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정체
하….
비행기에서 내리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긴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보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웬만한 걸로 지치지 않았는데 바로 누워서 쉬고 싶단 생각이 절실했다.
[장덕수 요리사님]
출국장을 빠져나가자 익숙한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흥분한 김용수 대사의 말론 워낙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 공항에 마중도 안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었는데 다행히도 마중은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장덕수 요리사님. 홍기석입니다.”
“반갑습니다. 장덕수입니다.”
마중을 나온 사람은 파라과이 대사관 요리사였다. 악명(?)과는 달리 요리사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비행시간이 너무 길어서 힘드셨죠?”
“네 장난 아니네요. 저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 본 적은 처음이라.”
“전 아직도 시차 적응 중입니다. 하하.”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반은 진심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바뀐 시차는 겨우 며칠 가지고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도 몸이 무겁네요. 그래서 말인데 호텔로 먼저 갔으면 합니다. 좀 쉬고 싶어서요.”
“음….”
호텔로 가서 쌓인 여독을 풀고 저녁이나 내일쯤 관저를 둘러보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면 난 부탁을 받고 온 사람이니 그 정도쯤은 요구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오늘부터 당장 교육을 할 것 아니었으니.
하지만 기석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사님께서 장덕수 요리사님 도착하면 먼저 인사부터 하러 오라고 해서요. 바로 대사님부터 잠시 뵈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 지금 바로요?”
“금방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한 나라의 공관장인데 그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김용수 대사가 동행을 했다면 또 모를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탔다.
빽빽한 빌딩이 가득 차 있는 도심을 가로지르자 금세 초록색의 평원이 나타났다. 피곤함도 잠시 잊고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낯선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근데 대사관이 이렇게 외곽에 있습니까?”
보통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은 그 나라의 수도나 가장 큰 도시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교민들이 찾기 쉽고 다양한 인프라를 활용하기 위해서.
근데 대사님을 만나러 간다는 길이 점점 도심 밖을 향하고 있었다.
“대사님은 지금 외부 일정 중이십니다.”
“아아 그랬구나. 바쁘시면 나중에 보면 되는데.”
오전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곽민수 대사 역시 우리 대사님처럼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란 걸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지났으니 열심히 인맥을 쌓을 시간이지. 적어도 할 일은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요리사님.”
“여기요? 여기 골프장 아닙니까? 여기서 일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골프장이었다.
외부 일정이란 게 골프장에서 하는 거였나. 뭐 골프장 안에도 꽤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고, 조용히 만나기 좋은 곳이라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공기가 좋으니 저도 좋네요.”
“그렇죠? 외곽에 나오면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홍기석 요리사는 대사를 기다리는 이런 상황이 벌써 익숙한 것 같았다.
“홍기석 요리사님.”
“네.”
“요리사님은 언제 이곳에 오셨어요?”
“저요? 이제 두 달 조금 지났습니다. 대사님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왔죠.”
두 달이면 아직 적응 중이겠구나.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일까지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직 홍기석 요리사의 진짜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요리는 언제부터 하셨어요?”
“저요? 요리사로 일해 본 적은 없습니다.”
“네?”
“요리사로 일해 본 건 이곳에서가 처음입니다.”
“정말요? 그럼 아예 주방 일을 처음 해 보시는 거예요?”
“그래도 기본적인 거는 할 줄 압니다.”
아무리 편견 없이 뽑으라 했어도 아예 경력이 없는 사람을 뽑을 수가 있나? 그래 놓고 실력이 부족하다고 불평을 해? 본인들이 완벽히 자초한 일이었구나.
어이가 없어 더 질문을 하려는 찰나 한 무리가 골프장을 빠져나왔다.
“아이고 회장님. 오늘은 제가 이겼으니 관저에 오실 땐 비싼 와인 준비해 놓겠습니다.”
“여기에 온 두 달 동안 제 돈을 그렇게 많이 뺏어 가시고 겨우 와인이요?”
“하하하. 아주 실력 좋은 요리사도 불러 놨으니 그걸로 퉁치시죠.”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지 먹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러시죠.”
한눈에 봐도 저 호탕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곽민수 대사.
그리고 회장이라 불리는 사람이 아마도 한인회 회장일 터.
그 옆엔 곽민수 대사의 아내와 한인회 회장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 두 명도 함께였다.
멀리서 봐도 김용수 대사에게 했을 무례한 행동이 상상되는 가벼운 언행이었다.
“대사님, 장덕수 요리사 도착했습니다.”
“그래?”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곽민수 대사는 호탕한 얼굴로 악수를 건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기 전에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반가워요 장덕수 요리사. 곽민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장덕수입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어서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관저로 오면 돼요. 자세한 건 홍기석 요리사가 알려 줄 겁니다.”
“그게 답니까?”
“응?”
“도착하자마자 보자고 하시길래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요.”
악수 한 번 건네고 돌아가서 쉬라는 곽민수 대사.
나야 그러는 편이 좋았지만 뭔가 불쾌했다. 중요하게 전달해야 할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파라과이에 왔으니 제일 먼저 대사한테 인사하러 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파나르에선 안 그래요?”
“후우 맞습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난 오후에 또 골프 약속이 있어서 후딱 점심 먹고 가 봐야 해요.”
곽민수 대사와 그의 아내는 골프장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한번 시계를 들어 확인했다.
오후 12시 45분.
오전 내내 골프를 쳤다는 건 근무 시간에 골프를 쳤다는 말인데.
아무리 외부 인사와의 만남이라고 해도 근무 시간에 골프를 치는 건 업무 태만이었다.
“홍기석 요리사님. 대사님이랑 저 한인회 회장님이랑 오늘 처음 만나신 건가요?”
“저분이 한인회 회장님이신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느낌이죠.”
한국인인 데다가 회장이라고 불릴 사람들은 대부분 한인회였다. 업무적으로도 겹칠 일이 많아 몇 개의 공통점만 있으면 공관장과 한인회 회장들은 금세 절친이 된다.
보아하니 곽민수 대사와 파라과이 한인회 회장은 골프와 술로 이어진 것 같은데.
일단 중대한 업무 때문에 골프를 친 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자꾸 눈이 감겨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홍기석 요리사님. 그럼 제가 내일 관저로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오전에 제가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한 뒤 호텔로 들어왔다.
저 홍기석 요리사라는 사람과도 좀 더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진짜로 경력과 실력 모두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경력이 없어도 파키스탄 요리사 승재처럼 제 실력 발휘를 못 하고 있는 건지.
오늘 잠시 겪어 본 곽민수 대사의 성정으로 봤을 때 후자에 가까울 것 같았다.
하아아아암.
뭐가 어떻든 간에 지금은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곳이 뉴스의 그곳이라면 정신을 바싹 차리고 증거를 모아야 했으니.
길게 하품을 한 뒤 초저녁부터 깊게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계십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이 깨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3분.
놀라서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시차 적응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웬만해선 늦잠을 자는 법이 없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숙면을 취해 버렸다.
덕분에 컨디션은 좀 좋아진 것 같았지만.
대충 옷만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요리사님 무슨 일 생기신 줄 알았잖아요.”
“죄송합니다.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봐요. 이런 적은 살면서 처음이라….”
“여튼 준비해서 나오세요. 대사님은 관저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관저에서요? 아직 출근 안 하시구요?”
기석은 양쪽 어깨를 들썩하고 들어 올렸다.
괜히 곽민수 대사가 기다린다는 말에 허겁지겁 준비를 한 뒤 차에 올라탔다.
* * *
파라과이 한국 대사관 관저.
여느 관저들처럼 파라과이 대사관의 관저 역시 규모가 큰 대저택이었다. 하지만 곽민수 대사라면 좀 더 욕심을 부렸을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곤 소박한 편이었다. 혼자 사는 파나르 관저보다도 못한 느낌.
아직까진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대사님 장덕수 요리사 왔습니다.”
“허허 장덕수 요리사. 실망입니다.”
“네? 그게 무슨?”
관저에 들어서자마 실망이라는 곽민수 대사.
아직 실망을 하거나 만족을 할 만큼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요리사가 그래도 됩니까?”
“네? 저는 여기에 특별 휴가를 받아서 온 거라 근무 시간과는 관련이 없습니다만.”
김용수 대사가 날 위해 특별히 얻어 준 휴가였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업무라는 부담이라도 좀 덜어 놓으라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본부를 압박해 얻어 낸 휴가였다.
“그래도 엄연히 요리사 교육이라는 업무 때문에 온 게 아닙니까. 내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 드리겠으니 앞으론 조심해 주세요.”
“네… 뭐 알겠습니다. 어차피 시차만 좀 익숙해지면 그럴 일 없습니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을 하자 곽민수 대사는 그제야 소파에서 일어났다.
“사무실로 갈 테니 차 대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또 겨우 이 말 한마디 하려고 기다린 건가.
앞으론 지각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출근 준비를 하는 곽민수 대사였다. 이미 10시가 훌쩍 넘긴 시간이었는데 본인이야말로 지각 아닌가.
“아 그리고 장덕수 요리사.”
“네.”
“우리 홍기석 셰프는 내가 참 아끼는 사람이니깐 잘 교육시켜 주고 오늘 있었던 일은 나한테 빚 하나 진 겁니다?”
“빚이라뇨?”
“오늘 늦은 거 따로 보고 안 하고 내 선에서 그냥 넘어갈 테니깐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요.”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보고를 해도 아무 타격이 없는데 막무가내로 빚을 졌으니 알고 있으란다.
이게 바로 가스라이팅의 일종인가, 아니면 또 뭔가를 협상하려고 밑밥을 까는 건가.
저렇게 당당하게 말을 하니 내가 휴가를 받은 게 맞나 의심이 되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차에 올라탄 곽민수 대사였다.
“휴우… 근데 홍기석 요리사님. 곽 대사님은 원래 이렇게 늦게 출근하세요?”
“아뇨 평소엔 이 정도로 늦진 않으세요. 보통 9시가 넘으면 출발하세요. 오늘은 장덕수 요리사님 보고 간다고 늦게 가신 거구요.”
“9시가 넘어서요? 9시까지 도착이 아니구요?”
홍기석 요리사는 내 질문에서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다. 원래 다들 그러는 줄 알았다고 한다. 본인도 덕분에 일찍 출근할 필요 없으니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고.
“아무리 공관장이라도 출근 시간은 지켜야지….”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출퇴근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다른 건 보나 마나였다.
차로 15분이면 가는 거리에 사무실이 있는 김용수 대사도 항상 8시가 조금 넘으면 관저를 나섰다.
짧은 시간 마주한 곽민수 대사는 부임한 지 두 달 만에 자기 세상을 만들어 지내고 있는 듯했다.
“근데 홍 셰프님. 곽 대사님이 홍 셰프님을 많이 챙기시나 봐요? 아까 말하는 거 들어 보니.”
김용수 대사의 설명대로라면 홍기석 요리사는 형편없는 실력과 거짓 경력으로 인해 곽민수 대사에게 매일 폭언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둘의 관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원만해 보였다.
홍기석 요리사는 가볍게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