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30화 (131/202)
  • 130. 종교계와의 인연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분명 한국말처럼 들렸다. 밥 먹었냐고 물었던 것 같은데.

    윤아 역시 나와 비슷하게 들었는지 엘레나 씨에게 파나르어로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밥 먹었어?”

    엘레나 씨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한국어를 발음했다.

    “엘레나 씨도 한국말이 기억이 나세요?”

    “이것만요. 할머니가 저와 어머니를 볼 때마다 지겹도록 이 말을 하셔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엘레나 씨의 할머니는 러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낯선 러시아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답답한 맘에 자신의 딸과 손녀에겐 그리운 한국어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반면 그들의 딸과 엘레나 씨는 러시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특히 엘레나 씨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할머니가 맨날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봐도 밥 먹었냐고 묻고, 어제 보고 오늘 또 봤는데도 밥 먹었냐고 물어서 처음엔 이상했어요. 왜 그렇게 밥에 집착하는지.”

    “하하 한국 사람들의 습관이죠. 그냥 일상적인 인사 같은 거예요.”

    “이제는 그 뜻을 알죠. 근데 그땐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다른 종류의 인사도 많은데 맨날 밥 먹었냐고 물어봤으니까요.”

    원래도 습관적으로 밥 먹었냐고 묻는 민족이 한국인인데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에게 밥 먹었냐고 묻는 건 생존과도 관련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주변에도 많았을 테니.

    엘레나의 할머니 역시 자신의 딸과 손녀가 적어도 끼니는 굶지 않길 바랐던 의미로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것이다.

    “여튼 여기서 밥 먹고 가요. 이 떡갈비라는 거 구워서 같이 먹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두고두고 엘레나 씨 많이 드세요.”

    엘레나 씨는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가라고 권했다. 언어는 전혀 달랐지만 행동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그러지 말고 시간이 있으면 나랑 같이 밥 좀 먹어 주고 가요.”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엘레나 씨는 우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억지로라도 잡아 두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어머니와 처음 파나르로 오고 나서 굉장히 외로웠습니다.”

    “…….”

    “러시아에 살 때보다 사정은 조금 더 나아졌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도 그땐 고려인들이 주변에 많았거든요.”

    “그렇겠네요.”

    지금보다 사정이 더 안 좋았을지언정 러시아엔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고려인들이 많았다. 진짜 가족은 아니었지만 친척들처럼 서로 교류하고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파나르로 넘어오고 나선 줄곧 외로움을 견디는 게 일이었다는 엘레나 씨.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몇 년 동안 매일 혼자서 밥을 먹었어요. 먹고 싶은 걸 맘껏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젠 적어도 굶진 않을 정도는 돼요. 근데 혼자 밥 먹는 게 너무 싫어요. 같이 지낼 가족이 있다면 며칠 굶어도 될 만큼 혼자가 싫어요.”

    엘레나 씨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집 청소를 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다는 엘레나.

    하지만 이방인의 신분으론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은 급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갑자기 한국 대사관에서 저를 찾아와 줬단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는지 몰라요.”

    “그럼 대사관이라도 찾아오시지 그랬어요… 말동무라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이미 제 국적이 파나르인지라 제가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건 모순이죠. 게다가 전 한 번도 한국엘 가 본 적이 없거든요.”

    엘레나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파나르 속담 중에 ‘생선도 아니고 고기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국적은 파나르인일지 몰라도 러시아에서 넘어온 한국인은 그 어디에도 소속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의지할 곳도 없을 것이고.

    “그러니 나랑 밥 한 번 같이 먹어 줘요. 나는 그거면 됩니다. 이 고기들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네 그럼 다 같이 식사하시죠. 상 차리는 걸 도와드릴게요. 뭐부터 할까요?”

    할 일이 남아 있어 주뼛거리는 상율과 윤아를 대신해 내가 앞장서서 팔을 걷어붙였다. 지금 이 부탁을 거절하고 나가면 계속 맘에 걸릴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부탁을 해도 한 번쯤은 들어줄 만한 부탁인데, 한민족끼리 이 정도의 부탁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거 없어요. 우리 집에 온 손님은 그냥 해 준 음식을 먹기나 하면 됩니다.”

    단호한 엘레나 씨의 말에 우린 따뜻한 차 한 잔씩을 하며 밥이 다 되기를 기다렸다.

    한 번도 한국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한국인의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별건 없지만 맛있게 먹어 주면 좋겠어요.”

    “우와.”

    우리가 갖다준 떡갈비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졌고, 접시의 주변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반찬들이 가득했다.

    “이건 당근김치예요. 그리고 이건 오이무침. 어머니는 이 반찬들을 좋아하셨어요.”

    “반찬들이 진짜 한국 음식 같네요.”

    비록 정통 한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맛은 한식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빨리 소금에 절여지도록 얇게 채 썰어서 만들 당근김치는 고려인들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고, 오이를 절여서 먹는 오이김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맛이었다.

    “전부 맛있습니다. 반찬들이 입맛에 딱 맞아요.”

    “정말입니까? 다행이네요. 역시 제 입맛도 한국인에 가까운가 봅니다. 저도 이 음식들이 맛있거든요.”

    “그럼 저희가 갖다 드린 떡갈비는 어떠세요? 먹어 본 적 있는 맛인가요?”

    엘레나 씨는 육즙이 가득한 떡갈비를 능숙한 젓가락질로 한 점 떼어 내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몇 번 씹더니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익숙한 맛이에요. 이 떡갈비는 처음 먹어 봤지만 이 짭짤하고 달콤한 이 맛은 익숙합니다. 너무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한식의 간장 양념의 맛을 기억하고 계신가 보네요. 한국 음식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양념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래서 처음 보는 음식이지만 익숙했나 봐요.”

    “꼭 그것 때문은 아닐 겁니다.”

    “네?”

    엘레나 씨가 어릴 적 비슷한 음식을 먹어 봤던 기억이 살아났을 수도 있겠지만 이 떡갈비를 익숙하다 느끼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파나르의 아카시아꿀을 이용해 양념을 만들어서 더 익숙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아!”

    여느 파나르 사람의 집처럼 엘레나 씨의 집에도 작은 꿀단지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달콤한 맛이 아카시아꿀이었군요. 역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맛입니다.”

    “파나르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해서 만들어 봤습니다. 입맛에 맞으신가요?”

    “물론이죠 너무 맛있습니다.”

    엘레나 씨는 밝게 미소 지으며 밥과 떡갈비 하나를 더 입 안에 가득 넣었다.

    “떡갈비의 맛도 익숙하고, 이 꿀 맛도 익숙한 거 보면 역시 저는 고기도 아니고, 생선도 아닌가 봅니다. 하하하.”

    농담을 던지며 밝게 웃는 엘레나 씨의 표정이 짐짓 씁쓸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엘레나에게 상율이 손을 내밀었다.

    “엘레나 씨는 고기도 맞고, 생선도 맞습니다. 저희 한인회는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셔도 오시고, 오늘처럼 심심하고 말동무가 필요할 때도 놀러 오세요.”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상율의 말에 엘레나 씨는 다시 한번 밝게 웃으며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사람이 그리웠던 지난 수년간의 세월.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파나르로 왔지만 나아진 살림살이는 외로움을 동반했다. 항상 의지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엘레나 씨가 기댈 곳은 없었다.

    “한인은 꼭 국적인 한국인 사람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밥상 차리는 거 보니 영락없이 한국인이신데요. 언제든 놀러 오세요.”

    “네. 꼭 가겠습니다!”

    상율은 엘레나 씨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예정에 없던 식사를 한 탓에 자선 행사는 한밤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하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렇게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도 참 기분 좋은 것 같아요.”

    “그렇죠? 뭔가를 받는 것도 좋지만 나눠 줄 수 있다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아요.”

    요리사라는 직업 역시 그게 매력이었다.

    누군가에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음식이라는 문화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도 새삼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 * *

    대한민국 대사관.

    “김준우 서기관님 이번에 진행한 자선 행사 결과 보고서 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번 자선 행사를 통해 150kg의 떡갈비는 50가구가 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을 전부 유용하게 먹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보내 준 호의라는 건 그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길 수 있었다.

    “대사님. 이번 자선 행사는 파나르의 3개 신문사를 통해 뉴스가 나갈 예정입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생색내는 것 같지만 이렇게라도 자선 행사가 많아진다면 그게 바로 순기능 아니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공금을 사용했으니 티를 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죠.”

    “허허 아주 현실적인 대답이네요.”

    김용수 대사는 부하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굳이 이 자선 행사를 숨기지 않았다.

    음식을 준비한 장덕수 요리사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대사관의 인지도가 높아질수록 직원들의 업무도 좀 더 수월해질 것이다.

    조만간 새로운 직원이 한 명 더 파나르로 부임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김용수 대사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임기가 끝이 나더라도 후배들의 길이 좀 더 평탄하길 바랐다. 물이 들어올 때 힘껏 노를 저어 놔야 했다.

    김준우 서기관이 보고서를 건네고 방을 나가자 곧바로 윤아가 들어왔다.

    “대사님. 오늘 오전에 대사님을 꼭 뵙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계속 소속을 밝히지 않네요.”

    “그래요? 어디길래.”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데 언제 찾아가면 대사님을 뵐 수 있냐고 자꾸 물어보길래 여쭤보고 다시 연락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음… 뭐가 고맙다는 걸까요? 다시 그쪽에 연락해 볼래요?”

    “네 알겠습니다.”

    오전부터 김용수 대사를 애타게 찾는 전화 한 통이 있었다.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데 뭐에 대한 고마움인지는 알고 받아야 할 거 아닌가.

    어디서 걸어온 전화인지도 밝히지 않는 상대 때문에 조금 골치를 썩인 윤아였다.

    -여보세요? 대한민국 대사관 행정원 임윤아입니다. 오전에 통화했었던 직원입니다.

    -아아 안녕하세요. 대사님과는 얘기가 되셨나요?

    전화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그 누구보다 여유롭고, 인자했다.

    -일단 어디서 전화를 거신 건지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옆에 저희 대사님도 같이 듣고 계시니깐 말씀해 주세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파나르 중앙 모스크 몰다를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몰다요? 그게 성함인가요?

    몰다라는 생소한 단어에 윤아가 수화기를 더욱 귀에 밀착했다.

    -아니요. 몰다는 이슬람교의 모스크를 담당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

    윤아는 그제야 몰다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스크를 담당하고 기도를 해 주는 사람들.

    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목사와도 같았다.

    그렇지만 넘치고 넘치는 한국의 교회와 달리 파나르 이슬람교의 모스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중앙 모스크를 담당하고 있는 몰다.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고위 공무원들보다 영향력이 강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이번 라마단 기간에 한국 대사관이 저희를 대신해 좋은 일을 해 주셨단 소식을 듣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한번 뵙고, 파나르 무슬림들을 대표해 감사함도 전하고 기도도 해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몰다의 요청을 윤아가 통역하자 김용수 대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종교계의 인사와 인연을 맺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 거물이 먼저 연락을 해 오다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윤아 씨. 우리 관저로 올 수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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