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5화 (116/202)
  • 115. 공사의 시작

    카차이 호수.

    “영걸 대사님. 파키스탄 부임하시고 휴가 가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렇게 가만히 쉬는 것도 불안하긴 하네요.”

    “허허허 그럼 돌아가시겠어요?”

    “그럴 순 없죠.”

    승재가 덕수와 바라보던 똑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지평선 대신 수평선을 보며 두 사람은 밤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물고기를 잡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사색에 잠겨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을 뿐.

    김용수 대사는 영걸에게 마음의 여유를 주고 싶었다.

    카차이 호수엔 파도도 치지 않아 완전히 고요한 상태였다.

    “근데 선배님 성격이 참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랑요?”

    “네 그때랑은 완전히 정반대죠.”

    “그때는 뭐 저도 젊었으니까. 영걸 대사님처럼 열정이 넘칠 때였죠.”

    “하하 그래 보이나요? 다행이네요.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열정이 없어 보일까 봐 신경 쓰였는데.”

    “굉장히 열심히 하고 계세요 영걸 대사님은. 본부에서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김용수 대사는 막냇동생을 위로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을 했다.

    “맞아요. 저 지금 죽을 듯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휴우….”

    영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보니깐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꼭 맞는 거 같지는 않더라구요.”

    “맞습니다. 저도 그건 아주 공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배신했던 노력이라도 결국엔 제 편이더라구요.”

    “네? 그게 무슨 말이신가요?”

    김용수 대사는 흔들리는 낚싯대를 잡아챘다.

    “노력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타이밍은 사람마다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계속 미끼를 바꿔 주고, 낚싯바늘을 물에 담가 주기만 하면 결국 누구나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몰라요. 똑같은 시간에 낚싯대를 담갔다고 똑같은 시간에 물고기가 잡히지는 않죠.”

    “…….”

    “영걸 대사님이 지금까지 한 노력은 언젠가 결국 돌아올 겁니다. 제가 장담할게요. 그러니 지금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영걸은 김용수 대사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의 산증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직원일 때처럼 일하려 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 같은 공관장들이 할 일은 젊은 직원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뒤에서 적극 지원해 주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막아 주는 정도만 하면 됩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김용수 대사는 잡힌 물고기를 놓아준 뒤 새로운 미끼를 끼워 낚싯대를 던졌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걸의 낚싯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걸은 김용수 대사와 낚싯대를 번갈아 가며 한 번씩 쳐다본 뒤 가벼워진 표정으로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그럼 선배님만 믿어 보겠습니다.”

    * * *

    파나르 공항.

    “김용수 대사님. 덕분에 잘 쉬다가 갑니다.”

    “저도 심심할 뻔한 휴가였는데 덕분에 잘 놀았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영걸과 승재에게 차례대로 악수를 건넸다.

    휴가 기간 동안 따로 시간을 보냈지만 두 사람 사이는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승재 형님. 조심히 가시고 또 놀러 오세요.”

    “그래 덕수야. 다음에는 파키스탄으로 한번 놀러 와. 맛있는 거 해 줄게.”

    “맞아요. 김용수 대사님하고 한번 놀러 오세요.”

    승재의 말에 옆에서 영걸이 한마디 더 거들었다.

    갑작스레 계획된 휴가였지만 서로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연락할게, 덕수야.”

    “네 형님.”

    출국장으로 나란히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두 사람 이제는 많이 가까워질 것 같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래도 우리만큼은 아닐 거예요. 그렇죠?”

    “당연하죠. 이런 관계를 만드는 게 쉬운 게 아니죠.”

    나와 김용수 대사는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 승재와 영걸이 아무리 치고 올라온다 해도 김용수 대사와 나의 케미를 밀어낼 순 없을 테니까.

    “바로 사무실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요. 김준우 서기관이 곧 여기로 올 거예요.”

    “공항에요?”

    “네 마중할 사람이 있어서요. 장 셰프도 같이 있다가 같이 저녁 먹고 갈래요? 별로 바쁜 거 없죠?”

    “저야 뭐 대사님이 있으라고 하면 있는 거죠.”

    마침 승재와 영걸을 파키스탄으로 돌려보낸 날 파나르로 손님이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파나르가 아니라 타지크로 향하기 전 파나르를 경유하는 거였지만.

    “장 셰프도 전혀 관련 없는 일은 아니니깐 같이 기다렸다가 인사하고 가요.”

    “네 알겠습니다. 누가 오시는 건가요?”

    “형태건설의 새로운 법인장이요.”

    양현호 대사 대리와 타지크 국왕이 체결한 철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사업을 따낸 형태건설의 새로운 법인장이 타지크로 부임하는 날이었다.

    “원래 양현호 참사관이 파나르까지 오기로 했었는데 도저히 일정이 안 나와서 공항엔 우리가 나와 주기로 했어요.”

    “드디어 공사를 시작하는군요.”

    이런 커다란 사업에 내가 숟가락을 얹었단 사실에 뿌듯해졌다.

    공사가 시작되면 내가 신경 쓸 일은 없겠지만 어떤 사람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할지 궁금하긴 했다.

    타지크 국민들을 향한 국왕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헉헉, 대사님 아직 법인장님 안 나오셨죠?”

    “네 아직이요. 이름표는 챙겨 왔어요?”

    “여기 있습니다.”

    김준우 서기관이 법인장 이름이 석 자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공항으로 뛰어왔다.

    최근 들어 할 일이 많아진 김준우 서기관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서기관님 요즘 많이 바쁜가 보네요.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여요.”

    “대사관이 제자리를 찾아가니깐 일이 바빠지네요. 민원도 많이 들어오고요.”

    “그렇겠네요.”

    다른 나라 대사관들도 전부 정상화가 되었고, 잠시 줄어들었던 교민들 역시 이전보다 더 많이 늘어나 있었다.

    겨우 5명뿐인 대사관이 감당해 낼 업무의 양을 넘어서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김 서기관. 본부에 인원 보충을 요청해 놨으니 곧 대답이 올 겁니다.”

    “네 대사님. 웬만하면 해 보겠는데 요샌 진짜 벅차네요.”

    “그만큼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의미겠죠.”

    “네 맞습니다.”

    김준우 서기관은 숨을 고르며 입국장 앞으로 나섰다. 들고 있는 이름표가 잘 보이도록.

    “어? 저기 저분이신가 보네요.”

    이름표를 보며 다가오는 중년의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파나르 대사관에서 나오셨죠?”

    “반갑습니다 법인장님, 파나르 대사 김용수입니다.”

    한눈에 봐도 인자한 얼굴을 한 형태건설의 법인장.

    찰나였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기왕이면 큰 트러블 없이 사업이 진행되면 좋은 거니까.

    “여기까지 마중 나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원래는 양현호 참사관이 오기로 했었는데 일이 조금 바빠서요. 타지크에선 양 참사관이 직접 안내할 겁니다.”

    “누가 마중 나오는 게 뭐 중요한가요.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하죠.”

    김용수 대사는 법인장과 몇 마디 나눠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일종의 공기업 대표나 다름없는 대사와 사기업의 대표인 해외 법인장들은 서로 협조할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성격이 까다롭거나 예민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서로 얼굴을 자주 붉히게 된다.

    일단 형태건설의 법인장은 겉으로 봐서 크게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시간이 애매하니깐 타지크는 내일 오전에 출발하시고 오늘은 저희와 저녁 식사를 같이하시고 호텔에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혹시 파나르 음식 괜찮으신가요? 여기에 오셨으니 이 나라 음식을 드셔 보시는 것도 괜찮을 텐데.”

    아무리 가까운 나라긴 해도 다시 오는 게 쉽진 않을 테니 파나르 음식을 권했다.

    피자나 파스타처럼 유명한 음식이 아니어도 한국인들 입맛엔 잘 맞는 음식들이 많았으니.

    “혹시 한식당은 없습니까?”

    “한식당이요? 물론 있죠? 한식으로 드시겠습니까?”

    “네 제가 한식 말곤 잘 먹지를 못해서요.”

    “그럼 한식당으로 가시죠. 파나르엔 한식당이 많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 한국 음식을 먹었을 텐데도 또 한식을 찾는 법인장이었다.

    타지크에는 이런 한식당도 하나 없다는 것을 알고 온 걸까.

    해외로 몇 년 동안 파견된 법인장이니 그 정돈 각오하고 왔겠지 뭐.

    “그럼 이 차에 타시죠.”

    우리는 파나르 시내에 있는 상섭의 한식당으로 법인장을 데리고 갔다.

    최근에 한식당이 많이 오픈했지만 상섭의 한식당은 명실상부 파나르 최고의 한식당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파나르인들에게도 인정받고 있었다.

    “한국 식당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여기가 파나르에서 최고로 음식을 잘하는 곳입니다.”

    “그렇군요. 기대가 되네요.”

    법인장은 배가 고팠는지 메뉴판을 들고 이것저것 음식을 시켰다.

    올 때마다 많은 음식들을 시켜 주니 상섭은 대사관 직원들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법인장님 많이 출출하셨나 봅니다. 많이 주문하셨네요.”

    “하하 제가 식사량이 좀 많은 편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한국 음식을 워낙 좋아해서 항상 푸짐하게 차려서 먹는 편입니다.”

    “사모님께서 고생 좀 하셨겠네요.”

    “그래서 이번에는 절대로 따라가지 않겠다고 신신당부를 해서 결국 혼자 왔습니다.”

    “하하하 현명하셨네요.”

    한 상 가득 음식을 시키고도 모자랐는지 몇 가지를 더 추가로 주문한 법인장이었다.

    다행히도 상섭의 음식 맛이 입에 맞았는지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잘 먹었습니다. 오히려 웬만한 한국 식당들보다 훨씬 낫네요. 이런 식당만 있으면 외국에서 몇 년을 살아도 거뜬하겠어요.”

    “하하 저도 저희 요리사랑 이 한식당 덕분에 잘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아 요리사요? 대사님의 요리사 실력도 굉장하신가 보네요.”

    “이 식당 못지않죠.”

    “정말요? 부럽습니다. 타지크에도 이런 식당이 하나쯤은 있겠죠?”

    한껏 기분이 올라온 법인장의 얼굴을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다.

    타지크엔 아예 한식당이 존재하질 않다는 사실을 굳이 미리 알 필욘 없지.

    “타지크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자주 놀러 오세요.”

    “허허 일이 시작되면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여튼 잘 지내 봐야죠.”

    그렇게 법인장은 기분 좋게 타지크로 넘어갈 수 있었다.

    곧 한국에서도 직원들이 슬슬 들어올 거고, 본격적인 철도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 * *

    몇 주 후 파나르 대사관 사무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고요한 사무실에서 이메일을 확인하던 김준우 서기관의 눈이 커졌다.

    읽어 보지 않아도 단번에 귀찮은 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협조 공문?”

    타지크 분관에서 날아온 이메일이었다.

    협조를 요청한다는 공문.

    본부를 거치지 않고 오는 협조 공문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번거로운 일임은 확실했다.

    내용을 읽어 보니 형태건설이 타지크에서 대망의 첫 삽을 떴지만 업무의 진전이 너무 더디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인 직원과 법인장의 향수병 때문에 현지 인부들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것.

    향수병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사님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네 들어오세요.”

    김준우 서기관은 공문 한 장을 인쇄해 김용수 대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몇 주 전 파나르를 들렀던 법인장이 심한 향수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 법인장님 겉으로 보기엔 다 쉽게 적응할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음식도 안 가리고 잘 먹는 거 같더니 아닌가 봅니다.”

    “공사 기간 동안 한국 음식을 해 줄 식당을 찾아 달라는 말인 거죠?”

    “네 맞습니다. 소위 말하는 함바집 같은 걸 운영해 줄 식당을 찾는 것 같습니다.”

    함바집은 공사장 근처에 임시로 천막을 치거나 컨테이너 등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의미한다.

    철도 공사를 하고 있는 한국 직원들을 위해 함바집을 운영해 줄 한식당을 찾아 달라는 공문이었다.

    “타지크에선 한국 음식 맛보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니깐 향수병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요. 타지크 분관에는 요리사도 없잖아요.”

    “제대로 된 한식을 먹으려면 파나르로 오는 거 말곤 별수가 없겠네요.”

    법인장이 처음부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법인장뿐만 아니라 한국인 직원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주말 동안이라도 한식을 먹는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마저도 일이 바빠 파나르로 넘어오는 게 힘들었다.

    형태건설의 본사에 요청을 해 봤지만 현지에서 식당을 구해서 해결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럼 일단 파나르에 있는 한국 식당에 연락을 돌려 볼까요?”

    “그래야죠. 공문까지 보내왔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김용수 대사의 지시로 파나르에 있는 모든 한식당에 연락을 돌렸다.

    꽤 많은 돈을 제시했지만 그 어느 식당에서도 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타지크에선 식재료 조달도 힘들고, 거기까지 가는 건 쉽지 않다네요. 하려고 나서는 식당들이 없어요.”

    “단 한 군데도 없어요? 좀 더 조건을 높이면 할 것 같은 곳도요?”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위험하기도 하니 굳이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네요.”

    “그렇겠죠.”

    김용수 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양현호 참사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대사님.

    -그래 양현호 참사관. 다름이 아니라 보내 준 협조 공문 때문에 연락했네.

    -네 대사님. 혹시 어떻게 되었나요?

    -거기까지 가겠다고 나서는 한식당이 없네.

    -그렇죠? 아무래도 쉽지 않죠.

    양현호 참사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예상한 듯 곧바로 수긍했다.

    -형태건설 본부에 요청을 해 놓긴 했는데 새로운 요리사를 뽑고, 서류들을 준비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거 같아요. 그 전에 여기 직원들 다 관두고 한국 돌아갈 것 같은데요.

    -그래? 현장이 많이 힘든가 보네.

    -생각했던 것만큼 타지크가 큰 나라도 아니고, 공사 현장엔 진짜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음식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 힘든가 봐요.

    -그렇겠구만.

    -뭐 어쩔 수 없죠. 공사를 중단하는 한이 있더라도 좀 기다려야죠. 이대로는 제대로 진행이 안 되니까요.

    김용수 대사는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근데 대사님. 혹시 장덕수 요리사한테 도움을 좀 청해 볼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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