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0화 (111/202)
  • 110. 진정한 승자

    원하는 맛을 구현해 줄 사람이 없었으니 직접 요리를 배웠던 마크 대사의 아버지.

    덕분에 마크 대사는 한국에 몇 번 가 보지도 않았지만 한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네 물론이죠. 아버지는 한번 시작한 일을 절대 중간에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때 먹었던 음식은 물론이고, 수십 개의 한국 음식을 만들 줄 알게 되셨어요.”

    “오 정말입니까?”

    너무 능숙해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지 마크 대사는 젓가락질도 굉장히 편해 보였다.

    “그럼 전쟁 때 한국에서 드셨던 음식이 도대체 뭔가요?”

    H호텔에서도 알아내지 못했던 정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음식에 대한 기억을 직접 들을 수 없었으니 그냥 추측해서 만든 것뿐이다.

    어떤 음식이길래 죽기 전까지 기억이 날 정도로 생각났던 걸까.

    “아버지가 맛있게 드셨던 음식은 이것입니다.”

    “이 수프요?”

    주위에서 마크 대사의 얘기에 집중하던 대사들이 놀라서 그릇을 집어 들었다.

    “이 고기를 담갔다 뺀 것 같은 밍밍한 수프요?”

    “네 맞습니다. 이 밍밍한 고깃국물과 뚝뚝 끊어지는 이 반죽. 이겁니다. 이걸 여기서 다시 맛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들 허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내심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내가 진짜 이 맛을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그냥 추측으로 만들어 봤을 뿐이었는데.

    “아버지가 기억하고 계신 수프의 맛과 거의 일치합니다. 음식을 만들고 나면 항상 저에게 맛보라고 하셔서 확실히 기억합니다. 사실 이 찐 감자는 매일 아침 식사로 먹을 정도로 자주 먹었고, 이 개떡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개떡도 알고 계시다고요?”

    “네 물론이죠. 이 허브의 향, 분명히 기억합니다. 공원에서 직접 캐 오기까지 하셨는데요.”

    아까 개떡을 먹은 마크 대사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미국에서 먹었던 익숙한 향이 파나르에서도 느껴지니 물어봤던 것이다.

    냄새는 항상 기억과 동반한다.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 그때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쑥 향을 맡은 마크 대사는 주방에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음식을 제대로 구현해 내신 거면 아마 돼지머리를 사용했겠죠?”

    “네 맞습니다.”

    이번 질문은 나 대신 테오가 대답을 했다.

    테오의 표정은 당혹스러움보다 감동을 한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통에 겨우 돼지머리 하나로 국물을 낸다길래 아직 경험이 부족한 요리사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스토리가 담겨 있었군요.”

    “하하하.”

    별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다.

    사실 기술적인 측면이나 맛으로 봤을 땐 그리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으니.

    “전쟁 중에는 식량이 부족했을 테니 어렵게 구한 이 돼지머리를 온 마을 사람이 나눠 먹으려면 이렇게 묽게 끓일 수밖에 없었겠네요.”

    “맞습니다. 여기 모이신 귀한 분들에게 어울리는 요리는 아니지만 오늘 주인공인 마크 대사님을 위해 이런 음식을 준비해 봤습니다.”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표정이었다.

    마크 대사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비록 저희가 총탄이 오가는 전쟁통에서 만난 것은 아니지만 각자 자신의 나라를 위해 애쓰고 있는 처지인 것은 같죠. 전쟁을 함께 전우들처럼 이 음식들을 먹고 파나르에서 함께 협력해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건배!”

    “건배!”

    마크 대사의 뛰어난 리더십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셰프 장. 여기로 와서 건배해요. 저분들보다 우리가 오히려 더 전쟁터가 가깝잖아요.”

    “맞아요. 대사님들은 입으로만 싸우지만 우린 진짜 칼 들고 불꽃이 튀는 곳에서 일하니까요.”

    “하하하 그렇네요. 건배하시죠!”

    “건배!”

    다른 요리사들은 물론이고, 테오 역시 기분 좋게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허접한 음식을 내서 분위기가 망가지면 어쩔까 고민했었는데 김용수 대사의 든든한 지원 덕에 이런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음식의 스토리는 다 알았고, 승부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승부요?”

    “네 환영회는 환영회고 승부는 또 승부니까요.”

    “맞습니다. 저는 이태리 대사와 또 따로 내기를 했단 말입니다.”

    원래는 이 자리는 마크 대사의 환영회 겸 테오와 나의 대결이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흘러갔지만 결판은 지어야 했다.

    “좋습니다. 각자 자기가 가진 무기로 싸운 거니 공평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렇죠?”

    나와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토리는 비록 부족했지만 테오는 자신의 요리에 자부심이 굉장했다. 맛이나 모양으론 절대지지 않을 거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반면 나의 음식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음식이었다. 대신 그 음식을 대접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음식이었고.

    외교의 일부분인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대사관 요리사이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럼 다들 더 맛있었던 음식을 적어 투표를 해 주시면 됩니다.”

    작은 종이 하나씩을 건네받은 대사들과 요리사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와 테오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이름을 적어서 투표했다. 우리에게 비밀이란 건 없었다.

    “자 투표가 끝이 났습니다.”

    마크 대사는 자신의 환영회에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는 게 흥미로운 듯 줄곧 즐거운 표정이었다.

    “자 그럼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요리라면 단연 1등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미슐랭 셰프라는 엄청난 업적을 쌓은 요리사 테오, 그리고 나이는 어리지만 파나르에서 굉장한 성과를 내며 떠오르고 있는 신예 장덕수 셰프. 과연 두 사람의 대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하하 빨리 발표해 봐요.”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엔 권위적이고, 무거운 분위기의 대사들도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오늘 대결의 승자는 미슐랭 셰프인 테오입니다!”

    “와아아아.”

    압도적인 표 차이로 테오의 승리였다.

    김용수 대사와 나는 예상했다는 듯 진심으로 테오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표 차이가 너무 심해서 몇 표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어린 셰프의 미래를 밟을 순 없으니까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앞으로 노력해서 더욱 훌륭한 요리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득표 수를 알려 주진 않았어도 그 말의 내용은 전혀 배려해 주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쾌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나 역시도.

    그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전교에서 1등을 하는 친구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놀린다고 해서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누가 진짜 승리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스터 장 그리고 엠버서더 김, 잠시 얘기 좀 하실까요?”

    “네 쥴리앙 대사님.”

    만찬이 마무리 될 때쯤 쥴리앙 대사가 나와 김용수 대사를 따로 불러냈다.

    “두 사람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군요. 저번에 무례했던 일까지도.”

    “아닙니다. 저번에 충분히 사과하셨잖습니까.”

    “겉으로만 했던 거죠….”

    쥴리앙 대사는 자신이 한 행동이 창피해 죽겠다는 듯 몇 번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어 갔다.

    “그때 그렇게 넘어간 건 작고 힘없는 나라와 싸우면 내 수준 역시 그렇게 낮아질 거란 생각으로 너그러운 척을 했던 겁니다.”

    “…….”

    김용수 대사도 여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이 대결을 수락한 것도 사실 우리 프랑스가 넘을 수 없는 벽이란 보여 주기 위한 마음도 담겨져 있었죠. 겉으론 너그러운 척하면서 말이죠.”

    쥴리앙 대사는 속에 담긴 말을 전부 쏟아 내고 있었다. 아는 형에게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

    “근데 오늘 미스터 장이 준비한 음식들을 보고 내가 얼마나 겉멋만 든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쥴리앙 대사님의 업적은 누구보다 훌륭하십니다.”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쥴리앙 대사 역시 꽤 굵직굵직한 업적을 이어 가고 있는 유망한 외교관임은 확실했다.

    “보여 주기에 좋은 일들만 했으니까요.”

    “네?”

    “진짜 상대방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은 없었어요. 어차피 저는 프랑스라는 대국을 등에 업고 일을 진행하니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좀 더 수월했겠지만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거다.

    “근데 파나르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1년 만에 이렇게 자리를 잡았는지 보니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엠버서더 김.”

    “네 대사님.”

    쥴리앙 대사는 마음의 짐이라도 내려놓은 사람처럼 환한 표정으로 악수를 건넸다.

    “앞으로 잘 좀 가르쳐 주세요. 저는 파나르에서 역대 최고의 프랑스 대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하하하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충분히 잘 해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미스터 장.”

    “네 쥴리앙 대사님.”

    “나중에 우리 관저에 와서 한 번 더 요리를 해 줄 수 있나요? 그땐 기억이 아닌 기술로.”

    “네 물론이죠. 제대로 실력 발휘해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김용수 대사는 이렇게 또 든든한 후방이 생긴 셈이었다. 자주 만나자는 말을 뒤로하고 쥴리앙 대사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김용수 대사 역시 어깨를 몇 번 쳐 주더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미스터 장.”

    “장 셰프. 오늘 음식 훌륭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진짜 승자는 테오인데요?”

    테오가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다들 알겠지만 진짜 오늘의 승자는 내가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압도적으로 테오가 이겼는데.”

    “하하하. 오늘 미스터 장에게 잘 배웠습니다.”

    “저도 미슐랭 세프의 요리 잘 배웠습니다. 첫 만찬이었는데 어땠어요?”

    요리를 마친 후 테오의 표정은 영혼이 나간 사람 같아 보였다.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린 듯한 모습.

    오늘 만찬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여기가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보다 훨씬 전쟁터네요.”

    “그렇죠? 쉽지 않죠?”

    “네 사실 일할 때 보조들에게 욕도 많이 하고, 서버들도 무시하고 그랬었는데.”

    테오의 반성에 다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일반적인 레스토랑에선 주방의 맨파워가 조금 더 센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음식을 나르는 서버들에게도 쓴소리를 하는 셰프들이 많았다. 테오 역시 그중에 한 명이었을 테고.

    “그거 하나 하는 게 뭐 어렵냐고 자주 핀잔을 줬었는데.”

    “쉽지 않죠?”

    “네 나도 예전에 다 했던 일인데 왜 전부 잊어버렸을까요.”

    “하하하 한국의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는 말이 있어요.”

    “딱이네요. 저는 개구리.”

    팀으로 움직이는 호텔이나 레스토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을 것이다.

    음식 준비부터 서빙까지 그리고 셰프로선 거의 손대지 않았을 설거지까지 해야 하니 완전 다른 세상이었을 거다.

    “미스터 장, 그리고 다른 셰프님들. 우리 자주 만납시다. 대사님들처럼 자주 만나서 음식 얘기도 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것도 돕고 그러죠.”

    “좋습니다. 안 그래도 파나르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심심했는데 좋죠.”

    “저도 찬성입니다.”

    테오의 제안에 요리사들은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다. 다들 말은 안 했어도 이런 모임이 생기길 바랐던 것 같다.

    이렇게 모일 기회가 없었으니 대화를 나눠 볼 기회도 없었겠지.

    이참에 모두가 연락처를 나누고 정기적인 모임을 계획했다.

    “자 그럼 파나르 요리사 모임의 초대 회장은 미스터 장이 하는게 어떻습니까?”

    “저요? 먼저 제안한 테오가 하는 건 어때요?”

    “나는 적응하느라 정신없을 거예요. 안 돼요.”

    “그래도 제가 나이가 제일 어린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미스터 장이 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하죠. 다음에 정식으로 규칙 정해서 뽑을 때까지만.”

    “와아아아.”

    졸지에 요리사 모임의 대표 자리까지 떠안게 되었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하하하 비록 임시 대표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대표가 된 오늘 제가 여러분들께 제안 하나를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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