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안하무인 (2)
-공문?
-그래요 공문. 내가 그걸 보고 젊은 요리사 하나를 뽑았는데 이거 뭐 실력이 형편없네요. 제대로 된 만찬 한 번도 못 하고 있어요. 어쩔 겁니까?
교묘하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곽민수 대사의 캐릭터는 역대급이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렇게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계속 자기 요구를 해 대는 곽민수 대사.
-당신이 면접 보고 뽑았을 거 아니요? 근데 그걸 왜 우리 탓이라 하는 겁니까?
-면접이야 우리가 봤지만 젊은 요리사를 뽑으라고 부추긴 건 당신네들이었지. 그 홍보 영상이나 공문이 아니었으면 특급 요리사 주방장 출신들을 뽑았겠지.
호텔 주방장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들인 줄 아나.
한참 전에 보냈던 공문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곽민수 대사였다. 게다가 그 공문과 홍보 영상은 실력 좋은 젊은 요리사들을 적극 채용하라고 ‘권장’했던 거지 강요가 아니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나한테까지 전화를 한 겁니까?
-뭐 이미 뽑은 요리사를 자를 순 없겠죠. 날 믿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준 사람을.
-……?
안타깝지만 그가 허위 경력을 기재한 게 사실이라면 해고를 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아무리 외국까지 와 줬다 한들 애초에 거짓말을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으니까.
그런데 해고는 또 하지 않겠다는 곽민수 대사. 어쩌란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듣자 하니 파나르 요리사 실력이 아주 출중하다던데.
-그래서 뭐요? 우리 요리사 실력이 좋은 거랑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빙빙 돌리지 말고 말 좀 제대로 하세요.
계속 말장난을 하는 것 같은 곽민수 대사의 태도에 김용수 대사도 버럭해 버리고 말았다.
-저한테도 그 요리사 얼굴 한번 보여 주시죠.
-에?
-우리 대사관에 당신 요리사를 보내서 우리 요리사 교육도 좀 시켜 주고, 중요한 만찬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좀 도와주고.
김용수 대사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본부에 연락하니 말이 된다던데?
곽민수 대사는 이미 본부에까지 문의를 해 놓은 상태였다. 아니, 하는 걸 봐서 본부에도 깽판을 쳐 놨을 것이다.
-본부에서 김용수 대사 당신만 허락하면 그렇게 하라고 합디다. 어차피 그쪽 요리사가 교육 메뉴얼인지 뭔지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다면서요.
-하….
덕수가 재외 공관 요리사들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본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대회가 끝이 나고도 시험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긴 했다.
본부도 덕수도 본업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미뤄졌지만.
그땐 제법 힘을 줘서 처우 개선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곽민수 대사는 그걸로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만들어 주기로 한 메뉴얼이 아직 없으니 직접 와서 책임지면 쉬운 거 아닙니까? 저도 우리 요리사랑 계속 같이 일하고 싶어요. 근데 실력이 모자란 걸 어쩌겠습니까.
-허허허.
김용수 대사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곽민수 대사의 불손한 태도야 어찌 됐든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순순히 그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피차 우린 서로 같은 상황인데 좀 돕고 삽시다.
-피차 같은 상황? 당신과 내가 같다고?
-어차피 대사님도 파나르에서 퇴직하는 거 아니오? 나도 정통 외교부 라인이 아니니 여기서 3년만 해 먹고 그만둬야지.
그게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는가.
김용수 대사는 곽민수 대사가 뭐라 씨불이든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탁!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수화기가 부서질 듯 내려놓았다. 김용수 대사는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내려놓았던 수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파나르 대사 김용수입니다. 장관님 바꿔 주세요.
분노가 섞인 김용수 대사의 목소리를 느꼈는지 기가 눌린 직원은 이유도 묻지 않고 장관실로 전화를 연결했다.
-이영호 장관입니다.
-김용수 대사입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이영호 장관은 김용수 대사의 숨소리만 듣고도 뭐 때문에 전화를 걸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보고를 통해 전화가 올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장관님 파라과이 곽민수 대사와 통화하셨습니까?
-저와 직접 통화한 건 아니지만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본부에서 허락했다던데 사실입니까?
곽민수 대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장덕수 요리사가 메뉴얼을 만들어 주기로 한 것은 맞으나 아직 진행된 게 없다. 그러니 파나르 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해 보겠다라고까지 얘기가 된 상황이었다.
워낙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곽민수 대사 때문에 본부도 백기를 들었다고 한다.
-어차피 파라과이에서 공관장 한 번 하고 말 사람이라 그런지 좀 강하게 나오네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불손한 태도 아닙니까? 장관님께도 그런가요? 이건 강한 게 아니라 건방진 거죠.
이영호 장관의 말투는 이상하게도 조심스러웠다. 보통이라면 직속이든 아니든 강하게 기강을 잡으려 했을 텐데.
김용수 대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저도 그 곽민수 대사의 성격이 세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번만큼은 선배님이 이해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관님.”
모르는 것도 잘못이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게 더욱 나쁘다. 근데 저렇게 대놓고 공관장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사람을 그냥 놔두라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차피 3년뿐입니다.
-그 3년간 개판을 치면 이미지가 얼마나 망가지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파라과이 교민들이 원하는 겁니다.
-교민들이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민들과 그곳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들이죠.
실상은 이러했다.
곽민수 대사는 대기업 임원 출신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도 협상을 잘하고, 인맥 관리를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현재 파라과이를 비롯해 남미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그런 실력 있는 사람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곽민수 대사를 임명하게 된 겁니다. 그 사람의 협상력과 친화력만큼은 진짜니까요.
-협상력이라니요. 그건 협상이 아니라 우기기 아닙니까?
-그 방법이야 어찌 됐든 원하는 걸 확실히 얻어 내긴 하니까요.
김용수 대사에게 했던 그 무례한 행동 역시 협상의 일종이었다. 어찌 됐든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이끌었으니까.
교민들은 그 과정은 모르고 결과만 보고 곽민수 대사를 원했다.
-그래서 이참에 장덕수 요리사가 매뉴얼도 만들어 주고, 그 파라과이 요리사 교육까지 해 주면 좋을 거 같은데요.
-장관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파나르에 일이 늘었습니다. 장덕수 셰프도 오, 만찬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할 일이 많구요.
-그래서 직원 한 명 더 보내 드리지 않습니까.
김용수 대사는 장관과 몇 분 대화를 나눠 보더니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단 걸 느꼈다.
곽민수 대사가 원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곽민수 대사에게는 내가 직접 연락해서 앞으로 품위를 지켜 달라고 경고하겠습니다. 이젠 사기업이 아니라 공기업 직원이 되었으니.
-하….
-그러니 김용수 대사님은 장덕수 요리사에게 잘 좀 말해 주십쇼. 대사님도 직원이 뭔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면 좋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어쩔 수 없이 장관의 말을 받아들였다. 다만 맘에 걸리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곽민수 대사의 건방진 태도를 고쳐 주고 싶었다. 장관이 직접 경고한다지만 저런 식으로 3년간 공관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른 나라 공관들의 이미지까지 안 좋아질 수 있었다. 직원들이 애써 노력해 놓은 것들이 소용없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 셰프가 그런 서류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장에서만 일했던 사람이라 서류 업무엔 약할 겁니다. 그걸 감안해서 결과물을 요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기본 틀만 잡아 주면 본부에서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하… 알겠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모든 상황이 내키지 않았지만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타지크 분관 때처럼 아는 후배의 부탁도 아니었고, 한 나라의 국왕 수준의 귀빈을 초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겨우 이런 일로 장덕수 셰프를 멀리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싸가지 없는 대사에게로.
그리고 현장에서 날고 기는 장덕수 셰프가 낯선 서류 업무로 인해 여태 쌓아 둔 명성에 금이 가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미리 밑밥을 좀 깔아 뒀으니 이해해 주겠지.
김용수 대사는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아침부터 김용수 대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열변을 토해 내고 있었다.
“장 셰프가 아무리 뛰어나다곤 해도 그런 일까지 장 셰프 탓을 한다는 게 정말 어이가 없네요.”
“아예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정도일까요?”
“설마요. 자세한 건 안 물어봤는데 만찬 행사 치르는 걸 어려워한다더군요.”
“흠….”
본부에서 요리사들을 곧바로 정규직 채용을 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사례들 때문이었다. 경력을 부풀리고, 거짓말로 이력서를 작성한 요리사들 때문에.
실제로 경력이 길다 해도 재외 공관 요리사 업무에 전혀 적응을 못 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정규직 전환을 미루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현장에서 구르는 요리사에게 교육 매뉴얼이며, 필기시험 문제에 표준 식재료값까지 요구하는 건 과한 요구 아닙니까?
“표준 식재료값이요?”
“네 오, 만찬 행사를 치를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는 거 아시죠?”
“네 1인당 50달러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통상 그 정도 금액으로 오, 만찬 행사를 치르고 있죠.”
만찬을 치른다는 명목으로 식재료를 과도하게 구입하여 개인적으로 사용을 하거나 일상식으로 먹어 버리는 공관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밝혀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번처럼 직접 감사가 나오지 않는 한 서류상으로 그것을 밝혀내는 건 쉽지 않았다.
“만찬에서 주로 제공하는 메뉴들 몇 가지를 추려서 보통 얼마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 기준을 잡아 놓으면 본부에서도 확인하기 쉽고, 각 공관에서도 경각심을 느낄 목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의도는 좋네요. 근데 쉽진 않을 거 같네요. 같은 음식이라도 요리사마다 사용하는 재료의 종류도 다를 거고 양도 다를 테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물론 까다로운 요구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보통 호텔이나 레스토랑의 주방장들은 하루 종일 칼을 잡거나 불 앞에서 서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칼은커녕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고 싸움을 한다.
신메뉴 구상, 직원 스케줄 관리, 근태 관리, 원가 관리, 식재료 발주 등등.
오히려 현장보다 서류 업무에 더욱 최적화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당연히 나도 그러했고.
김용수 대사는 내가 그런 업무를 해 봤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대사님. 오차 없이 완벽한 값을 내야 하는 건 아니라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기준을 잡아 주는 정도로 생각하면 가능합니다.”
“그래요? 그런 것도 할 줄 압니까?”
“그냥 선배님들이 할 때 옆에서 조금씩 배웠습니다.”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나 자체에 대한 신뢰도는 탄탄했기 때문에 이 일은 넘어갔다.
“메뉴얼이야 본부에서 도와준다 했으니 같이하면 되는데, 파라과이까지 제가 직접 가야 합니까?”
김용수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메뉴얼을 완성시켜 넘겨주면 되는데 그 먼 곳까지 직접 가야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근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공관장까지 되었답니까?”
김용수 대사에게 곽민수 대사가 공관장이 된 과정을 듣게 되었다.
근데 얘기를 듣다 보니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대사님. 파라과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나라죠?”
“파라과이는 남미의 중부 지역이 있는 나라입니다. 근데 그건 왜요?”
남미의 중부 지역이라.
어떤 나라인지는 정확하게 보도되진 않았지만 수십 년 전에 봤던 뉴스가 번쩍 떠올랐다.
한 공관장이 공금을 사적으로 사용하고, 사업 유치를 해 주겠단 명목으로 거액의 뒷돈을 받아 가 공관장의 자리에서 파면되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그걸 왜 기억하냐면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를 포기하고 난 후부터 내 속에도 큰 아쉬움이 남았는지 외교부에 대한 뉴스가 계속 귀에 들어왔다.
그때 그 뉴스를 보며 저렇게 비리가 많은 곳에 안 가길 잘했다며 애써 나를 위로했던 일이 떠올랐다.
근데 그때의 기억이 맞다면 그 공관장은 임기 말에 적발된 거라 파면이 되어도 별 타격이 없었던 걸로 기억했다. 어차피 정통 외교부 라인도 아니라 그냥 그대로 버려 버리고 끝이었다.
임기 동안 누릴 거 다 누리고, 즐길 거 다 즐겼을 텐데.
파면은 의미 없는 징계였다.
“맘 같아선 나도 우겨서 장 셰프 안 보내고 싶지만 그놈들과 똑같아질 수 없죠.”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굳이 가기 싫으면 내가 한번 막아 볼게요.”
“아닙니다. 재외 공관 요리사들을 교육하는 요리사. 나중에 청와대에 지원할 때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을 것 같은 타이틀이라 욕심이 나네요. 그리고 이참에 매뉴얼도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구요.”
말론 다른 핑계를 대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봤던 뉴스의 공관이 이 파라과이 대사관 같았다. 시기적으로도 비슷했고, 외교부가 아니라 대기업 출신의 공관장이란 것도 일치했다.
그리고 그땐 임기 말이었지만 지금은 곽민수 대사가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
잘만 하면 김용수 대사의 답답함을 풀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가서 제대로 실력 보여 주고 와요. 맘 같아선 따로 약점이라도 잡아서 우리 장 셰프 고생 못 시키게 하고 싶은데 거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요.”
“하하 걱정 마세요 대사님. 거기 가서 뭐 잘못하는 거 있나 잘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하하 그래 주면 나야 좋죠.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듯이 기왕 가는 거 장 셰프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좋게 끝내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길고 긴 여정이 계획되어 있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파나르에서 파라과이까지는 3번의 환승을 하고 20시간이 훌쩍 넘게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