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20화 (121/202)
  • 120. 오랜만에 느끼는 재미

    “놀라지 마세요.”

    “아니 뭘 자꾸 놀라지 말래. 시장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외국 시장이라고 해 봤자 거기서 거기겠지.”

    호텔 역시 대규모로 식재료를 취급하기 때문에 주방장님 역시 국내 도매 시장은 물론이고, 밭 전체로 계약하는 일을 해 본 적도 많았다.

    낯선 식재료가 아무리 많다 한들 주방장님같이 베테랑이 시장을 보고 크게 놀랄 일은 흔하지 않았다.

    “파나르 시장은 그래도 좀 달라요. 저도 처음 보고 엄청 놀랐거든요.”

    “너랑 나랑 짬이 같냐? 최근에 네가 많이 성장한 건 인정이지만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야.”

    김상현 주방장은 호언장담했지만 파나르 시장을 보자 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와아… 이게 다 시장이라고?”

    “제가 말했잖아요. 놀라지 말라고.”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냥 도시 아니야? 이 정도면 여의도보다 큰 거 아닌가.”

    “에이 그 정돈 아니에요. 안 놀란다시더니 저보다 더 오버하시네요.”

    파나르 시장의 규모에 놀란 김상현 주방장은 잠시 주춤하더니 신이 난 눈빛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도 처음에 저런 뒷모습이었을 거다.

    비행 피로나 시차 따위는 잊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주방장님이었다.

    “이건 무슨 대파야? 마늘쫑이야?”

    “대파 아니고 마늘이래요.”

    “신기하다 진짜. 처음 보네 이런 건.”

    거대한 파나르 시장을 하루 만에 다 돌아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거의 뛰다시피 시장 전체를 둘러보는 주방장님이었다.

    “헉헉헉 지금 몇 시지?”

    “3시 넘었어요.”

    “와아 그런데도 아직 안 가 본 곳이 있어?”

    “주방장님, 여기 하루 만에 다 도는 건 불가능이에요. 계시는 동안 매일매일 구경하세요 천천히.”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해산물부터 채소, 향신료, 과일까지 생전 처음 보는 것들도 많더라.”

    물론 호텔에 납품되는 고급 식재료들처럼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주방장님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이런 식재료들을 실컷 보고 난 후 요리사들의 입에서 당연히 나와야 할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이것들 전부 다 요리해 봤어?”

    “저요? 대부분은 다 사용해 봤죠. 사비를 써서라도 거의 다 사 봤어요.”

    “그랬겠지.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겠지. 눈앞에 이런 재료들이 있는데 어떻게 참겠냐. 게다가 값도 저렴한데.”

    김상현 주방장 역시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칼을 잡고 싶어 하는 주방장님을 설득해 파나르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일단 칼은 나중에 잡고 파나르 음식들부터 드셔 보세요.”

    “그래 그래야겠다. 내가 그래도 이태원이나 홍대 같은 데 자주 가서 외국 음식 많이 사 먹어 보거든. 근데 파나르 음식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쭉 국내에서만 일했지만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파나르 음식점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메뉴판 한번 보실래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덕수 네가 알아서 주문해 줘 봐. 내일부턴 내가 이것저것 실패하면서 시켜 먹어 볼게.”

    나도 윤아가 아니었다면 파나르 음식점에서 많이 헤맸을 것이다. 이제는 파나르 음식점에 일부러 찾아가서 먹을 정도로 그 매력에 빠져 버렸지만.

    “그러면 제일 대표적인 음식 몇 가지만 시켜 볼게요.”

    “좋지! 그리고 맥주도.”

    한국의 불고기나 비빔밥처럼 가장 대표적인 파나르 음식 몇 가지를 테이블 위에 가득 주문했다.

    “이거는 파나르식 볶음밥인 플롭인데요, 볶을 때 말고기 기름으로 볶아요.”

    “말고기 기름?”

    “네 여기에 들어 있는 고기도 말고기예요.”

    “와아 말고기를 이렇게도 요리를 하는구나. 나도 말고기 요리는 많이 해 보지 않아서 몰랐네.”

    김상현 주방장은 말고기를 자주 접해 보지 않았음에도 거침없이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감탄까지.

    “와아 말기름이 생각보다 되게 담백하다.”

    “그렇죠? 냄새도 심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은근히 맛있어요.”

    “라드만큼 풍미도 좋고 괜찮은데? 나도 한번 써먹어 봐야겠다.”

    입맛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생선 처음 보는 음식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것 같았다.

    “이건 샤슬릭이라고 하는 꼬치 요리고, 닭, 오리, 양, 돼지 등등 종류가 엄청 다양해요.”

    “삼겹살 꽂아서 팔면 한국인들이 환장하겠네.”

    “맞아요. 그리고 이건 비쉬파르막이라는 음식인데, 파나르 명절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엔 무조건 이 음식을 먹어요.”

    “여기 이 밀가루 면은 생긴 게 꼭 수제비 같다.”

    “맞죠? 그래서 저도 이 음식을 조금 변형해서 수제비를 손님들한테 대접한 적이 있어요.”

    내 대답에 김상현 주방장이 놀란 눈치였다.

    아마도 외국 음식을 한식에 적용한 아이디어가 신박했던 모양.

    이미 그렇게 만찬을 치른 지는 한참이 지났는데 주방장님 눈엔 그것마저도 재밌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 반응이 어땠어? 수제비처럼 만들어도 파나르 사람들이 잘 먹었어?”

    “네 좋아하더라구요.”

    “와아 신기하네. 호텔에서도 외국인 손님들 오면 억지로 정통 한식을 먹이지 말고 이런 식으로 변형해서 팔면 재밌을 것 같은데.”

    주방장님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말대로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호텔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맛있는 거 드시면서 즐기세요. 뭘 또 여기까지 와서 일 생각이십니까?”

    “그런가? 내 인생의 절반을 호텔에서 보냈는데 이게 자연스러운 거지.”

    “여기서는 맘껏 마시고, 즐기세요. 이 술도 한번 드셔 보세요.”

    “이건 또 뭐야? 막걸리 아닌가?”

    파나르 음식들은 물론이고, 낙타젖으로 만든 정통 쿠므스까지 특별히 주문해 맛보게 해 주었다.

    덕분에 파나르 음식점 안에서 주방장님의 감탄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꺼억 자~ 알 먹었다 덕수야.”

    “소리만 들어도 잘 드셨는지 알겠네요. 파나르 음식들도 먹을 만하죠?”

    “먹을 만하기는! 완전 내 스타일이네.”

    “오 그 정도였어요?”

    “그래 내가 일식당, 중식당 그리고 지금 한식당까지 많은 주방을 겪었지만 파나르 음식이 절대 밀리지는 않는다.”

    “좋네요. 괜히 뿌듯한데요?”

    주방장님은 자신이 말한 대로 일식당, 중식당을 거쳐 지금의 한식당 주방장 겸 H호텔의 총주방장을 담당하고 있었다.

    30년 넘게 한식당에서만 근무하던 나와는 조금 다른 행보였다. 사실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한식당에만 박혀 있었던 게 사실.

    대부분은 김상현 주방장님처럼 여러 주방을 겪어 본 사람들이 많았다.

    “근데 비쉬파르막 같은 음식을 수제비로 변형한 것도 좋지만 파나르에 일단 해산물 상태가 생각보다 되게 좋네?”

    “그렇죠? 바닷가가 꽤 멀리 있는데 괜찮아요.”

    “멀어 봤자지라고 하고 싶은데 아까 시장을 보고 나니깐 그런 얘기 못 하겠다. 엄청 유통 시설이 잘되어 있나 봐.”

    “그런가 봐요. 여튼 싱싱한 해산물 덕은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파나르는 도시에 바다가 인접해 있지 않지만 신선한 생선을 넉넉하게 구할 수 있었다.

    김상현 주방장 역시 그 부분이 특히 맘에 든 눈치였다.

    “덕수야. 집에 혹시 데바랑 사시미 있냐?”

    “데바요? 데바는 없고, 사시미는 하나 있어요. 근데 잘 안 써서 칼날이 좀 무딜 거예요.”

    “괜찮아 갈면 되지. 숫돌은 있지?”

    “그건 기본이죠.”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데바와 사시미를 찾는 주방장님.

    생선을 손질하고, 회를 뜰 때 사용하는 칼을 찾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생선회가 당기는 거겠지.

    “내일 저녁에 내가 회 한 접시 떠 줄게. 저녁에 소주 한잔 어때?”

    “소주 좋죠. 근데 파나르에선 소주보다 보드카가 더 싸요. 보드카 어떠세요?”

    “진짜? 더 좋지. 싸구려 소주보다 보드카가 당연히 더 땡큐지. 도저히 손이 간질거려서 안 되겠다. 시장 구경만 하는 것도 좋은데 역시 내 손으로 만져야 성에 찰 것 같아.”

    김상현 주방장은 결국 직업병을 이겨 내지 못했다.

    시장에서 봤던 수많은 식재료들과 처음 맛본 파나르 음식들.

    그것만으로 머릿속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찼을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가만히 구경만 할 사람이 아니었다.

    * * *

    다음 날.

    나는 일을 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주방장님을 혼자 둘 수밖에 없었다.

    파나르어를 못 하는 주방장님을 혼자 두는 게 조금 불안했지만 혼자서 꽤 알찬 시간을 보낸 듯했다.

    “저 다녀왔습니다 주방장님.”

    “왔어? 빨리 씻고 저녁 먹자.”

    “와아… 뭘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요?”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자 이국적이면서도 익숙한 음식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다시마의 감칠맛 나는 향과 간장 냄새.

    보지 않아도 장르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자카야에 온 것 같은데요?”

    “겨우 이자카야 따위랑 비교를 하다니. 오늘은 파나르 최고급 오마카세 레스토랑이다!”

    맛있는 냄새에 서둘러 손만 씻고 식탁에 앉았다.

    누가 만들어 주는 근사한 음식,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걸까.

    게다가 한식이 아닌 음식은 더욱더 오랜만이었다.

    “덕수는 넌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일식이랑 중식에도 일가견이 있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일식당에 계실 때 일본 유학파 출신 요리사들도 다 눌러 주셨다구요.”

    “눌러 준 정도는 아니고 그냥 유학 안 가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정도지.”

    “그래도 그 사람들 다 꺾고 승진하신 거잖아요.”

    제대로 된 비행기 한번 타 보지 않았던 김상현 주방장은 일식당에 근무할 시절 어려움이 많았다.

    함께 일하는 동기나 후배들 전부 일본에서 요리 학교를 졸업했거나 몇 년간 일본에서 일을 배웠던 요리사들뿐.

    그들 사이에서 일식이 전공도 아니고, 일본 땅 한번 밟아 보지 못한 김상현 주방장은 자연스레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요리라는 게 정답이 어딨냐? 걔네들이 일식에 대해 더 많이 알지는 몰라도 결국은 일이야. 일머리는 내가 한 수 위였지.”

    “요리 실력은 그 사람들이 한 수 위인 거 인정하시구요?”

    “에이 그건 또 아니지. 기본도 되면서 일머리까지 있으니깐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거지.”

    “에이.”

    “에이? 그럼 어디 한번 먹어 봐 봐. 비록 사시미 안 잡은 지 오래되긴 했지만 감은 살아 있다.”

    주방장님의 말대로 상현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반듯하고 일정하게 썬 생선 살이 하얀 접시 위에 가지런히 올라가 있었다.

    “일단 뭐 오로시는 깔끔하네요.”

    “쳇 당연하지. 광어 오로시 하는 거 어려운 거 정도는 잘 알고 있지?”

    오로시는 생선에서 횟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살을 발라 내는 기술을 말한다. 넓적하고, 살점이 적은 광어는 손질하기 어려운 생선으로 통한다.

    하지만 주방장님이 손질한 광어의 뼈엔 작은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제대로 감 살아 있네요.”

    “이 자완무시도 한번 먹어 봐 봐. 기포 하나 없이 제대로 쪄졌어.”

    현직에 있는 요리사들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음식들을 척척 만들어 낸 김상현 주방장이었다.

    그 역시 평범한 요리사는 아니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해도 손이 다 기억하고 있더라.”

    “국물도 끝내주네요. 재료 이름도 파나르어로 모르면서 용케 잘 만드셨네요.”

    “이름이 뭐 필요하냐? 사진 있고, 돌아다니면서 내가 직접 고르면 되는데.”

    김상현 주방장은 새벽부터 시장으로 나가 재료를 골랐다고 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똑같은 음식인데도 한국에서 하는 거랑 외국에서 만드는 거랑 뭔가 느낌이 다르네. 재밌다야.”

    “그렇죠? 사람은 이래서 넓은 곳에 나와서 살아야 하나 봐요.”

    “그런가 보다. 이번엔 네 말이 맞았다. 근데 외국에서 손발 잘 맞는 사람들이랑 일해도 재밌긴 하겠다.”

    주방장님은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주방장님.”

    “응?”

    “혹시 괜찮으시면 일 하나 하실래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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