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23화 (124/202)
  • 123. 대리 만찬

    음식이 거의 다 준비될 때쯤 만찬의 주인공들이 도착했다.

    중재자 역할을 맡은 쥴리앙 프랑스 대사는 일본 대사는 물론 동남아시아 연합 대사들까지 구분 없이 모두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연합 대사들의 시선은 입구에서부터 일제히 일본 대사를 향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쥴리앙 대사님.”

    “어서오세요. 대사님들.”

    “이렇게 귀한 자리를 제공해 주서셔 감사합니다.”

    일본 대사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다른 대사들과 달리 일본 대사의 표정은 따분해 보였다.

    만찬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질려 있었다.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이런 형식적인 만찬이 지루할 법도 했다.

    게다가 오늘의 만찬에선 갑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주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표정 관리까지 할 필욘 없다는 의미.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다.

    “대사님 이쪽에 앉으시죠.”

    “가운데요? 그러죠 뭐.”

    동남아시아 연합 대사들은 일본 대사를 호스트 자리인 테이블의 가장 가운데에 앉히고 주변을 둘러쌌다.

    쥴리앙 대사는 호스트 자리를 뺏긴 사실이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그저 중재자 역할에 집중하겠다는 의미.

    “배고프시죠? 그럼 바로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눠 볼까요?”

    “그러시죠. 근데 메뉴판은 없는 건가요?”

    보통 만찬 메뉴는 그날 식탁 위에 올려진 메뉴판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대사들의 요청으로 메뉴판을 올려 두지 않았다.

    “저희가 일본 대사님을 위해 특별히 요리사에게 만찬 음식을 요청했습니다. 프랑스 대사가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이거든요.”

    “그래요? 그건 몰랐네요.”

    잠시 흥미를 보이는 듯하더니 금세 표정이 식어 버리는 일본 대사였다.

    프랑스 요리라면 수도 없이 먹어 본 그였다. 게다가 만찬에 나오는 음식은 전부 거기서 거기였다.

    샐러드와 스프, 에피타이저 그리고 스테이크 한 덩어리와 디저트.

    메뉴가 조금 달라지긴 해도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요리사님. 음식 서빙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쥴리앙 대사의 신호에 맞춰 준비한 음식이 서빙되었다. 일본 대사는 물론이고, 다른 대사들 역시 오늘 어떤 요리가 나오지는 모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일식을 준비해 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이었으니까.

    “테오! 여기 있는 접시부터 가지고 가요.”

    “예 셰프.”

    실제로 주방 업무를 주도한 사람은 김상현 주방장이었지만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인 테오가 음식을 가지고 나갔다.

    나와 주방장님은 뒤에서 접시를 세팅하고, 음식이 따뜻하게 유지되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다.

    “첫 번째 음식은 야끼토리입니다.”

    “야끼토리? 오늘 준비한 음식이 일본 음식이에요?”

    “네 저희가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테오의 어설픈 일본어 발음이 들려오고, 일본 대사의 다소 놀라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가 일식을 할 줄 알아요?”

    “일본 대사님이 오신다길래 특별히 연습했습니다.”

    “아… 그래요?”

    자신을 위해 특별히 연습했다는 말은 반가웠지만 그리 기대가 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태리 요리사가 한국인을 위해 김치찌개를 준비했다고 하는 느낌이랄까.

    고마웠지만 그 음식이 맛있을 거란 기대는 쉽사리 들지 않았다.

    “냄새는 그럴싸하네요.”

    “소금구이와 직접 끓인 데리야끼 소스를 발라서 구운 두 가지 야끼토리를 준비했습니다.”

    테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인의 요리가 아닌 음식을 본인이 만든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혹여 음식을 입에 넣은 손님들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당황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닭꼬치를 한입 입에 넣은 일본 대사의 표정은 급격하게 밝아졌다.

    “으음 이 야끼토리는 제대로 염지가 되었군요. 육즙이 살아 있어서 식감이 탱글탱글하고, 소스가 깊숙이 스며들었어요. 그리고 특히 이 숯의 향이 굉장한데요?”

    “그건 삭사울이라고 하는 숯입니다. 파나르에서 흔히 사용하는 고급 숯이죠. 일본 음식 연습을 하다가 이 숯으로 야끼토리를 구워도 맛이 좋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발견인 것 같네요. 처음 느껴 보는 향인데 아주 맛있어요.”

    테오는 대답을 한 뒤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본 대사의 표정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가 만드는 일본 요리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생각보다 훌륭한 음식이 나왔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음식에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바뀐 일본 대사의 태도에 덩달아 다른 대사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테오 역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되돌아왔다.

    “테오, 손님들 반응이 어때요?”

    주방으로 돌아온 테오는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하이파이브.

    “최고예요. 아직 메인 요리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본 대사의 표정이 달라졌어요.”

    “좋아! 다행이네요.”

    김상현 주방장 역시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음식이 낯선 땅에서도 먹혀들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된 요리를 보여 줍시다! 아자!”

    “예 셰프.”

    신이 난 우린 김상현 주방장님의 말 한마디에 더욱 끈끈한 원 팀이 되었다.

    첫 번째 음식을 가져갈 때 불안해하는 뒷모습과 달리 두 번째 요리를 가지고 나가는 테오의 뒷모습은 당당했다.

    이번엔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가지고 나가는 사람처럼 어깨가 펴져 있었다.

    그리고 말투에도 더욱 힘이 들어가 있었다.

    “두 번째 요리는 하모 유비끼와 우나기동입니다. 바로 드실 수 있게 주방에서 익혀 왔으니 드시면 됩니다.”

    손님들이 혼자서 각각 먹을 수 있도록 작은 냄비에 샤부샤부를 익혀서 서빙했다.

    뜨거운 육수에 살살 익혀 가며 먹는 샤부샤부의 재미는 사라졌지만 그 맛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하모? 설마 장어를 말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대신 바닷장어가 아니라 좀 더 고급 재료로 통하는 민물장어입니다.”

    “민물장어요? 확실해요? 바닷장어가 아니라 민물장어요?”

    일본 대사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동남아시아 연합의 대사들은 수시로 바뀌는 일본 대사의 표정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야끼토리를 먹고 밝아진 표정이 왜 다시 굳어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음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대사님.”

    “아닙니다. 일단 식기 전에 음식부터 드시죠.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하모 유비끼를 하는 곳은 많지 않아요. 이 칼집을 봐선 요리사의 실력이 굉장히 수준급이네요. 맛이 기대가 됩니다.”

    일본 대사는 젓가락을 들어 꽃처럼 핀 장어 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음… 탱글탱글하면서도 부드럽게 씹히는 장어의 살점이 아주 일품이에요. 이 민물장어 특유의 냄새가 입 안을 제대로 감싸네요. 이걸 프랑스 요리사가 만들었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장어를 한입 넣은 후 일본 대사의 젓가락과 숟가락은 멈추질 않았다.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파나르에서, 그것도 프랑스 요리사가 만든 일본 음식이 인생 최고의 요리 중 하나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맛을 내고 있었으니.

    일본 대사는 기대하지 못한 상황 덕에 신이 나 있었다.

    한편 다른 대사들은 기뻐하는 표정이었지만 쉽사리 젓가락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대사님들은 왜 안 드세요. 장어 안 좋아하세요?”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먹어 본 적은 없어서요. 조금 꺼려지긴 하네요.”

    “장어는 일본에서도 아주 고급 식재료로 통합니다. 게다가 이 정도 수준의 음식은 일본에서도 쉽게 맛볼 수가 없어요.”

    “그… 그런가요.”

    일본 대사의 말투에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일본 요리사가 만들었다면 모양새가 더 좋았겠지만 유럽의 콧대 높은 요리사가 이 정도의 수준의 일본 요리를 만들었단 사실도 나쁘지 않았다.

    일본 요리가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이런 훌륭한 음식을 깨작거리는 몇몇 대사들의 태도가 썩 맘에 들진 않았다.

    “한 번만 드셔 보세요. 꽤 맘에 들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야끼토리는 흔한 닭고기였기 때문에 모두가 별 탈 없이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장어라는 재료를 낯설어하는 대사들이 제법 있었다. 일본 대사의 강요 아닌 강요 덕에 장어 요리를 한 점씩 입에 넣는 대사들이었다.

    “어?”

    “어? 이게 뭐지?”

    한 점을 입에 넣고, 두 번째, 세 번째 장어를 입에 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순식간이었다.

    “이렇게 탱글탱글하면서 부드러운 생선은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습니다. 비린내도 나지 않고, 소스가 달콤하면서도 진해서 제대로 배어 있네요.”

    “제가 말했죠? 맛있다고!”

    장어 요리에 시큰둥하던 대사들의 표정이 바뀌는 걸 보고 일본 대사는 신이 났다. 마치 자기가 이 음식을 만들기라도 한 양 뿌듯해하고 있었다.

    “근데 대사님. 아까 이 요리를 처음 봤을 때 왜 표정이 굳어지셨습니까. 대사님 말대로 굉장히 귀하고 맛있는 음식인데.”

    조용히 중재자 역할만 하던 쥴리앙 대사가 나서서 물었다.

    “사실 이 민물장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생선입니다. 다만 파나르에선 이 민물장어를 구할 수가 없어서 일본에 돌아갔을 때 원 없이 먹고 오곤 했는데 이 민물장어가 파나르에서도 구할 수 있는 건 줄 몰랐어요.”

    “그 정도로 귀한 생선입니까?”

    “귀하기도 하지만 이슬람 국가에선 비늘 없는 생선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잡아 봤자 팔리지를 않으니 잡는 어부들이 없었겠죠. 우리 요리사에게 민물장어를 구해 보라고 얼마나 오랫동안 부탁을 했는데도 구하지 못하더라구요.”

    “그래요?”

    “겨우 이런 식재료에 대한 정보력도 일본 대사관이 한참 부족한 것 같군요. 셰프님, 이 장어를 어디서 구하셨나요? 그것도 이렇게 신선하고 굵직한 장어를?”

    일본 대사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시선은 테오에게로 향했다.

    일본 대사는 내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파나르 대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도 민물장어를 구해 보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발 벗고 구해 주겠다고 나선 사람도 없었고.

    근데 장어를 즐겨 먹지도 않는 프랑스인들이 이걸 구해서 만찬 요리로 내놨으니 심기가 조금은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사실 제가 구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분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그래요? 누구의 도움을 받았나요. 저도 좀 알고 있으면 해서요.”

    “한국 대사관 셰프입니다.”

    “한국 대사관 셰프요?”

    테오는 차마 그것마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장어를 어디서 구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손질하는 법만 간단하게 배웠을 뿐.

    “한국 대사관 셰프가 이 만찬에 도움을 준 건가요?”

    “네. 사실 오늘 이 만찬을 함께 준비했습니다. 일본 요리는 저보다 뛰어난 것 같아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 얼굴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테오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내며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김상현 주방장과 나에게 서둘러 준비된 새 앞치마와 모자를 건넸다.

    말하지 않아도 우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일본 대사님이 찾으세요. 빨리 갈아입으세요.”

    “저희 둘 다요?”

    “한국 대사관 셰프를 찾긴 했는데 셰프가 두 명인지는 몰라요. 근데 셰프 킴은 총괄이잖아요. 같이 나오셔야죠.”

    H호텔이거나 레스토랑이었다면 김상현 주방장이 대표해서 손님 앞에 서는 게 맞다.

    하지만 오늘은 엄밀히 말하면 주방 보조로 이곳에 온 거였다. 김상현 주방장은 테오가 건넨 새 앞치마를 거절했다.

    “나는 됐으니깐 덕수 너만 나가.”

    “왜요. 주방장님이 주방장님이시잖아요.”

    “나는 여기 잠시 있다 갈 사람인데 내가 저 사람들 봐서 뭐 해. 그리고 민물장어 구해 온 것도 덕수 너잖아. 이번엔 너 혼자 나가는 게 맞아.”

    “그래도 요리를 한 건 주방장님이시잖아요.”

    “그거야 내가 재밌자고 온 건데 뭐. 빨리 나가. 손님들 기다리겠다. 내가 이렇게 가르쳤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이 요리도 전부 덕수 너랑 테오가 만들었다고 해. 내 이름은 절대 거론도 하지 마. 알았어?”

    김상현 주방장의 호통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테오 역시 움찔했는지 서둘러 내 팔을 끌고 주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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