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26화 (127/202)
  • 126. 파나르의 소수 민족

    주방장님은 김용수 대사와의 만찬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김용수 대사는 김상현 주방장이 원한다면 대사관 요리사에 지원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했지만 끝끝내 거절했다.

    서로 아무런 빚 없이 깔끔한 인연으로 남자는 말로 파나르를 떠났다.

    * * *

    서울 H호텔.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긴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김상현 주방장은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사장실로 불려 갔다.

    “주방장님 잘 쉬다 오셨습니까?”

    “네. 덕분에 푹 쉬고 많은 것을 배우고 왔습니다.”

    “주방장님 같은 분들도 아직 배울 게 있나요 하하.”

    “아직 한참 모자라더라구요.”

    김상현 주방은 사장에게 파나르에 갔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지만 사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상현 주방장이 없었던 2주 동안 수도 없이 주방을 들락거렸던 사장이었다.

    주방장이 없을 때 뭔가 문제라도 생기면 그걸로 꼬투리를 잡아 직원들을 줄일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김상현 주방장이 없어도 H호텔의 주방은 원활하게 돌아갔다. 조금 파이팅이 모자랐을 뿐.

    “파나르에 다녀왔다면서요.”

    “아 들으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시간이 맞아서요.”

    억지로 숨길 맘은 없었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장덕수 요리사는 설득했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거기까지 간 건 내가 부탁했던 걸 말해 보려고 간 거 아닙니까?”

    사장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김상현 주방장이 파나르에 간 게 덕수를 설득하기 위해 간 줄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파나르에 간 건 그냥 쉬기 위해 간 것뿐입니다. 덕수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요? 조금 실망이네요. 저는 주방장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휴가까지 내 가며 파나르로 간 줄 알았는데.”

    김상현 주방장은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 호텔을 위해 반평생을 바친 것은 맞지만 남의 인생까지 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덕수는 그곳에서 아주 훌륭하게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그 훌륭한 일을 여기서 하면 돈도 벌고, 유명세도 더 떨치고 좋잖아요.”

    아이처럼 떼를 쓰는 사장의 말에 김상현 주방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사장님. 제가 없는 동안 주방을 자주 오셨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내 호텔 내가 둘러보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있을 땐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하셨던 분이 갑자기 자주 왔다길래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서 여쭤봤습니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이 팽팽했다.

    사장도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착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속내를 밝혔다.

    “그래요. 주방장님이 없는 동안 무슨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그걸 빌미로 직원들 숫자를 줄이거나 월급 좀 줄여 보려고 했습니다.”

    월 200만 원만 줘도 일주일 내내 하루 종일 일해 줄 빠릿빠릿한 신입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사장의 눈에 기존 직원들의 연비는 성에 차지 않았다.

    “주방장님도 이제 좀 아실 만한 위치 아닙니까? 저라고 우리 직원들이 전부 안 소중하겠습니까?”

    “…….”

    “일단 호텔이 잘돼야 직원들도 좋은 거 아닙니까? 길게 봐서 직원 구성의 효율성을 조금 높이자는 그 말입니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상현 주방장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떠나겠습니다.”

    “네?”

    “제가 이 주방에서 가장 월급이 많으니 제가 떠나겠습니다. 직원들은 그냥 그대로 두십쇼.”

    “그…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김상현 주방장의 강수를 사장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그만두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설마 가정도 있고, 반평생을 바친 호텔을 이렇게 쉽게 떠날 리가 없었다.

    “아니요. 저는 책임질 가족이 있어서 호텔을 떠날 순 없습니다.”

    “그럼요?”

    “해외로 발령을 신청하겠습니다.”

    “네? 해외로요?”

    “네 직급이 강등되어도 괜찮으니깐 해외에 있는 H호텔로 발령 신청하겠습니다. 자리가 날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김상현 주방장은 결국 완전히 H호텔을 떠나진 못했다.

    아무리 사장이 미운 짓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호텔을 떠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호텔 주방은 정년도 따로 없어 자기 발로 나가지 않는 이상 오래오래 근무할 수도 있다.

    가장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이 있을까.

    다만 파나르에서 느꼈던 그 희열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평생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음… 이건 예상치 못한 방향이네요. 그렇지만 주방장님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곧바로 인사부에 가서 발령 신청하겠습니다.”

    김상현 주방장은 사장실 문을 닫고 나와 곧바로 인사부로 향했다.

    파나르에서 대사관 요리사라는 직업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지만 김상현 주방장은 결국 도전할 수 없었다. 평생 즐겁게 요리를 하는 게 꿈이었지만 자신의 꿈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할 순 없었다.

    눈에 밟히는 가족을 결국 저버릴 순 없었다.

    지금은 조금 미워졌지만 자신의 삶의 절반인 H호텔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곳이 어떤 나라인들 항상 새로운 요리는 있을 테니까.

    * * *

    파나르 주말 오후 덕수의 집.

    주방장님을 한국으로 보내고 나니 괜히 마음이 공허해져 있었다. 이럴 땐 좀 더 바쁘게 일하는 게 최고인데, 아쉽게도 이번 주엔 계획된 만찬이 없었다.

    이번 주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여유로운 주말을 즐기고 있었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살며시 잠이 들려는 찰나 울려 온 벨 소리라 조금 짜증이 났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주말인데 뭐 해?

    -어 윤아구나. 이제 막 낮잠 좀 자려던 참이었어.

    -내가 깨웠구나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무슨 일이야?

    윤아와 업무적으로는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지만 최근에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오랜만에 맛집 친구가 뭐 하나 궁금해서.

    -맛집 친구? 아아 그러고 보니 안 간 지 너무 오래됐다 그치?

    -요즘에 네가 워낙 바빠야지.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래서 말인지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

    -오늘? 그럴까?

    어차피 잠도 깼고, 출출하기도 했다. 밥을 따로 만들어 먹기엔 귀찮은 날이었다.

    -뭐 먹으러 갈 거야? 날씨도 좋은데 시원한 게 당기기도 하네.

    -오늘은 다 먹을 거야.

    -다?

    -응. 다 먹을 거야.

    -그러든지. 그럼 어디서 만날까?

    어지간히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말투로 봐선 식당 하나를 거덜 내겠다고 각오라도 한 사람 같았다.

    적당히 기분을 맞춰 줘야겠다. 나도 오랜만에 든든하게 남이 해 주는 음식도 먹고.

    일단은 아직 먹어 보지 못한 파나르 음식이 있어서 그것부터 먹기로 했다.

    “근데 우리가 아직 못 먹어 본 파나르 음식도 있구나.”

    “당연하지. 아직 엄청나게 많아.”

    “그래? 파나르도 은근히 음식 문화가 강하다.”

    “왜냐면 수십 개의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니까. 너 혹시 파나르에 한국인들도 있는 거 알고 있었어?”

    “한국인? 교민들 말하는 거야?”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상섭 회장님을 비롯해서 꽤 많은 한국 교민들이 살고 있었다. 파나르 분관이 대사관으로 승격한 이유도 늘어난 교민들 덕분이었고.

    “아니 그분들은 아예 한국 사람들이지. 내가 말하는 건 고려인들이야.”

    “고려인? 그거 일제 시대 때 강제 이주된 사람들 아니야?”

    “오 맞아. 역사 공부 좀 했구만?”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얼핏 기억이 났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과는 다르게 자신들이 한국인인 걸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긍심을 가지고 산다는 말을.

    그런데 파나르에도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근데 파나르에도 고려인들이 살아?”

    “많지는 않아. 원래 파나르에 고려인들이 온 건 아니고,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나라들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근처 나라들로 이사 간 거지.”

    “오 그렇구나. 신기하네.”

    “그래서 파나르에도 고려인들이 하는 식당이 몇 개 있거든. 거기에 가 보자. 그것도 어찌 보면 파나르 음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파나르에도 고려인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사람들의 음식이라니. 이미 백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 음식의 형태를 가지고 있을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형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여기야. 고려인 식당.”

    “이게 식당이야? 그냥 가정집인데?”

    윤아가 데리고 간 그곳엔 그 흔한 간판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았다. 간판은커녕 식당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글씨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여기 적혀 있잖아. 이 정도는 읽을 줄 알지?”

    “두… 우레? 두레?”

    “응 맞아. 이 식당 이름은 두레야. 농사를 짓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일종의 동호회 같은 모임을 두레라고 하는데, 그때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척박한 중앙아시아 땅에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이주시켰다는 말이 있어. 한국인들이 일 하나는 끝내주게 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그때 이주된 사람들끼리 모여서 밥도 먹고 서로 도우며 살자는 의미로 만든 식당이래.”

    “두레라. 의미가 되게 좋네.”

    윤아의 장황한 설명이 있은 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구석에 박혀 있고 간판도 없는 집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원한 거 먹고 싶댔지? 내가 추천 하나 해 줘도 될까?”

    “추천? 좋지. 알아서 시켜 줘.”

    언제나 그랬듯이 주문의 윤아의 몫이었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윤아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여기요. 국시 두 그릇 차갑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윤아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국수? 국시?”

    “국시라고 했어. 네가 생각하는 그 음식 맞아.”

    “정말 우리나라 국수를 말하는 거야?”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수의 사투리 격인 국시가 여기서도 그대로 불리고 있어. 맛도 거의 비슷해.”

    “빨리 먹어 보자.”

    얇게 썬 계란 고명과 절인 오이가 올라간 모습이 영락없이 냉국수였다. 다만 그 맛은 상상과는 달랐다.

    “음….”

    “맛은 어때?”

    어떻냐는 말에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윤아가 소개해 준 음식은 전부 맛있었는데 이것만은 달랐다.

    “솔직히 별로지?”

    주변의 눈치를 한번 본 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이건 제대로 갖춘 재료로 만든 국수가 아니거든.”

    “왜?”

    “생각해 봐. 100년 전에 이 먼 땅에 멸치나 디포리 같이 육수를 낼 만한 재료가 있었겠어? 간장은 물론이고, 기껏해야 양파나 감자 그런 거였겠지.”

    “그렇겠네.”

    “고국의 음식을 먹고 싶고, 마땅한 재료는 없고, 그래서 이것저것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다가 자리 잡은 게 이 국시야. 근데 고려인들의 후손들은 이 맛에 길들어져서 이게 그들의 전통 음식이 되어 버린 거고.”

    “그랬구나. 뭔가 씁쓸한 스토리가 있는 음식이었네.”

    윤아의 얘기를 듣고 나니 국시를 먹고 인상을 찌푸렸던 자신이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처음 먹었을 때와 달리 은근히 계속 끌리는 맛이었다. 계속해서 젓가락을 가져갔다.

    “그래도 중독성이 있지?”

    “그러네. 먹다 보니 먹을 만하다.”

    “고려인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니 당시를 상상해 보며 먹는 것을 추천해.”

    특이한 말투로 말을 마무리하는 윤아였다.

    “근데 너 별걸 다 알고 있다. 그리고 말투는 갑자기 또 왜 그래? 뭔가 여행 가이드해 주는 사람 같아.”

    “정말? 그렇게 느껴져?”

    “응 그렇게 옛날얘기도 해 주니깐 더 맛있게 느껴지네.”

    “다행이다. 사실 나 통역사 되려고 준비하고 있잖아. 그래서 올여름부터 여행 가이드 해 보려구.”

    “가이드? 진짜? 그거 연습하는 거였어?”

    “응 이런 경험이라도 있어야 나중에 유리할 것 같아서. 너만 청와대 들어가는 거 보고만 있을 수 없지. 나도 통역사로 꼭 청와대 가 볼게.”

    “오 멋있다.”

    뿌듯해하는 것도 잠시.

    윤아는 다 먹은 국시를 서둘러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고객님 얼른 일어나세요. 오늘 일정이 빡빡합니다.”

    “뭐야 갑자기. 나 좀 더 앉아 있다 가고 싶은데. 주방장님도 한번 보고 싶고.”

    “그럴 시간 없습니다. 빨리 일어나세요.”

    나는 진짜 여행객도 아닌데, 윤아는 1주일 만에 유럽 5개국을 돌아야 하는 일정의 가이드처럼 날 재촉했다.

    “또 어딜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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