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9화 (120/202)
  • 119. 반가운 손님

    -파나르에?

    -네 얼마 전 대회 때 본 그 파키스탄 요리사 기억하시죠?

    -응 당연히 기억하지. 거기도 꽤 실력 좋던데.

    -그분도 왔다 가셨는데 기분 좋게 돌아가셨어요.

    -정말? 파나르에?

    김상현 주방장 역시 일만 하느라 외국 한번 나가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럴 땐 콧바람 좀 쐬면서 몰랐던 세상을 좀 둘러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호텔 사장의 마인드가 얼마나 좁은지도 확인할 수도 있었고.

    -저희 집이 그리 크진 않지만 주방장님 한 명쯤은 충분히 쓰실 수 있어요.

    -에이 그래도 거기까지 갔는데 후배한테 민폐를 끼칠 수 없지.

    -민폐라니요. 저도 퇴근하면 심심한데 같이 지낼 사람 있으면 좋죠.

    승재와는 다르게 김상현 주방장님이 파나르에 온다고 해도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줄 순 없었다.

    길고 긴 내 휴가는 이미 끝이 났기 때문에.

    퇴근 후에 몇 시간 함께 지내는 건 나도 대환영이었다.

    -어차피 저 일하는 동안엔 주방장님 혼자 돌아다니셔야 해요.

    -그래? 그러면 나도 맘이 편하지. 와이프랑 한번 상의해 볼게.

    -네 알겠어요. 연락 주세요.

    김상현 주방장에게 한껏 바람을 불어넣어 준 뒤 자리에 누워 밀린 메시지를 확인했다.

    최근 들어 말이 많아진 채팅방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각국에 퍼져 있는 한국인 재외 공관 요리사들 모임과 또 하나는 테오를 비롯한 파나르의 요리사들 모임.

    특히 승재의 말이 많아진 게 반가우면서도 눈에 띄었다.

    -저희 파키스탄 대사님은 요즘 만찬을 너무 많이 주최해서 죽을 것 같아요. 갑자기 양을 엄청 늘렸다니까요.

    -일주일에 몇 개나 하시는데요?

    -보통 3번 정도요?

    -와아 미쳤다. 3번이면 너무 힘드시겠는데요?

    -예전보다 몸이 힘들긴 한데, 뭔가 억지로 주최하는 느낌은 아니라서 나름 재밌어요. 결과도 좋은 것 같고.

    -저도 차라리 그런 만찬들이면 나을 거 같아요. 그러면 뿌듯하기라도 하지. 저희는 맨날 한인회들만 초대해서 술 마시는 만찬뿐이에요.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승재의 표정이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신이 나서 재료를 사고, 요리를 하는 모습.

    아나와 지마 앞에서 보여 줬듯이 힘들어도 즐겁게 요리를 할 수만 있다면 몸이 힘들어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면 따로 안부 연락을 해 볼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휴가 이후로 영걸 대사님 태도에도 분명 큰 변화가 있었을 것.

    최우수 공관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좀 더 분발해야겠다.

    그리고 또 하나 시끄러워진 채팅방.

    프랑스 대사관의 요리사 테오는 혼자서 일하는 주방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슐랭 스타를 받은 셰프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모든 요리를 다 잘할 수 없는 법.

    프랑스 요리가 아닌 음식엔 크게 재능이 없었다.

    -큰일 났습니다 요리사님들.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테오?

    -2주 후쯤에 만찬이 잡혔는데, 그 사람들한테 무슨 요리를 해 줘야 할지 막막해서요. 메뉴 짜는 게 쉽지 않네요.

    -프랑스 대사관에 오는 거니깐 당연히 프랑스 요리를 하면 될 텐데 뭐가 문제예요?

    손님이 특정한 음식을 요청하지 않는 한 보통은 자기 나라의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일종의 룰이다.

    기껏해야 한 끼일 뿐이니 입맛에 좀 맞지 않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외교관들이었으니까.

    물론 까다롭게 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비단 음식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동남아시아 국가 모임의 대사들과 일본 대사를 초대하게 되었는데 따로 음식을 요청했어요.

    -그래요? 따로 음식을 요청하는 일은 드문 일인데.

    -그러게요. 아무래도 동남아시아 국가 대사들이 일본에게 부탁할 일이 있나 봐요. 일본 요리로 만찬을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들에게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일본 대사가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다른 국가 대사들이 일본 대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보면.

    -일본 대사관의 요리사는 없나요? 좀 도와 달라고 하면 될 텐데.

    -일본 대사관 요리사도 모임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데 거절했어요. 굳이 끼고 싶지 않다고.

    -그렇군요.

    -어떡하죠? 저는 프랑스 요리를 제외하곤 흉내만 낼 수 있는 수준인데. 걱정이네요.

    테오는 난감하다는 듯 하소연을 쏟아 냈다.

    -다른 아시아 요리사들 없어요? 그러면 장덕수 셰프가 좀 도와주면 안 되나요?

    -제가요? 저도 일본 요리는 그리 익숙하진 않은데.

    -그래도 한국이랑 일본이 제일 가까우니깐 우리들보단 낫지 않을까요?

    -그래요 장 셰프. 나 좀 도와주세요. 다음에 프랑스 손님들 오면 내가 꼭 도와줄게요.

    -아… 그.

    테오는 간절하게 요청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일반인들보다야 훨씬 능숙하고, 맛있게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진짜 일본인이 만족할 만한 일본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근데 다른 요리사가 프랑스 대사관에서 요리를 해도 되나요?

    -그건 전혀 문제없어요. 만찬할 때마다 항상 청소나 설거지를 도와주는 주방 보조 한두 명씩은 부르니깐 괜찮아요. 그 사람들 대신 미스터 장을 부르면 돼요.

    -그렇군요. 한번 고민해 볼게요.

    -꼭 좀 부탁할게요! 장 셰프.

    테오의 간절한 외침을 거절하기 힘들었지만 나 역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김상현 주방장님도 파나르에 오기로 했으니 퇴근 후에도 따로 도와줄 시간이 없었다.

    * * *

    파나르 대사관 관저.

    여느 날처럼 김용수 대사와 아침 식사를 하며 이것저것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회귀를 해서 젊어지고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게 하나가 있다면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점.

    남자들도 나이가 들면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 말이 많아진다고 했다. 나 역시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말이 잘 통하는 김용수 대사를 앞에 두곤 자잘한 얘기까지 전부 다 하고 있었다.

    “이번에 그 동남아 국가 연합에서 일본을 놓치긴 아까울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제일 적합한 시기인 것 같네요.”

    “그래요? 그래서 다들 일본 눈치를 보는 거였구나. 저는 무슨 프랑스 대사관에 초대되었는데 일본 요리를 요청하나 했어요.”

    “그렇게 다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프랑스 대사관은 그저 장소를 제공해 주는 역할일 뿐인 거죠.”

    “하지만 요리사들에겐 그렇지만 않죠. 테오도 아주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겁니다. 쥴리앙 대사님도 뭐든 그냥 넘기는 스타일 아니시잖아요.”

    “쥴리앙 대사는 음… 굉장히 까다롭죠.”

    김용수 대사에게 테오와 있었던 얘기를 하니 이해관계를 금방 설명해 주었다.

    파나르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선 모든 것을 꿰뚫고 있어야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김용수 대사는 어느새 파나르 전체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근데 장 셰프.”

    “네 대사님.”

    “혹시 시간이 되면 그 테오라는 프랑스 요리사 좀 도와줄 수 없어요?”

    “네? 왜요?”

    김용수 대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조만간 프랑스 대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요. 이번에 장 셰프가 테오를 도와주면 그 협상이 좀 더 수월할 것 같네요.”

    “마음의 빚을 지게 만들자는 말씀이시죠?”

    “맞아요. 외교라는 게 뭔가를 준 만큼 똑같이 내어 주는 게 일종의 룰이거든요. 큰 건수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짐을 지게 해 주면 나중에 협상하는 게 유리해져요.”

    김용수 대사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사님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근데 저희 일본 요리 실력으론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이번엔 시간이 좀 부족할 것 같아서요.”

    “왜요?”

    “한국에서 지인분이 놀러 오실 거거든요. 퇴근하고 그분을 챙겨야 해서요.”

    “그래요? 가족들이 오나요?”

    “아니요. 여기 오기 전에 일했던 호텔의 주방장님이 놀러 오시기로 했어요.”

    김상현 주방장에 대해선 대회 얘기를 하면 한번 꺼냈던 적이 있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요리사라며 치켜세워 줬었다.

    “오! 대단한 분이 오시는군요. 호텔의 주방장이면 우리 장 셰프의 스승이 아닙니까.”

    “하하 스승님이긴 하죠. 저는 한식만 잘하지만 주방장님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시거든요.”

    “그래요?”

    “네 그래서 배울 게 많으신 분이에요.”

    “그렇군요. 아쉽네요. 시간이 되면 스승님도 관저에 한번 초대해요.”

    “가족이 아닌데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꼭 가족이 아니어도, 지인이나 친구도 관저에 초대할 수 있어요.”

    “그래요? 좋네요.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저도 우리 장 셰프의 스승님이 누군지 궁금하니깐 꼭 좀 물어봐 줘요.”

    “네 알겠습니다.”

    스케줄이 빡빡한 주방장님에게 물어봐야겠지만 굳이 거절하진 않을 거 같았다.

    내가 일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종종 물어보곤 했었으니까.

    보내 주는 관저 사진만으로도 감탄을 하곤 했었다. 외국의 주방은 생긴 게 신기하다면서.

    먼저 장시간 비행이 처음인 주방장님의 마중을 나가는 것부터 준비해야했다.

    * * *

    파나르 국제공항.

    밤늦게 김상현 주방장님을 태우고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아침이 되어서 파나르에 도착했다.

    “주방장님!”

    “덕수야.”

    “고생하셨어요. 이렇게 비행기 오래 타 보신 적 처음이시죠?”

    “휴우… 죽는 줄 알았다. 아니 6시간이나 비행기를 타는데 의자가 그렇게 좁다는 게 말이 돼? 나는 국제선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러면 비즈니스석을 타셨어야죠.”

    “그럴 돈이 어딨냐… 내가.”

    “주방장님이 돈 제일 잘 버시거든요.”

    김상현 주방장은 파나르에 도착하자마자 진이 빠진 얼굴이었다. 국제선치곤 그리 길지 않은 비행시간이었지만 처음 장시간 비행을 해 본 주방장님껜 지옥이었을 터.

    내리자마자 집으로 가자는 주방장님이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밥은 됐고, 일단 집에 가서 짐부터 풀자.”

    “그럴까요? 졸리진 않으세요?”

    “응.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졸리진 않네.”

    김상현 주방장의 조촐한 캐리어 하나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이야 여기가 무슨 원룸이야? 너무 큰데?”

    “여기 이 방 하나가 전부잖아요. 그럼 원룸 맞죠.”

    “이 정도 크기면 웬만한 한국의 투룸이랑 크기가 비슷하겠다.”

    영토가 큰 나라인 만큼 건물도 방도 다 큰 파나르였다. 내가 사는 집도 비록 오래되고, 원룸이었지만 실제 크기는 한국의 투룸과 비슷한 수준.

    주방장님은 내 방이 맘에 든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 엄청 좁은 줄 알고 호텔 잡으려고 했는데.”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충분하다고.”

    “난 원룸이라길래 뭔 고시원 같은 거 생각했지.”

    고단한 장거리 비행이었지만 집에 와서 짐을 풀고, 시원한 커피 한잔을 마시니 금세 기력을 회복하는 김상현 주방장님이었다.

    주방장님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나가자.”

    “네? 어디로요?”

    “요리사라면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는 거 아니야?”

    “거기요? 좋죠 기대하세요.”

    다른 건 몰라도 그곳을 처음 본다면 그 크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들어가기도 전에 규모에 압도당했었으니까.

    김상현 주방장의 놀란 표정이 궁금했다.

    “자 가시죠. 파나르 시장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