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1화 (112/202)
  • 111. 공관장 회의

    “제안이요?”

    나는 임시로 대표직을 수락한 후 곧바로 제안을 했다.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제안을.

    “네 오늘 테오 덕분에 맛있는 음식 먹었으니깐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 몇 명이 설거지하는 거 어때요?”

    “설거지요?”

    설거지라는 말에 요리사들을 일제히 싱크대로 고개를 돌렸다.

    꽈 많은 인원과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한 덕에 설거짓거리는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 진짜 지기 싫다.”

    “먹을 땐 좋았는데 역시 요리사로 살면서 설거지와 인연을 끊는 건 불가능한가 봐요.”

    “난 설거지 안 하는 요리사가 있다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어. 전설 속에나 있으려나.”

    말로는 그렇게 해도 베테랑 요리사들의 설거지 실력은 두말할 것 없이 꼼꼼하고 빠를 것이다.

    “괜찮아요. 손님들한테까지 설거지를 시키는 법이 어딨어요.”

    “아닙니다 우리 모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좋은 제안이었어요. 이렇게 더욱 친해지는 거죠.”

    “저도 좋아요. 까짓거 하기 싫으면 이겨야죠.”

    “맞습니다. 빨리 서두르시죠. 혹시나 지면 후딱 하고 가게.”

    “가위, 바위, 보!”

    중년의 요리사들은 가위바위보 하나에 아이들처럼 기뻐하고, 좌절했다.

    설거지 당번으로 뽑힌 3명의 요리사뿐만 아니라 모든 요리사들이 달려들어 주방은 금세 정리가 될 수 있었다.

    역시 국적에 관계없이 주방에서 함께 땀을 흘리는 사이는 금세 가까워지는 법인가 보다.

    들어올 땐 높아만 보이던 프랑스 대사관저의 담벼락이 이제는 고풍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 * *

    파나르 대사관 관저.

    “푹 쉬셨어요 대사님?”

    “나야 뭐 먹고 마신 거 말곤 한 게 없는데요. 장 셰프는 좀 쉬었어요?”

    “네 다행히도 가위바위보를 이겼거든요.”

    “가위바위보요?”

    김용수 대사에게 어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 주었다. 테오에 비해 준비한 음식도 간단했고, 설거지 담당까지 피할 수 있어서 그리 피곤하진 않았다.

    “하하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나 봅니다. 미슐랭 레스토랑의 셰프 같은 사람들은 뭔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주방에선 그럴 수 있지만 결국 똑같은 사람이죠. 셰프로선 항상 긴장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장 셰프도 나중에 진짜 셰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땐 무서운 사람이 될지 궁금하네요.”

    김용수 대사는 내가 셰프의 자리를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당연히 셰프로서 내 성격이 어떤지도 모를 테고.

    “뭐 저는 너그럽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럴 거 같긴 합니다. 워낙 차분하고, 성격이 침착해서.”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셰프로서의 내 모습은 그리 화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소리를 칠 때도 있었지만 최대한 너그럽고 인자한 주방장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후배들이 진짜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저 다음 주에 한국 좀 다녀올 예정입니다.”

    “한국이요? 혹시 공관장 회의에 가시나요?”

    “네 맞아요. 제 인생 첫 공관장 회의네요.”

    말 그대로 공관장들만 모이는 회의라 김용수 대사는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을 거다.

    종종 대사 대리 업무를 맡거나 분관, 출장소 등 규모가 작은 공관의 책임자를 맡아도 참석하긴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그런 경험도 없었다.

    “긴장되시겠네요.”

    “조금은요. 전 세계 공관장들 한자리에서 만나는 거잖아요. 대통령 내외분들까지.”

    그저 각자가 맡고 있는 공관들의 현황을 보고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일 뿐이지만 규모가 상당했다.

    처음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파나르 대사관의 성과가 단연 1등이니깐 기죽지 마시구요.”

    “하하하 이상하게 위안이 되네요. 근데 장 셰프는 내가 한국에 가 있는 기간 동안 뭘 하려구요?”

    “저요? 아직 생각 안 해 봤습니다.”

    “휴가 기간이 꽤 기니깐 잘 한번 생각해 봐요.”

    “네 알겠습니다. 알차게 보내도록 해 보겠습니다.”

    “갈 곳은 있어요?”

    “글쎄요. 아직 계획한 건 아니지만 식도락 여행을 가 볼까 합니다.”

    “식도락이요? 역시 요리사들은 휴가 때도 음식부터 떠오르나 봅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파나르에서 좀 더 욕심이 생긴 건 맞다.

    윤아와 맛집 친구를 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모자랐다. 파나르엔 또 어떤 미지의 음식들이 있을지 알고 싶어졌다.

    “대사님도 조심히 다녀오시고, 오랜만에 친구분들도 만나고 오세요.”

    “네 그럴게요. 장 셰프가 해 준 음식만 먹다가 이제 다른 사람들 음식은 못 먹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에이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모르긴 몰라도 김용수 대사는 이번 공관장 회의때 단연 주인공이 될 것이다.

    요리 대회를 나갔을 때도 파나르 대사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요리사들 사이에서도 우리 대사관이 유명해졌는데 공관장들 사이에서 김용수 대사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껏 기분 좋게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나저나 나는 어디를 가 볼까.

    이곳에 와서 처음 받아 본 긴 휴가인 만큼 알차게 그리고 여유롭게 쓰고 싶었다.

    일단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건 정해졌고,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테마로 여행을 떠날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 * *

    외교부 본부 회의실.

    김용수 대사는 마른 헛기침을 한 뒤 회의실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많은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먼저 와 있던 공관장들은 김용수 대사의 얼굴을 보고 상황 파악 중이었다.

    “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한 명의 인사를 시작으로 다른 공관장들 역시 스멀스멀 김용수 대사에게로 몰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이태리 대사입니다.”

    “저는 말레이시아 총영사입니다.”

    “선배님 얼굴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아아 반가워요 모두들.”

    역시나 덕수의 예상대로 김용수 대사를 향한 관심은 시작부터 뜨거웠다. 파나르 대사관이 이룬 일들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어서겠지.

    김용수 대사는 긴장되어 경직되었던 몸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다들 자리에 앉아 주세요. 장관님 들어오십니다.”

    3일간 이뤄지는 공관장 회의였다.

    첫날은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새로운 인물들이 있는지 탐색하는 정도.

    장관의 주도하에 공관장들은 일일이 정식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는 파키스탄 최영걸 대사입니다.”

    “아! 파키스탄 대사님. 안녕하십니까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저에 대해서요? 저는 별다른 성과를 낸 게 없는데요.”

    “없다니요. 이번 재외 공관 요리사 대회에서 대사님의 요리사가 수상하지 않았습니까.”

    김용수 대사와 마찬가지로 처음 공관장 자리를 맡은 파키스탄 대사는 그의 말에 표정이 밝아졌다.

    김용수 대사는 나이와 경력이라도 많아 다른 공관장들이 쉽게 보지 못했지만 파키스탄 대사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외교부 내에서 그렇다 할 입지를 다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번 회의 땐 최대한 많은 인맥을 만드는 것이 목적.

    먼저 말을 걸어 주고, 파키스탄 대사관에 대해 알고 있는 선배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근데 혹시 나 기억 안 나요?”

    “네? 아 저….”

    김용수 대사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음에도 형식적인 대답만 하는 영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오래전 일을 꺼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허허허 아니에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안 날 법도 하죠. 한 10년 전쯤이긴 한데 우리 본부에서 한 1년간 같이 일한 적 있어요.”

    “!!!!”

    왠지 모르게 편안한 김용수 대사의 목소리에 영걸은 잠시 동안 옛 기억에 잠겼다.

    공관장으로 부임해야 할 차례지만 몇 년째 본부에만 머무르고 있는 한 사람이 번뜩 떠올랐다.

    “아! 그 본부 지키미 선배님.”

    “이제 기억이 나나요? 근데 본부 지키미? 그게 제 별명이었나요?”

    “죄송합니다. 그땐 그냥 다른 분들이 부르는 대로 따라 부르느라.”

    “이해합니다. 그땐 본부 지키미가 맞았죠. 그렇게 자리만 지키다 은퇴를 했으니.”

    영걸은 자신이 한 말실수 덕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본부 지키미였던 김용수 대사는 기억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파나르 대사인 김용수 대사는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선배님.”

    “같이 일했던 걸 기억도 못 해 놓고서 이제 와서?”

    “그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하하 농담이에요. 이렇게 공관장 자리에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네요.”

    “선배님도 늦었지만 공관장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덕분에 잘 즐기고 있습니다.”

    영걸은 비록 실수를 했지만 요즘 본부에서 가장 유명한 김용수 대사와 우연한 인맥이 있다는 것이 더 반가웠다. 잘 이용하면 좋은 조언도 듣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근데 뭔가 말투도 많이 변하신 것 같네요. 제가 기억하던 선배님은 말투도 성격도 급하셨던 것 같은데.”

    “하하하 잘 기억하고 있네요. 그땐 그랬었죠. 많이 급한 게 맞았으니까.”

    김용수 대사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입사를 하고 몇 년이 지나자 점점 동기들과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부터였다.

    남들보다 더 빠르고, 임팩트가 센 성과를 내야겠다는 생각에 실수도 많이 하고,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그땐 후배들이 오히려 차분히 하라고 조언을 해 줄 정도였으니.”

    김용수 대사의 자조 섞인 말에 영걸은 별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동의한다는 의미기도 했고.

    “그래도 대사님은 동기들보다 몇 년 빠르게 파키스탄 대사로 부임된 거죠?

    “네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부담스럽긴 하네요. 좀 더 내공이 쌓인 후 와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나이가 들어서 그 자리에 앉는다고 달라질 건 없더군요.”

    자꾸 실수했던 일들만 떠올라 하루하루가 아쉬웠던 영걸이었다.

    김용수 대사만큼은 아니었더라도 동기들과 같이 공관장의 자리에 앉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자주 하는 편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처음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 같아요. 나도 여기서 매일매일 후회하고, 자책하는 게 일상이거든요.”

    “대사님도 그렇습니까? 하하하 너무 공감되네요. 동기들이라도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고, 정보도 공유하고 그럴 텐데 물어볼 곳도 없고, 좀 벅차네요.”

    영걸은 김용수 대사의 한마디에 안심이 되었다.

    자기보다 훨씬 경력 많고, 나이도 많은 김용수 대사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파나르 대사관은 요즘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곳이 아닌가.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먼저 꺼내 본 적 없었는데 김용수 대사가 먼저 꺼내 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많이 힘들죠? 당연히 그럴 겁니다.”

    영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김용수 대사의 위로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서 박혔기 때문이다.

    자기도 누구와 비교해도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 자기가 엘리트라 생각했고, 모든 것을 잘 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맡은 공관장의 자리는 만만치 않았다. 원하는 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아 짜증만 늘고 있었다.

    “대사님은 이미 자신의 엄청난 능력을 증명해 낸 사람입니다. 동기들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빨리 공관장 자리에 앉았으니까요.”

    “그거야 뭐. 지금부터가 중요하죠.”

    “늦게나마 공관장 자리에 앉아 보니 이 자리는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진심을 다해야 좋은 성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높이 올라가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넓고 깊게 가야 하는 자리니까요.”

    “네?”

    김용수 대사가 그랬다.

    현역 때는 그렇게 되고 싶던 공관장을 하지 못했는데 퇴직 후에 우연한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잘 해내야겠다는 아무런 동기는 없었다.

    그저 3년 무사히 떼우다가 오자라는 생각 정도.

    처음엔 물론 힘들었지만 어느새 부담 없이 이 자리를 즐기니 남들보다 앞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걸 대사님은 이미 누구보다 훌륭한 외교관입니다. 조금은 내려놓고 그 일에 임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공관장이 예민하면 대사관 전체가 피곤해지는 법이거든요.”

    “피곤해져요? 저 때문에요?”

    “모두가 젊은 대사님의 눈치를 보며 지내겠죠. 직원들도 요리사들도 또 운전 기사들도요. 모두가 한 팀이 되어야 하는데 다들 대사님 속도에 맞추려니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을 테고.”

    영걸은 김용수 대사의 말에 빠르게 지난날을 곱씹어 보었다.

    본래 짜증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는데 공관장이 되고 난 후부터 소리를 치는 날이 많았다.

    처음엔 자기도 미안해서 사과를 건넸지만 그런 일이 잦아지니 짜증 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걸의 직원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불편했겠지.

    영걸은 자조 섞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겠네요. 직원들이 힘들었겠네요. 더 좋은 방법을 찾기보다 내가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만 제시했겠죠. 그렇지만 그걸 깨닫는 게 쉽지 않네요.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예민해지니까요.”

    “그렇죠. 차근히 배워 가는 거죠.”

    “이럴 때 좀 보고 배울 곳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대사님처럼 여유롭고 능숙한 공관장들의 업무 방식을요.”

    영걸의 본성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반성하고 변화하려고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변에 이런 상황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동기들은 일찍 승진한 자신을 질투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고, 딱히 알고 지내는 선배들도 없었다.

    “저 영걸 대사님.”

    “네 대사님.”

    “이번 공관장 회의 때 휴가도 쓰신 거죠?”

    “네 한 2주 정도 쉽니다. 대사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럼 괜찮으면 저희 대사관에 한번 와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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