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34화 (135/202)
  • 134. 안하무인

    “그리고 장덕수 요리사님.”

    “네?”

    몰다는 관저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잠시 멈춰 섰다.

    “요리사님의 아이디어 덕분에 많은 파나르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네 저도 도움이 되었다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혹시 앞으로 인생에서 이루고 싶다거나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원하는 거요?

    원하는 거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청와대 요리사가 되는 것이다. 회귀 후 그 생각은 줄곧 변하지 않았으니까.

    “네. 요리사님을 위해 따로 기도를 드리고 싶어서요. 라마단 기간의 단식을 무사히 마치고 처음 올리는 기도는 효과가 좋거든요.”

    “하하 그런 것도 있나요?”

    “물론 재미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분명 의미 있는 기도라 아무거나 빌지는 않습니다. 이젠 저도 나이가 있어서 이렇게 온전히 단식을 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지 싶은데 그 첫 기도를 요리사님을 위해 해 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 건진 몰라도 깊은 의미가 있는 기도라는 건 확실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올린 기도의 내용은 얼마나 절실할지 뻔했으니까.

    그 기도를 처음 본 날 위해 해 준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난 설사 그 기도발이 진짜로 죽여준다 하더라도 내 힘으로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럴 자신도 있었고.

    나의 꿈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기도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몰다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아주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기도는 다른 분들을 위해 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허허. 제가 직접 해 주는 기도를 거절한 사람은 여태 없었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잘 모르시겠지만 제 기도 귀한 겁니다?”

    몰다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한 번 더 권했지만 그의 기도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돈을 주면서까지 몰다의 기도를 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터.

    “그럼 저 말고 다른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다른 분들이요? 누구입니까? 요리사님의 부탁이니 얼마든지 들어 드려야죠.”

    자선 행사 때 만났던 엘레나 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신은 고기도 아니고 생선도 아니라며 외로움을 이겨 내고 있던 모습이.

    비로 국적엔 구분이 있을지 몰라도 종교의 아래 국적은 의미가 없지 않을까.

    “저번에 고기를 나눠 준 사람들 중에 고려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고려인이요? 들어 본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뿌리가 한국 사람이죠?”

    “네 맞습니다. 자신의 나라에서 강제로 쫓겨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외롭게 살아가고 계신 걸 봤습니다.”

    고려인 얘기가 나오자 김용수 대사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

    “파나르에 있는 고려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종교의 이름 아래 그 사람들을 포함시켜 줄 수 있는지요.”

    엘레나 씨가 몰다 같은 사람을 직접 만났다면 좀 더 밝은 삶을 살았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에 너그럽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말재주까지.

    몰다가 이방인 취급을 받는 고려인들을 포용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주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제 마지막 라마단 기도를 아주 의미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번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 기도를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파나르라는 나라에선 비록 100% 동화되지 못했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 아래에선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네 몰다님만 믿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고려인분들 다시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몰다는 아주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관저를 빠져나갔다. 어두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몰다의 뒷모습을 보며 김용수 대사가 말을 꺼냈다.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장 셰프가 해 주었군요.”

    “네? 그게 무슨….”

    “고려인들 말입니다. 사실 그분들은 제가 더 신경 써서 챙겼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선을 넘었죠?”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든 것을 다 신경 쓸 수가 없네요. 내가 놓친 걸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아직 청춘이신데요 뭐.”

    “하하 확실히 마음은 청춘입니다. 그렇지만 요새 파나르의 업무량이 많아져서 신경 쓸 일도 많아졌네요.”

    실제로 김용수 대사는 파나르에 처음 왔을 때보다 다크서클이 더 진해져 있었다.

    만나야 하고, 직접 신경 써야 할 일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 체력적으로 다소 버거워한다는 게 옆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쉬엄쉬엄하세요 대사님.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하 급한 거보다 손이 모자란 게 더 큽니다. 행정직원 한 명이 늘었어도 여전히 벅차네요. 다행히도 파나르 대사관에 자리가 하나 더 늘어서 새로운 외교관 한 명도 곧 부임할 겁니다.”

    “정말입니까? 그것참 다행이네요.”

    “어떤 사람이 올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한 명 한 명이 소중하죠.”

    “대사님이 좋으신 분이니 분명 좋은 사람이 올 겁니다. 제가 요리사로 온 거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네요. 맞습니다 맞아요.”

    자정이 넘긴 시간 열려 있는 커다란 대문을 앞에 두고 한참을 소리 내어 웃다가 들어왔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사무실.

    따르르르릉.

    민원실에 사람들이 가득했고, 사무실 전화는 번갈아 가며 쉴 새 없이 울려 댔다.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화를 받고 민원인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 전에 윤아를 도와줄 현지인 행정직원들도 한 명 뽑아서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카리나 씨. 저분들 좀 안내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새로 채용된 파나르 행정직원 카리나는 장학생으로 뽑혔던 다나만큼 한국어가 능숙했다. 덕분에 윤아의 업무를 금세 덜어 줄 수 있었다.

    한창 정신없이 일을 하던 카리나는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윤아를 찾았다.

    “윤아 씨. 이 전화 좀 대신 받아 주실 수 있어요?”

    “전화요? 무슨 전화인데요?”

    이제 민원 전화는 거의 다 대처할 수 있는 카리나가 윤아를 찾으니 일반 문의 전화는 아닐 거라 짐작했다.

    “뭐 공관장 바꾸라고 하는데요.”

    “알겠어요. 제가 받아 볼게요.”

    윤아는 하던 일을 잠시 미뤄 두고 카리나의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파나르 한국 대사관 임윤아 행정원입니다.”

    “행정원? 공관장 바꾸라니깐 무슨 행정원을 바꾸고 있어.”

    수화기로 넘어온 짜증 섞인 말투에 반말.

    윤아는 단번에 기분이 상해 버렸다.

    민원실로 걸려 온 전화 중 공관장을 찾는 전화가 있으면 바로 연결하지 말고 자신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던 윤아였다. 카리나도 갑자기 날아든 반말에 당황한 듯 보였다.

    “무슨 일 때문에 전화하셨습니까?”

    “아니 공관장 바꾸라니깐 무슨 말이 많아.”

    “대사님은 지금 업무 때문에 외부에 나가 계십니다. 저한테 말해 주시면 전달하겠습니다.”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고 차분한 말투로 대처했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태도는 여전히 불손했다.

    “대사님 들어오시면 파라과이 대사가 전화했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윤아는 욕이 나올 뻔했지만 밀린 업무 때문에 곧바로 자리로 돌아갔다.

    바쁜 업무 덕에 화난 감정을 금세 잊을 수 있었다.

    몇 시간 후.

    “대사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윤아 씨. 뭐 별일 없었죠?”

    별일은 없었지만 짜증 나는 일은 있었다. 김용수 대사가 오자마자 윤아는 아까 있었던 일을 일러바쳤다.

    “파라과이 대사관이라는데, 공관장 바꾸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길래 나중에 연락을 준다고 끊어 버렸거든요.”

    “잘했어요.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들이 있으면 일일이 대꾸해 주지 마요. 내가 책임질게요. 장관도 후배인 마당에 다른 공관장들한테 눌릴 필요 없어요.”

    역시 고인물의 장점이 여기서 발휘되었다.

    김용수 대사를 짬으로 이길 사람은 외교부 내에선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장관까지도 김용수 대사보다 후배인데 다른 공관장들은 당연했다.

    그걸 아는 다른 나라 공관들은 파나르 대사관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던 편.

    하지만 이번 파라과이 대사관만은 달랐다.

    “여튼 상대하느라 고생했어요. 내가 연락해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김용수 대사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와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를 들기 전 잠시 인트라넷을 뒤져 파라과이 대사관 직원 명단을 살펴봤지만 익숙한 이름은 없었다.

    “여보세요. 파나르 대사관 김용수 대사입니다. 전화가 왔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김용수 대사요? 곽민수입니다.”

    김용수 대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화 매너에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무슨 일 때문에 전화하셨습니까? 파라과이 대사관이랑은 업무적으로 관련 있는 게 없는데요.”

    “없기는 왜 없습니까.”

    본래라면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안부 인사를 나누고, 공통점을 찾기 위해 잠시 시간을 보낸 뒤 본론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첫마디에 기분이 상해 버린 김용수 대사는 바로 선을 그어 버렸다.

    “길게 통화할 거 없이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저희도 업무가 많이 밀려 있습니다.”

    “외교부 놈들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맨날 바쁘다고 하지.”

    곽민수 대사는 혼잣말처럼 속삭였지만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뭐라고요? 외교부 놈들? 아까부터 당신 이게 무슨 전화 매너입니까?”

    “하하하 혼잣말인데 들렸습니까? 미안합니다. 뭐 해외 공관장들이 맨날 바쁘다고 해서 직접 와 봤더니 별거 없길래.”

    김용수 대사는 그 한마디로 곽민수 대사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해외 공관장들은 꼭 외교부 출신이어야만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각계각층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공관장의 자리에 임명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서 그렇지 본래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당신 외교부 출신 아니죠?”

    “역시 짬으로는 장관도 이긴다더니 눈치도 빠르시군요.”

    곽민수 대사가 어디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을 뿐.

    김용수 대사는 다시 한번 본론을 재촉했다.

    “피차 길게 통화해 봤자 좋을 거 없을 테니 빨리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세요.”

    “좋습니다.”

    곽민수 대사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재수없는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이번에 여기에 부임하면서 새로운 요리사를 뽑았는데 실력이 아주 형편없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라니요? 책임지셔야죠.”

    “네? 그게 무슨…. 당신 요리사 실력이 형편없는데 그걸 왜 나한테 책임을 지라고 합니까?”

    김용수 대사는 안 그래도 곽민수 대사의 태도 때문에 짜증이 올라와 있었는데 터무니없는 요구에 폭발 직전이었다.

    “당신들이 추천을 해서 요리사를 뽑은 거니깐 책임을 지라는 거지.”

    “허…. 당신 나 만난 적 있어? 아님 대화라도 나눈 적 있어?”

    “당연히 없지.”

    “근데 내가 요리사를 추천했다고?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김용수 대사는 흥분한 나머지 반말로 대꾸를 해 버렸다.

    곽민수 대사는 비릿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꺼냈다.

    “젊은 요리사 뽑으라고 보낸 영상과 공문 기억 안 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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