생활 공간, 그리고 3층은 운동 공간.
대저택인 관저의 2층은 요리사나 직원들은 평소엔 올라가기 힘들었다.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공적인 공간에도 이렇게 허점을 보였는데 사적인 공간은 아마도 노다지일 것이다.
“홍기석 요리사님 2층 가 보셨어요?”
“이렇게 가끔 과일 갖다 달라 할 때 잠시요. 웬만하면 못 오게 하시네요.”
“오늘은 제가 갖다 드릴게요.”
나는 냉장고에 있는 과일들을 꺼내 온갖 화려한 기술로 손질했다. 카빙 기술까지 가미해서 아주 볼만한 과일 접시를 만들었다.
“와아… 과일만으로도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
“처음이니깐 신경 좀 썼습니다.”
감탄하는 홍기석 요리사를 두고 오른쪽 가슴 편의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영상 촬영 버튼을 누른 채.
저벅저벅.
과일의 모양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다다르고 직접 거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두고 내려가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역시 2층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했다. 뭔가 구린 곳이 있는 게 분명했다. 좀만 더 살펴보고 싶은데.
아쉽지만 일 보 전진을 위해 후퇴를 하려는 찰나 뒤편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머 이게 뭐예요. 장 셰프가 한 거예요?”
“네 조금 신경을 써 봤습니다.”
“과일들이 너무 아름다워요.”
다소 오버스러운 말투와 과한 몸짓.
품격과 우아함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과일을 설명한다는 핑계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흔한 과일만으로도 충분히 이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바나나는 다른 모양으로도 활용이 가능하거든요.”
그 자리에서 바로 모양을 바꿔 주면서 시선을 끌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런 건 찍어 뒀다가 나중에 써먹어야겠네요. 홍 셰프에게 꼭 알려 주고 가요.”
“물론이죠.”
“잠시만 옆으로 나와 볼래요? 사진 좀 찍게.”
과일 접시에 시선을 빼앗긴 그녀를 두고 나의 상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둘만 사는 곳에 비해 커다란 티브이와 스피커.
한눈에 봐도 고가의 소파.
식탁 위의 각종 컵들에도 금장이 둘려 있었다.
2층은 과도하게 화려하고 부유했다.
그리고 그런 가구와 가전에는 익숙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