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6화 (117/202)
  • 116. 반납

    -우리 요리사한테?

    -네 외람된 말씀이지만 장덕수 요리사는 대사관 직원이니 조금 어려운 일이라도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장 셰프가 타지크에 파견되는 기간이 너무 길면 나도 곤란하네.

    양현호 참사관은 김용수 대사가 내심 장덕수 요리사 카드를 꺼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일반 한식당이야 조건이 안 맞으면 거절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대사관 측은 그렇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이 들어간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무시하는 건 어려웠다.

    -그렇게 길지 않을 겁니다. 딱 형태건설의 새로운 요리사가 오기 전까지만입니다.

    -음…. 일단 물어는 보겠네.

    김용수 대사 역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이 대답했다.

    * * *

    파나르 대사관 관저.

    “생각만큼 타지크 상황이 그리 순조롭지는 않나 보네요.”

    “네 계획했던 것처럼 술술 풀리지는 않나 봐요.”

    계약이 성사되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끝이 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향수병을 우습게 본 형태건설의 큰 착오였다.

    “그래서 말인데 장 셰프가 잠시 동안 가서 형태건설 사람들을 좀 달래 주고 올 수 있을까요?”

    “음…. 가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한두 번 한식을 먹는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공사가 끝나려면 적어도 몇 년은 그곳에 머물러야 할 텐데요.”

    조금 힘들긴 해도 대사관에서 하라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파나르 대사관을 전부 제쳐 두고 공사 현장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법.

    “형태건설 본사에서 요리사 채용을 해 주기로 했답니다.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만 있어 주면 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비자나 서류 등을 준비하려면 꽤 오래 걸리지 않나요?”

    타지크는 비자를 쉽게 내주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 강하다는 한국 여권의 힘으로도 비자 없이 머무를 수 없는 나라였다.

    아무리 커다란 사업이라고 해도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요리사의 비자를 추가로 내어 달라고 하면 쉽게 내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면 기간을 최대한 줄이는 게 관건이겠군요.”

    “그 부분은 양현호 참사관과 타지크 분관에서 국왕에게 직접 말해 최대한 힘써 준다 했으니깐 믿어 보죠.”

    “저도 힘을 좀 보태 봐야겠습니다.”

    “장 셰프가요?”

    비자는 공식적인 서류지만 발급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진 않다.

    사람이 직접 심사를 하고, 평가를 하기 때문에 인맥이나 어떤 힘에 의해서 굉장히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특히 타지크처럼 왕의 힘이 여전히 강한 나라는 더더욱.

    양현호 참사관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국왕에게 직접 부탁하려는 것이었다.

    “타지크에 잠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우리도 적극적으로 도와야죠.”

    국왕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하는 양현호 참사관에게 연락을 해 나 역시 무리에 합류를 했다.

    * * *

    타지크 국왕의 집무실.

    “어서 오세요 양현호 참사관, 그리고 요리사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국왕님도.”

    “저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타지크 국왕은 오랜만에 만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기본적인 것은 미리 보고가 되어 있는 상황.

    인사가 끝나자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새로운 인원 한 명의 비자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죠?”

    “네 맞습니다.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는 이유가 아무래도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해서 힘을 못 쓰는 것 같습니다.”

    타지크 국왕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모양.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하는 회사와 이런 큰 사업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요?”

    “네?”

    “처음부터 요리사 몫의 비자를 내어 달라고 했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몇 년이나 진행할 공사에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단 게 실망스럽네요.”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형태건설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기업입니다. 이번 작은 문제만 해결이 되면 결과물은 만족스러울 겁니다.”

    타지크 국왕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형태건설이 훌륭한 기업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그 기업을 선택한 게 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런 부분은 조금 미숙하더라도 본래 업무는 잘 해낼 수 있는 기업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문제라뇨?”

    “타지크의 비자 제도는 다른 나라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타지크 국왕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 타지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내어 주는 비자는 일 년에 그 개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개수가 정해져 있다고요?”

    “네 일 년에 딱 300명에게만 일을 할 수 있는 비자를 내어 주고 있습니다. 양현호 참사관은 잘 알지 않습니까.”

    “네 근데 여태껏 한 번도 그 300명을 채운 적이 없지 않나요?”

    타지크에는 양질의 일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세계적인 기업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일 년에 300명에게만 내어 주는 비자가 한 번도 모자란 적이 없었다.

    발급 기준이 까다로운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수요가 많지도 않았다.

    “근데 올해는 철도 공사 관련해서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비자를 요청해서 이미 300명이 꽉 찬 상황입니다.”

    “네? 정말요?”

    이건 양현호 참사관 측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타지크의 비자가 전부 발급된 건 한 번도 전례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한 명 정도는 국왕님 재량으로 비자를 내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게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현재의 비자 제도를 전부 손대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어요.”

    타지크 국왕은 비서를 불러 가장 빨리 만료되는 비자의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물었다.

    “오늘부터 91일 후 만료되는 비자가 3개 있습니다.”

    “91일 후요?”

    거의 3개월 후에나 새로운 비자를 신청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3개월이면 너무 긴데….”

    “원활한 사업을 위해 도와주고 싶지만 이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타지크 국왕과 양현호 참사관은 동시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국왕님의 힘으로도 안 되는 거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군요. 그러면 잠시 공사를 중단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지금 상태로 강행해서 추후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단 늦는 게 나을 테니.”

    “중단이요? 상태가 그 정도입니까?”

    공사가 중단된다는 말에 타지크 국왕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한국인들이 밥에 이렇게 진심일 줄은 몰랐겠지.

    하루라도 더 빨리 공사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몇 달 동안 중단하는 건 뼈아팠다.

    “잠시만요 비서님.”

    “네 국왕님.”

    타지크 국왕은 다시 한번 비서를 불러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였다.

    “장덕수 요리사님.”

    “네 국왕님.”

    “요리사님이 가지고 계신 여권은 외교관 여권인가요?”

    “외교관 여권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관용 여권입니다.”

    “그러면 타지크에 무비자로 머무를 수 있는 기간도 동일하구요?”

    “네 30일입니다.”

    국왕은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결심한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러면 제가 요리사님에게 드렸던 특별 비자를 반납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반납이요?”

    “네 그 특별 비자 역시 300인에 포함되는 비자였기 때문에 요리사님이 그 비자를 직접 포기해 주시면 다른 사람이 새로 비자 하나를 더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음….”

    국왕의 제안에 섣불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당장 여행을 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받아 보는 특별 비자를 덜컥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는 요리사를 위해서….

    “타지크와 한국의 대의를 위해선 선뜻 내어 줘야 하는데 제가 그리 대인배는 아닌가 봅니다. 영광스러운 이 타지크 비자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네요.”

    나의 대답에 타지크 국왕의 입꼬리가 슬쩍 하고 올라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보다 타지크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거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요?”

    주저하는 날 위해 타지크 국왕은 다시 한번 제안을 했다.

    “내년이 되면 비자 인원이 새로 리셋이 될 테니 그때 다시 요리사님에게 특별 비자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실 수 있나요?”

    “네 그 정도는 국왕 재량으로 가능합니다. 그럼 장덕수 요리사가 무비자로 머무를 수 있는 30일 동안 새 요리사를 채용할 수 있나요?”

    국왕은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양현호 참사관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비자 문제만 아니면 어떻게든 그 시간 안에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양현호 참사관님만 믿겠습니다.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잠시만요.”

    난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두 사람을 막아섰다.

    “참사관님 새 요리사 채용을 28일 안으로 마무리해 주실 수 있나요?”

    “28일요? 남은 2일은 뭐 하시게요?”

    “가능하다면 저희를 배려해 주신 국왕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저한테요?”

    타지크 국왕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네 저희 쪽 문제인데 무작정 부탁만 드릴 수는 없죠.”

    “장덕수 요리사가 그렇게 해 주기만 한다면 저는 무조건 좋습니다. 저희 아이들 역시 아직도 장덕수 요리사의 음식에 대한 얘기를 하곤 합니다.”

    “정말입니까? 그것도 참 영광입니다.”

    양현호 참사관 역시 옆에서 흐뭇한 미소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는 일이 바빠서 당장 타지크에 올 시간이 없어서 비자를 내어 주는 거지만 내년엔 반드시 그 특별 비자를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철도가 놓인 타지크의 식문화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기억하고 싶었다.

    * * *

    파나르 대사관.

    “아니 무슨 재료를 이렇게 많이 챙겨 갑니까?”

    “많긴요. 한국인 직원들이 10명이나 있다는데, 그 사람들 매일 저녁밥 챙겨 주려면 이 정도는 금방이죠.”

    “와아 저도 타지크 현장에 아르바이트하러 갈까 봐요.”

    커다란 트럭 하나를 빌려서 넉넉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식재료를 구매했다.

    하루에 딱 한 끼.

    형태건설의 새 요리사가 오기 전까지 한국인 직원들을 위해 저녁 한 끼만 해 주기로 약속하고 타지크로 출장을 떠나는 날이었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데 심심하지 않겠어요? 인터넷도 잘 안 터진다는데.”

    “말동무할 사람이 10명씩이나 있는데 뭐 문제 있겠어요?”

    “그렇긴 해도 젊은 사람들은 허전할 텐데.”

    “사실 이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아는 선배 중에 남극 세종 기지로 파견 간 분이 계신데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온전히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심야 식당이나 남극의 셰프처럼 하루 중 직원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나 역시 요리에 집중할 수 있지만 음식을 먹는 자들 역시 온전히 음식의 맛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요리사로서 꼭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한참 동안 못 보는데 좀만 참아 주세요.”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참아 보겠습니다.”

    능청을 떠는 김준우 서기관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