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허락
“일? 무슨 일? 여기까지 와서? 언제는 푹 쉬러 오라면서 저번에 너 휴가 때 알바 시킨 거 복수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그냥 몸이 근질근질하시는 거 같아서요. 같이하면 나름 재밌을 것 같고요.”
주방장님의 간지러운 부분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침 그것을 완벽하게 해소해 줄 수 있는 좋은 자리도 있었고.
꼭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 주기 위함은 아니었다.
주방장님이 만든 이 음식이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들었다는 일식 수준은 정말 놀랄 정도였다.
“무슨 일인데?”
“확실하게 한 번 더 물어봐야 하겠지만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가 저한테 도움을 요청했거든요.”
“무슨 도움? 너한테?”
김상현 주방장님은 프랑스 대사관에서 요청한 도움이란 말을 듣자 상체가 점점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전부터 대사관 요리사 일에 대해 자잘한 질문이 많았던 주방장님이었다.
“거두절미하고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가 일본 음식을 대접해야 할 상황이 생겼는데, 자기는 프랑스 요리 말곤 아예 못 한다고 해서요.”
“그래? 그럼 너 혼자 가면 되지.”
“저도 할 줄은 알지만 혼자서 만찬을 진행할 정도는 아니라서요. 일단 못 한다고 거절하긴 했는데 주방장님이랑 저랑 팀으로 가면 해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나도 적극적으로 테오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그 만찬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본 김상현 주방장님의 실력과 함께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근데 내가 가도 돼?”
“당연하죠. 프랑스 대사관 측에선 오히려 땡큐겠죠. H호텔의 총주방장이 와 준다는데.”
“그럼 일단 물어봐라. 할 수 있으면 재밌긴 할 것 같다.”
초롱초롱해진 김상현 주방장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테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테오는 여전히 고민 중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테오 저번에 말했던 일 도와줄 사람 구했어요?
-일본 요리 말이죠? 아직 못 구했어요. 장 셰프가 도와주기 어려우면 메뉴 짜는 것만이라도 도와줄 수 있어요?
만찬 시간이 촉박해지자 테오의 불안함은 더욱 깊어졌다. 단순한 친목 모임도 아니고 그 정도의 만찬을 책임지고 진행해 줄 요리사를 구하는 게 쉽진 않았다.
-혹시 괜찮으면 제가 아는 분이 도와 드려도 될까요?
-아는 분이요? 대사관 요리사예요?
-그건 아닌데 충분히 그 정도 능력 되시는 분이에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단 말에 곧바로 기뻐할 줄 알았는데 테오는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는 것 같았다. 답장이 급격하게 느려졌다.
-음…. 믿을 수 있는 분인가요? 제가 도움이 꼭 필요하긴 하지만 증명되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서요. 장덕수 셰프님은 일본 요리를 못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도움을 줄 것 같아서 부탁을 드렸던 거구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건 결국 테오의 요리였다.
아무리 자신 없는 일본 요리라고 해도 셰프로서 자신의 얼굴과도 같은 음식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순 없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일했던 H호텔의 총주방장님이세요. 지금은 한식을 담당하고 계시지만 일식당에서도 오래 일하셨던 분이에요.
-H호텔의 총괄 주방장이라고요? 그 정도 호텔의 총주방장이면 실력은 확실하겠군요.
-네 그러니깐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음… 그렇긴 해도 조금 불안하긴 해요. 저도 프랑스에서 H호텔이나 그 정도 레벨의 주방장 출신들과 일을 많이 해 봤지만 그들의 실력이 가짜일 때도 종종 있었어요.
-가짜라뇨? 김상현 주방장님은 아직도 현직에 계신 분이에요.
김상현 주방장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테오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뭔가 예전에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모양.
-제가 생각하는 호텔의 시스템은 일반 레스토랑과는 체계가 좀 달라요. 단순히 실력만으로 최정상에 올라갈 수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호텔은 레스토랑에 관련된 서비스뿐만 아니라 온갖 시스템이 전부 모인 총집합체였다.
음식만 먹으러 오는 레스토랑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내부 시스템 역시 회사에 더욱 가까웠다.
맨파워가 여러 부서로 나눠져 있기 때문에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면 소위 정치질이라 불리는 눈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제가 만났던 몇몇 총주방장들은 요리 실력보단 다른 이유로 총주방장이 된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그걸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에요. 그것 또한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테니까.
-이해해요. 저도 그런 주방장들을 종종 봤으니까요.
-근데 이번에 저는 수준급의 요리 실력이 필요해요. 부탁을 하는 처지에 까다롭게 굴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해요.
테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상현 주방장은 테오가 말하는 부류의 물경력의 주방장이 아니었다.
순수 실력으로 유학파들이나 아부쟁이들을 밟고 그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었다.
-저희 주방장님의 실력은 제가 보장할게요. 오늘 한 번 더 증명이 되었구요. 그리고 제 요리 스승이기도 하구요.
-장덕수 셰프의 요리 스승이라구요?
-네 제 스승님이세요. 제가 처음 요리를 시작한 게 H호텔이니까요.
내 스승이란 말에 테오의 태도가 변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답장이 오는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인 H호텔의 총주방장이라는 경력으로도 흔들리지 않던 테오의 태도가 단숨에 변해 버리는 순간이었다.
나의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김상현 주방장의 신뢰도를 더욱 높여 주고 있었다.
-마침 휴가를 오셔서 파나르에 머무르고 있거든요. 예전부터 대사관 요리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테오 얘기를 하니 선뜻 도와주신다고 했어요.
-그래요? 제가 운이 좋았네요. 장덕수 셰프 스승의 도움을 받다니.
-제 스승이기 전에 H호텔의 총주방장님이시죠.
테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문제없겠네요.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쥴리앙 대사님께 미리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내려놓자 주방장님은 곧바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표정이 여러 번 바뀌는 걸 옆에서 보며 답답해하고 있었다.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래? 프랑스 대사관에서 허락했어?”
“네 처음엔 영 못 미더워했는데 제 요리 스승님이라고 하니깐 바로 수락하던데요?”
“진짜? H호텔 총주방장인 스펙으로도 안 된대?
“그걸로는 턱도 없이 부족한가 봐요. 제 요리 스승이라고 하니까 겨우겨우 허락하시네요.”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취기가 살짝 오른 김상현 주방장도 덩달아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한 말이 당연히 농담인 줄 알고 있었지만 김상현 주방장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덕수야.”
“네 주방장님.”
“파나르에서 지낸 고작 1년 남짓한 시간에 엄청 발전했구나. 나는 1년 동안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사람이랑은 다르죠. 비교 대상 자체가 잘못됐어요.”
“그렇긴 해도 테오라는 요리사의 말이 영 농담은 아닌 것 같다.”
주방장님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이 파나르에선 H호텔의 총주방장이라는 타이틀보다 장덕수 요리사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이 진짜로 더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주방장님은 한국 최고의 요리사 중 한 분이시잖아요. 요리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을 정도인데 어떻게 더 발전을 하겠어요. 국가로 치면 저는 개발 도상국이고, 주방장님은 선진국이죠.”
“말이라도 고맙다. 근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이 파나르에선 네가 나보다 더 뛰어난 요리사인 것 같아. 시장에서도 그렇고, J&J 분식도 그렇고, 대사관 요리사들이 널 신뢰하는 것도 그렇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와 제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분식집까지 주방장님께 보여 줬었다.
그땐 그냥 가볍게 놀라고 말았는 줄 알았는데 속으론 많이 놀랐다고 했다.
“내가 네 나이 때 이 파나르에 왔다면 이 정도로 영향력을 펼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 온 지 이제 겨우 이틀째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운 게 엄청나게 많아.”
“저도 처음에 그랬었어요.”
“덕수 너 호텔에 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완전 물 만난 물고기가 되었네.”
“하하 과찬이십니다. 해외 생활이 저한테 한국보다 잘 맞나 봐요.”
“그런가 보다. 내가 억지로 붙잡지 않고 여기 보내 주길 잘한 것 같다. 빠릿빠릿한 막내를 보내려니깐 아까워서 좀 잡아 둘까 했었거든. 그리고 사장님이 너 스카우트하라고 했을 때도 내심 돌아와 줬으면 했고.”
“…….”
“근데 그러지 않은 걸 잘한 것 같다.”
“맞아요. 주방장님은 제 은인이십니다.”
나도 회귀하지 않았다면 주방장님과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을 너무 깎아내리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김상현 주방장님은 이미 충분히 훌륭한 요리사였으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한 번 스승은 스승이고, 한 번 주방장은 주방장이다. 맞지?”
“네 당연합니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진행하는 만찬은 나만 믿고 따라와라. 내가 제대로 실력 발휘해 줄 테니.”
“예 셰프! 믿고 따르겠습니다.”
든든했다.
회귀를 하기 전 주방장으로 근무한 기간이 약 10년, 그리고 혼자서 일을 하는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로 1년가량.
누군가의 팀원으로서 일한다는 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며 일을 한다는 생각에 오묘한 감정이 들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게다가 내가 그 누구보다 믿고, 든든한 김상현 주방장의 지시라니.
빨리 만찬 날이 오길 바랄 뿐이었다.
“근데 주방장님. 메뉴는 뭘로 할 거예요?”
“메뉴? 글쎄. 초대되는 손님이 누구라고 했지?”
“동남아시아 연합 대사들이랑 일본 대사요.”
“음… 일본 대사라면 입이 꽤 고급지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성향에 따라 까다로운 입맛을 티 내는 사람도 있고, 굳이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공관장들의 입맛은 일반인들보단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업무상 대접을 하거나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았을 테니까.
일본 대사의 성향까지는 모르겠지만 테오를 위해서라도 최상의 음식을 대접해야 했다.
“그러면 일본인 요리사들도 다루기 어려운 음식을 만들어야겠구만.”
“어떤 걸 만드시려구요?”
“장어 요리를 한번 해 볼까 싶네.”
“장어요?”
“응 장어 손질은 제대로 하려면 7~8년까지도 걸린다고 하거든. 그만큼 요리하기 까다로운 음식이야. 손질하는 건 더 지랄맞고.”
김상현 주방장님이 꺼낸 장어 카드는 나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보양식으로 장어를 즐겼고, 일본 대사처럼 중년의 남자가 장어 요리를 싫어할 리는 없을 테니까.
다만 맘에 걸리는 게 하나가 있었다.
“근데 덕수야. 파나르에선 장어를 안 먹어? 내가 하루 종일 시장을 돌아다녀 봤는데 이상하게 장어는 잘 안 보이더라. 다른 생선들은 다 있는데.”
김상현 주방장의 의심은 사실이었다.
파나르에선 장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왜? 다른 생선들은 다 먹으면서 설마 장어는 안 먹어?”
“파나르의 종교가 뭔지 아세요 혹시?”
“파나르? 이슬람이었던가?”
“네 맞아요. 국교까지는 아니지만 이슬람이 많은 나라예요.”
“그거랑 장어 안 먹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이슬람교가 국교이거나 대세인 국가에서는 ‘비늘 없는 물고기는 먹을 수 없다’라는 이슬람 율법이 있어 돼지고기랑 같이 금기하는 물고기가 장어래요.”
김상현 주방장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동공이 커졌다.
“아니 율법에 그런 게 있어? 처음 들어 보는 말이다.”
“파나르에서도 카차이 호수나 바다에서도 장어가 잡히긴 하는데 이러한 문화의 특성 때문에 유통이 잘 안된대요.”
“아… 그럼 아예 구할 수 없는건가?”
“파나르에 무슬림들만 사는 건 아니니깐 잘 뒤져 보면 찾을 수도 있어요. 근데 쉽진 않을 거예요.”
“그러면 계획을 좀 틀어야겠는데….”
김상현 주방장님은 애써 준비한 필살기가 막힌 것 같아 실망하고 있었다.
“덕수야. 무슨 방법이 없을까? 여태 여기 사는 동안 비밀리에 알아 놓은 공급책 같은 거 없어?”
“제가 무슨 약 파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게 어딨어요.”
“기왕이면 민물장어면 좋겠는데, 정 안되면 바닷장어도 괜찮고.”
주방장님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있다! 잘하면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