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4화 (115/202)
  • 114. 이게 나의 요리야

    “청와대? 어린데 꿈이 대단하다. 근데 실력만 봐선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

    “에이 아직 멀었어요.”

    실력이야 그때 만난 조근배 청와대 요리사와 당장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문제였다.

    나이가 곧 실력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으니까.

    “나이가 아직은 너무 어려서 기회조차 없을걸요.”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 실력이 이렇게 좋은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형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냥 나이만 먹게 놔두긴 아까운데.”

    승재는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최고의 한식당에서 15년이나 구른 자신을 꺾은 인재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덕수야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도움이요? 무슨 도움이요?”

    “너 정담 주방장 출신들이 얼마나 쟁쟁한지 알고 있지?”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정담의 주방장 출신 요리사들은 곳곳에서 활약하거나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 안에서 그들의 힘은 굉장했다.

    “내가 처음 정담에 들어갔을 때 계시던 주방장님이랑 아직도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거든.”

    “아직도요? 대단하시네요.”

    “그분이 파키스탄 대사관도 추천해 주신 거야.”

    “그러면 이제 원수 아닙니까?”

    “에이. 우리 대사님 너무 미워하지 마. 욕을 해도 나만 할 거야.”

    “하하 알겠어요.”

    승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여튼 그 주방장님이 조근배 요리사 선배야.”

    “조근배 요리사요?”

    “너도 기억나지? 이번에 심사 위원 했던 청와대 요리사.”

    “당연히 기억나죠.”

    역시 요리사의 세계는 그리 넓지 않다.

    게다가 한식만 10년 이상 했던 사람들이라면 한 다리만 걸치면 거의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분한테 말해서 덕수 너 추천 좀 해 주라고 할게.”

    “정말요?”

    뜻밖의 수확이었다.

    조근배 요리사의 선배 그리고 현역 조근배 요리사의 지인이 된 김상현 주방장님.

    그 둘의 추천이 있다면 나이를 거스르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순수 실력으로만 뽑으면 안 될 것도 없지. 그리고 파나르에서 3년 정도 일하면 의전이라든가 귀빈들을 대하는 것도 충분히 익숙해지겠지.”

    “그렇죠. 그럼 앞으로 종종 연락하고 지내시죠 형님.”

    “그거 아니면 연락도 안 하려고 했어?”

    “에이 그건 아니죠.”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과 시시덕거리다 보니 6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도 금세 도착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왔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여기야? 아무것도 없는데?”

    이곳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반응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의 진짜 가치를 알면 또 한 번 찾아오고 싶어질 것이 분명했다.

    “왈왈!”

    차에서 지나를 먼저 내려 주자 격하게 짖어 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잠시 있었던 것뿐인데 모두 기억이 나나 보다.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커다란 대문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지나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잡내가 하나도 없는 양고기 수프를 알려 준 요리 연구가이자 주인아줌마가 나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뒤따라 나오는 또 한 사람.

    역시나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조금 심심했던 것 빼고는요.”

    능숙하진 않지만 많이 익숙해진 파나르어로 인사를 건넸다. 이 사람 덕분에 파나르에서의 내 생활이 술술 풀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승재 형님. 인사하세요, 여기는 파나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식 블로거입니다.”

    “반갑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온 이승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는 지마라고 합니다.”

    능숙한 영어로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재능과 노력이 합쳐진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요리 실력은 물론이고, 이미 영어까지 섭렵해 놨으니.

    나보다 나은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지마 씨 덕분에 제가 파나르에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죠.”

    “그럴 리가요. 요리사님 음식이 워낙 맛있었으니 그런 기사를 쓴 거죠.”

    상섭의 한식당이 오픈한 이후 지마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지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걸 수도.

    “지마가 여기 주인아주머니랑 아는 사이인지는 몰랐어요. 덕분에 오랜만에 만나게 돼서 좋긴 하지만.”

    “아나 씨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죠. 특별한 소재가 없을 땐 항상 여기에 와서 아나 씨와 한참 동안 대화를 하다 가요. 영감이 생기거든요.”

    요리 연구가 아나.

    주인아주머니의 이름이었다. 파나르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지마와 아나가 서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때 양고기 수프에서 받은 충격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지마 역시 파키스탄 요리사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꼭 만나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이승재 씨는 저처럼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일하시는 요리사예요.”

    “같이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파키스탄 가 본 적은 없지만 정말 관심 가는 나라예요.”

    “그래요? 파키스탄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그냥 음식 몇 가지만 알고 있는 정도죠.”

    두 사람에 대해 설명을 해 주자 승재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새로운 장난감을 받아 든 아이처럼 순수하게 밝아진 표정이었다.

    “휴가 기간 동안 맛있는 거나 해 먹고 푹 쉬다가 가세요. 숙박비는 파키스탄 요리 알려 주는 걸로 대신 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가겠습니다.”

    승재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이거였다.

    파키스탄에서는 시장 외에 거의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는 승재.

    물론 파키스탄에서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음식이나 식재료가 널렸겠지만 세상에 얼마나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

    나도 제대로 실력 발휘한 승재의 음식을 먹어 보고 싶기도 했고.

    “덕수야. 여기가 저번에 홍보 영상에 나왔던 곳 맞지? 아나라는 분도 그때 영상에서 너랑 대화하던 분이고.”

    “네 맞아요. 그거 형님도 보셨구나.”

    “당연히 봤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요?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나와 아나가 대화를 나누던 영상은 각국 공관으로 전해졌었다. 승재 역시 그 영상을 봤었고, 영걸에게 비교를 당해 좀 속상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영상에 나온 내용은 너무 흥미로워 여러 번 돌려 봤다는 승재였다.

    “파키스탄에서도 양고기 많이 먹죠?”

    “네 당연히 많이 먹죠. 근데 냄새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 양고기로 요리를 한번 해 보세요.”

    승재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나가 건넨 양고기로 요리를 시작했다.

    양파며 당근이며 여러 가지 채소들은 전부 아나가 직접 기른 것들이었다.

    “이 감자 색깔이 되게 특이하네.”

    “한국의 돼지감자 같죠? 근데 맛은 좀 더 포슬포슬하고, 달콤해요.”

    “그럼 그냥 쪄 먹어도 맛있겠네.”

    “저희 파나르에서는 소곱창이랑 이 감자를 같이 푹 쪄서 먹는 걸 최고라 여겨요.”

    “소곱창이랑요?”

    “네 소곱창에서 나온 기름을 감자가 머금어서 감자는 더욱 맛이 좋아지고, 곱창은 담백해지죠.”

    “아! 한국에서도 곱창을 구워 먹을 때 감자를 같이 구워 먹기도 하죠.”

    “그런가요?”

    옆에서 아나와 지마의 한마디 한마디가 보태질수록 승재의 칼질 소리엔 더욱 흥이 났다.

    “그럼 이 소곱창으로도 카레를 만들어 볼게요.”

    보랏빛이 나는 파나르의 감자를 큼직하게 썰어 넣어 파키스탄식 양고기 카레와 소곱창 카레를 즉석에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카레 가루를 쓰는 게 아니라 향신료들을 직접 갈아서 만든 가람마살라라는 가루를 이용해서 카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식 카레에는 요거트가 꼭 들어가요.”

    “저희 파나르에는 낙타젖으로 만든 유제품이 있는데 이 소곱창 카레엔 그걸 한번 써 보겠어요?”

    “낙타젖이요?”

    “네 혹시 먹어 보셨어요?”

    “아뇨 처음입니다.”

    승재의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생전 처음 보는 식재료들에 놀란 것도 있지만 그것들을 맛보느라 입이 쉬질 못했다.

    “이 시골에 없는 재료가 없네, 덕수 너는 이런 곳을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대사관 직원 덕분에 우연히 알게 되었죠. 그 후론 틈틈이 연락드리며 지냈던거구요.”

    “이야….”

    모자란 재료는 그냥 텃밭에서 뜯어서 사용하면 되고, 창고에 가면 없는 재료가 없었다.

    승재는 아나의 허락을 받고, 거의 모든 조미료를 맛보고 있었다. 더 이상 혀가 제대로 된 맛을 느끼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멈출 수 있었다.

    “이건 파키스탄식 양고기 카레고, 이거는 대회 때도 보여 줬지만 화덕에 구운 감자빵. 한번 드셔 보세요.”

    “이 감자빵이 화덕에 구우니깐 훨씬 맛있어 보이네요.”

    “응 대회 때는 어쩔 수 없이 후라이팬에 구웠지만 여기 이렇게 좋은 화덕이 있는데 안 쓸 순 없지.”

    아나의 집 마당에는 손수 만든 커다란 화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삭사울을 가득 넣어 온도를 높이면 500도까지는 거뜬한 수제 화덕이었다.

    “파나르에서 주로 사용하는 장작인 삭사울이란 나무예요. 다른 나무들보단 숯 향이 좀 더 강해서 감자빵 맛이 어떨진 모르겠네요.”

    “삭사울? 그건 또 무슨 나무야….”

    승재는 화덕에 사용한 장작도 다르단 사실에 서둘러 자신이 만든 감자빵을 입에 넣었다.

    “와아…. 이게 도대체 무슨 향이야. 감자빵 풍미가 2배는 좋아진 것 같은데.”

    “숯 향이 참 특이하죠?”

    “빵도 빵이지만 여기에 삼겹살 구워 먹으면 진짜 끝내주겠다.”

    “저희는 벌써 먹어 봤죠.”

    승재의 말에 아나와 지마가 나서서 대답했다.

    “정말요?”

    “장덕수 요리사가 알려 주고 갔죠. 삼겹살 후에 먹는 김치찌개까지요.”

    “와아… 정말.”

    지마는 감탄하는 승재의 표정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승재는 엄지를 번쩍 들어 올려 준 뒤 다시 숟가락을 집었다.

    “이제 메인 요리도 한번 드셔 보시죠.”

    “파키스탄식 카레 기대되네요.”

    “저는 오히려 갑자기 만든 이 곱창 카레가 더 기대되는데요.”

    승재의 아이디어에 지마와 아나의 의견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소곱창 카레는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거 대박인데요? 인도나 파키스탄 카레는 굉장히 맵고 자극적이라고 들었는데.”

    “종류가 많죠. 원래는 좀 더 자극적으로 가람마살라를 만들지만 오늘 양고기 잡내가 없다고 하도 많은 말을 들어서 좀 부드럽게 만들어 봤어요.”

    “소곱창 카레도 맛이 독특하네요. 아나 씨 말대로 감자랑도 잘 어울리고요.”

    “승재 씨 요리 실력이 기본적으로 굉장히 좋네요.”

    우리들의 반응에 신이 난 승재는 음식을 다 먹기도 전에 또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형님 또 뭐 하시게요?”

    “다른 파키스탄 요리도 알려 줄게 잠시만.”

    “이거 다 드시고 해요. 우리 휴가 온 거예요. 아직 시간 많으니깐 천천히 하시죠.”

    “허허 그런가? 오랜만에 너무 신이 나서 좀 오버했네.”

    자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어나서 음식을 만드는 게 요리사들이다.

    재밌게만 할 수 있으면 피곤함쯤은 얼마든지 잊고 할 수 있었다. 승재는 장시간 차를 타고, 시차도 적응 안 된 상황이지만 지금 그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덕수야.”

    “네 형님.”

    아나가 직접 담근 쿠므스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 갔다.

    “이런 곳에 데리고 와 줘서 너무 고맙다.”

    “덕분에 저도 맛있는 파키스탄 음식 맛볼 수 있었는데요 뭘.”

    “세상은 도대체 얼마나 넓은 걸까. 또 얼마나 많은 음식과 식재료들이 있을까.”

    승재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과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구석의 시골에도 엄청난 실력자들이 숨어 있는데 세상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걸 만들고 있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요리는 정말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더 많이 알고 싶어. 더 많은 것을 해 보고 싶고.”

    “저도 그래요.”

    승재는 뭔가 다짐한 듯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목표가 하나 생겼다 덕수야.”

    “뭔데요?”

    “너처럼 파키스탄에서 내 이름 한번 날려 보는 거.”

    승재는 남아 있는 쿠므스를 전부 털어 넣었다.

    “이번에 널 보면서 많이 느꼈어. 김용수 대사님이랑도 스스럼없이 지내고,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도 인맥을 만들어 이어 가고 있잖아. 나는 한국에서도 파키스탄에서도 내가 일하는 곳 빼곤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거야 뭐 운이 좋아서 그랬던 거죠.”

    “이런 건 능력이 좋다고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요리를 하고 싶다는 계획은 일단 변함이 없어. 근데 나도 먼저 파키스탄에서 내 이름을 알려야겠어. 그것도 요리사로서.”

    파키스탄보다 훨씬 넓은 영토의 파나르 구석구석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나처럼 자신도 파키스탄에서 유명한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승재였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싫어서 한국을 떠났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우물을 옮긴 것뿐인 삶을 살고 있었네. 널 보니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어.”

    “원래 살던 곳을 떠나는 것만도 대단한 거죠.”

    “이제 내 진짜 능력을 보여 줄게. 여태 너무 주눅 들어서만 지냈던 것 같다. 갑자기 파키스탄의 내 주방이 너무 좁게 느껴지네. 더 큰 곳으로 나와야겠어.”

    “그러면 너무 좋죠.”

    “기다려라 덕수야. 다음 분기 최우수 공관은 우리 파키스탄 대사관이 될 거니까.”

    “쉽진 않을 겁니다.”

    영걸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승재의 이런 변화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승재가 본래 성격을 되찾아 제 실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방심할 수 없는 상대가 되는 것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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