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2화 (113/202)
  • 112. 일정 변경

    “파나르 대사관에요?”

    “네 파나르가 정국만 안정적이면 아주 볼거리가 많고 여유롭거든요. 특히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건 다 갖춘 관광지입니다.”

    “이거 좀 혹하는데요?”

    “저렴한 고기와 술값, 멋진 풍경, 낚시, 여유로운 분위기 등등. 여성분들이 좋아하는 이쁘고, 감성적인 매력은 좀 부족하지만 아저씨들이 좋아할 만한 건 다 있습니다.”

    “그럼 와이프한테 말해서 일정을 좀 바꿔 봐야겠군요.”

    영걸이 아내가 같이 온다 해도 함께 시간을 보내 줄 김용수 대사의 아내는 없었다. 조금 아쉽겠지만 혼자서 방문하는 편이 더 나았다.

    “혼자 오시기 좀 심심하시면 파키스탄 요리사하고 같이 오세요.”

    “저희 요리사요? 갑자기 요리사는 왜요?”

    “이번 요리 대회 때 저희 요리사랑 파키스탄 요리사하고 친해졌다고 하더라구요.”

    “정말요? 그거참 반가운 소리네요.”

    “네. 저희 요리사가 파키스탄 요리사 칭찬을 얼마나 하던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서로 그런 얘기도 합니까? 저희 요리사는 잘하긴 하는데 2등 했다는 말 말곤 아무 말도 안 했었는데.”

    “여튼 한번 물어나 보시죠. 같이 오시면 저희도 좋을 것 같아서요.”

    “네 알겠습니다. 저희 요리사는 아마 거부하진 않을 겁니다. 한 번도 No라고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요.”

    파키스탄 요리사가 얼마나 속앓이를 하며 지냈을지 단번에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다.

    * * *

    늦은 오전.

    오랜만에 늦잠 좀 푹 자 보려 했는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에 잠이 깨 버렸다.

    그러나 전화에 뜬 이름을 보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용수 대사님이 나한테 직접 전화를 건 적은 없었는데.

    -여보세요 장 셰프. 일어났어요? 휴가라서 늦잠 자려는데 제가 깨운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하 늦잠 자려고 했던 건 맞는데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네요. 근데 저한테 직접 전화를 다 하시고, 무슨 일이세요? 회의는 잘 마무리하셨어요?

    -이 말은 장 셰프한테 직접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신가요?

    김용수 대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는 회의 끝나고 2주 정도 푹 쉬다가 돌아가려 했는데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회의만 끝내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근데 왜요?

    갑자기 일정을 바꾼 김용수 대사의 신변에 무슨 큰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파키스탄 대사님이랑 같이 갈 거예요.

    -파키스탄 대사님이랑요? 파나르에요?

    -네 그리고 그때 장 셰프가 말한 파키스탄 요리사도 같이 오라고 부탁해 놨어요.

    -정말요?

    김용수 대사가 무슨 의도로 파키스탄 요리사까지 초대한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몇 달 동안 승재가 신경이 쓰여 계속 찜찜했었는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잘하셨어요 대사님. 정말 잘하셨어요.

    -근데 내가 장 셰프 휴가를 하루 이틀 정도 뺏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당연히 괜찮죠. 어차피 멀리 가려던 계획은 다음 주라서 문제없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곧 봐요.

    미친 소리 같겠지만 김용수 대사가 일찍 돌아오겠단 소리를 듣고도 조금 반가웠었다.

    이런저런 일상을 나눌 사람이 사라지니 심심했었으니까.

    그런데 승재까지 파나르에 온다니.

    반가운 손님이 몰려오는 것 같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 * *

    파나르 대사관저.

    “어서 오세요 대사님.”

    “장 셰프 미안해요. 휴가 일정을 갑자기 이렇게 바꿔서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특별히 할 것도 없었는데요.

    “젊은 사람이 할 게 없다는 것도 문제네요.”

    “그만 놀리시죠 대사님.”

    나와 김용수 대사가 나누는 농담을 듣고 파키스탄 대사와 승재는 인사도 하기 전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가워요 장덕수 셰프. 파키스탄 대사 최영걸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용수 대사와는 정반대의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형식적이지만 아주 정석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 승재에겐 격한 포옹을 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요리사님 잘 지내셨어요?”

    “저는 당연히 잘 지냈죠. 덕수 씨도 잘 지내셨어요?”

    “네 저야 휴가 못 간 것 빼곤 다 잘 지냅니다. 승재 씨도 그렇죠?”

    가벼운 농담에도 대사의 눈치를 보는 승재와 흐뭇하게 우릴 쳐다보는 김용수 대사의 표정이 대조되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오늘은 관저가 아니라 그냥 저희 집으로 초대한 거니까 편하게 지내다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나라에서까지 대사가 찾아왔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을 순 없었다.

    김용수 대사가 일찍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벼운 식사 정도만 준비했다.

    “장 셰프. 하루만 고생해 줘요. 내일부턴 계획한 휴가 갔다 와요. 나랑 영걸 대사님은 며칠 동안 낚시하러 갈 거예요.”

    “고생이라뇨. 다 농담이었던 거 아시죠?”

    “우리 사이에 뭐 그 정도 가지고.”

    이틀 정도는 두 사람 다 관저에서 지내며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내 휴가를 미루면서까지 이렇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파나르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 김용수 대사에게서 따로 전화가 걸려 왔었다.

    파키스탄 요리사도 함께 가기로 했으니 우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 주자고.

    진짜 또래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는 나와 김용수 대사의 사이를 보며 파키스탄 대사도 뭔가를 느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압박과 부담을 주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란 것을.

    “그럼 식사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향하는 나와 달리 승재는 쭈뼛거리는 모습이었다.

    “승재 씨 여기로 오세요. 식사하셔야죠.”

    “대사님들이랑 같이요?”

    “당연하죠.”

    “따로 먹으면 안 되나요?”

    같이 먹으면 체할 것 같다는 심정을 알지만 그럴 순 없었다. 대사님이란 존재는 괴물 같은 사람이 아니다. 평소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냥 아저씨일 뿐이다.

    “4명밖에 안 되는데 무슨 상을 따로 차려요. 여기로 앉으세요.”

    “네….”

    어색해 보이는 건 승재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도 겸상을 해 본 적 없던 영걸 역시 이 상황이 어색해 보였다.

    “김용수 대사님은 종종 요리사랑 식사도 하십니까?”

    “네 보통 아침은 같이 먹는 편이고, 점심이나 저녁도 시간 될 때마다 같이 먹어요.”

    “정말요?”

    “네 저는 대사님 덕분에 밥값도 아끼고,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그러죠. 두 분은 같이 식사 안 하세요?”

    “저희는 특별히….”

    승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애써 밥을 삼키고 있었다. 파키스탄에서만큼은 아니어도 아직은 불편한 기색이었다.

    대사와 밥을 같이 먹는 것도 신기한데 말동무라니.

    승재는 예, 아니오 말고는 다른 단어를 써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근데 이 소금통은 뭔가요?”

    “말 그대로 소금통이죠. 음식이 좀 싱거울 때 소금 좀 넣어 먹으라고 갖다 놨죠.”

    “만찬 때도 이걸 올려놓나요?”

    “그럼요? 우리 요리사의 입맛이 모두를 맞춰 줄 순 없으니까요.”

    “혹시 손님들이 불쾌해하진 않나요?”

    영걸이 이 평범한 소금통을 의아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귀빈들을 초대해 놓고, 간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요리를 내놓는다는 건 본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글쎄요. 불쾌했던 적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대놓곤 표현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렇군요.”

    “사람마다 또 나라마다 식성이 다르니깐 본인들이 원하면 뭐든 더 추가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어요.”

    영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도 파나르 대사관은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었으니.

    일반 레스토랑이었다면 자신의 요리에 소금이나 재료를 추가하는 걸 불쾌해하는 요리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귀빈들에게 모든 포커스가 맞춰진 대사관에서라면 그런 행동들이 전부 허용이 된다.

    사실 중요한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이 정도는 만찬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김용수 대사는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는 음식이 조금 싱거우면 요리사한테 화를 내기도 했는데…. 이쁜 소금통 하나 사 놓으면 되는 거였군요.”

    술도 한 잔씩 들어 가며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얘기들이 오가니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내내 불편해하던 승재의 표정도 이제는 풀린 것 같았다.

    “영걸 대사님은 주량이 진짜 대단하시네요.”

    “저요? 저는 사실 술 없으면 못 사는 사람입니다. 근데 우리 대사관에는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어요. 다들 주량이 턱도 없이 부족해서.”

    “안지용 참사관님이 파키스탄으로 가셨어야 하는데.”

    “하하하 그러게요. 근데 파키스탄 요리사님도 제법 술을 드시는 거 같은데요? 보드카가 만만한 술이 아닌데 주는 족족 드시고 계세요.”

    “그래요?”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승재도 제법 많은 보드카를 마셨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우리 요리사님도 술 좀 드세요?”

    “저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근데 왜 여태 말 안 했어요?”

    “그냥 말할 기회가….”

    영걸은 반갑다는 듯 승재에게 술잔을 건넸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승재가 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몰랐던 건가.

    두 사람은 그 정도로 교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아 진작에 알았으면 우리 요리사하고 가끔 술이나 한잔할걸.”

    “하하 아닙니다.”

    “이제 알았으니 종종 마시면 되죠.”

    “선물받은 좋은 위스키가 있는데 혼자 먹긴 버거워서 아직 못 열고 있었어요. 파키스탄 돌아가면 같이 한잔해요.”

    “네 알겠습니다.”

    영걸과 승재는 생애 처음으로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장 셰프. 저 밥 좀 더 주실래요?”

    “밥이요? 새로 한 밥은 없는데.”

    “얼려 둔 밥 없어요? 그거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얼려 둔 밥이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란 영걸과 승재였다. 이번엔 승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매 끼니 새로 밥을 짓지 않고요?”

    “네 저희는 밥솥에 2인분 밥만 하면 맛이 없어서 좀 넉넉히 해서 얼려 두고 먹어요.”

    “그러면 맛이….”

    “생각보다 괜찮아요. 드셔 보실래요?”

    승재는 당연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고, 영걸 역시 파키스탄이었다면 용납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갓 지은 밥을 얼리면 냄새도 안 나고 괜찮아요.”

    “그러네요. 오히려 찰기도 있는 것 같고.”

    “큰 밥솥에 적게 밥을 짓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을걸요?”

    두 사람은 별다른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새로 짓는 밥이 무조건 맛있을 줄 알았는데.

    영걸은 매번 새 밥을 요구했던 게 조금 과했단 생각이 든 것 같았다.

    “식사 다 하셨으면 과일 좀 드세요.”

    “과일 좋죠.”

    마지막으로 커다란 접시에 듬성듬성 썬 과일을 상에 올렸다.

    보통 만찬에는 작은 접시에 각각 과일을 서빙하지만 이렇게 큰 접시에 담아 편하게 먹게 해 주기도 했다.

    모자란 사람은 리필 요청을 하지 않아도 되고, 과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음식을 남기지 않아도 되니까.

    무조건 격식을 차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다.

    “만찬 때도 과일을 이렇게 내세요?”

    “필요하면요.”

    “저는 제가 먹는 과일도 작은 접시에 따로 담아 먹었는데, 저희 요리사 연습도 시킬 겸.”

    “어허…. 좀 과하셨군요 대사님.”

    “그런 것 같네요.”

    “저희 대사님 평소에 드시는 과일은 그냥 플라스틱통에 가득 담아 놓으면 알아서 꺼내 드시는데….”

    영걸은 머쓱해졌다.

    처음 공관장이 되어서 대접받고 싶었던 욕망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니 일상에서도 격 떨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을 거다.

    그리고 매번 긴장을 하고 있어야 정작 중요할 땐 실수를 하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승재가 얼마나 숨 막히는 일상을 살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장 셰프. 잠깐 둘이서 얘기 좀 나눌래요? 나는 영걸 대사님하고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그렇게 하시죠. 승재 씨 저희는 이 방으로 갈까요?”

    “네 알겠어요.”

    김용수 대사와 나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덕분에 승재와 단둘이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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