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철옹성 같은 문
당시에 호텔에서는 최고의 재료들을 사용해서 음식을 대접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쟁 음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음식이 나왔을 테고.
김상현 주방장이 말해 준 그때의 기억을 최대한 이용해 맛을 재현해 보려 했다.
근데 그 재료들을 구할 수 있을는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재료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사용해야지.
파나르에서는 이미 이런 상황이 흔했으니까.
* * *
프랑스 대사관저.
“프랑스 대사관은 마치 감옥에 들어가는 거 같네요.”
“그렇죠? 보안이 굉장히 철저해요. 그만큼 서비스도 안 좋기로 유명하죠.”
5미터 가깝게 세워진 대문과 철책.
전체적으로 회색빛이 도는 건물.
그 위에 찰싹 붙어 있는 삼색의 국기.
모르고 이곳을 지나갔더라면 절대 대사관저라고 생각은 못 했을 거다.
담벼락이 낮아 잘 관리된 잔디와 마당을 밖에서도 들여다볼 수 있는 한국 대사관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보기가 그렇네요.”
“이해는 돼요. 워낙 사건 사고가 많이 생기는 곳이라 그런 거 같아요.”
프랑스 대사관은 파나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대사관답게 크고 작은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사생활을 1등으로 생각하는 프랑스인들은 차라리 이런식으로 최대한 노출을 줄이는 것을 선택했다.
자국민들과 많은 소통을 해야 할 대사관이 생긴 것부터 이렇게 폐쇄적이라니.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상식 자체가 달랐다.
“들어가시죠 장 셰프.”
“네 알겠습니다.”
철옹성 같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나마 사람 냄새가 나는 관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게 따뜻한 태도로 우릴 반겨 주는 쥴리앙 대사와 그의 아내.
“어서 오세요, 엠버서더 김.”
“안녕하세요, 쥴리앙 대사.”
“이쪽이 그 대단한 요리사인 셰프 장?”
“반갑습니다. 장덕수입니다.”
쥴리앙 대사는 볼을 부딪치는 프랑스식 인사를 건넸다. 이름 전체는 아니었지만 나를 장이라고 부르는 성의를 보여 주었다.
‘생각보다 안 까칠한데요?’
나는 한국말로 김용수 대사에게 쥴리앙 대사의 첫인상에 대해 속삭였다.
‘무슨 괴물이라도 나올 줄 알았어요? 공식적인 자리에선 티를 내지 않을 겁니다.’
‘대사님이 그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요.’
김용수 대사는 내 반응이 웃기다는 듯 피식하며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쥴리앙의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알 수 있었다. 수십 년간 단련된 가식적인 표정이라는 것을.
툭 치면 눈물이 흘러나오는 베테랑 배우들처럼 기쁘지 않아도 기쁜 척, 반갑지 않아도 반가운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두 분이서 무슨 재밌는 얘기를 속삭이시나요? 제 욕하신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럴 리가요. 겉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관저가 참 이쁘답니다.”
“그렇죠? 우리 프랑스 사람들은 사생활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아무리 대사라고 해도 누군가 내 집을 훔쳐보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아요.”
“그렇겠죠.”
김용수 대사 역시 그 말에 공감했지만 한국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았다.
또 본인 성격으로도 그렇게 사는 건 힘들었고.
맘 같아선 넓은 마당을 교민들에게 상시 개방을 하고 싶다는 김용수 대사였다.
“엠버서더 김은 저랑 차나 한잔하시고, 셰프 장은 저쪽이 주방이니 가 보시면 됩니다. 제 셰프도 열심히 준비 중이니.”
“감사합니다.”
다른 대사들은 저녁 시간에 맞춰 방문할 예정이었다. 나와 김용수 대사는 이곳에서 요리를 해야 하니 오전부터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 * *
프랑스 대사관 주방.
“안녕하세요. 장덕수라고 합니다. 그냥 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반가워요. 테오라고 합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어라, 미슐랭 레스토랑의 셰프 출신이랬는데 생각보다 젊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30대 후반이나 40대를 갓 지난 것 같은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였다.
“파나르에서 많은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대사관 요리사가 처음이니 많이 배우겠습니다.”
“아…. 미슐랭 레스토랑 셰프 출신이라면서요. 오히려 제가 배우겠습니다.”
우린 능숙하진 않지만 서로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곧 요리를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전 세계 주방에서 쓰는 용어들은 전부 같았으니까.
게다가 프랑스어로 된 주방 용어도 많았기에 주방 안에서 소통은 문제가 없었다.
나 역시 호텔에서 유명 외국인 셰프들과 협업을 한 적도 많았고.
그리고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언어를 능숙하게 못해도 외국인이 두렵지 않게 된다는 것.
이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부터 음식을 만들려면 바쁘죠? 당신의 주방이 아니니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내가 다 찾아 줄게요.”
“고맙습니다.”
역시 척하면 척이었다.
별다른 잡설을 접어 두고 일단 요리부터 준비하자는 테오.
오히려 이런게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센스였다. 이 나이에 미슐랭 레스토랑 셰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면 엄청난 천재일지도 모른다.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큰 통이랑 냄비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통이랑 냄비? 이 정도면 되나요?”
“음… 더 큰 냄비는 없을까요?”
“더 큰 거? 오케이 잠시만요.”
테오는 지하로 내려가더니 커다란 냄비를 가지고 올라왔다.
“스톡을 끓이려고 샀는데 여기선 이렇게 큰 게 필요가 없더라구요.”
“하하하 그렇죠. 여기선 손님이 많아 봤자 20명 정도니까요.”
호텔의 양식당이나 레스토랑에선 커다란 냄비에 스톡이라 불리는 일종의 육수가 하루종일 끓고 있다.
마치 한국의 국밥집처럼.
밀려드는 손님도 많고, 만들어야 할 음식도 많았으니 이런 큰 냄비가 필요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대사관 요리사는 상황이 달랐다.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혼자서 모든 음식을 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네요.”
“하하하 그 말에 너무 동의해요. 팀으로만 움직이다가 이렇게 하려니깐 어려웠어요.”
보통은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음료 등등 각 분야별로 주방 인원들이 나눠져서 하나의 연회를 완성해 내는 게 정석이다.
근데 이 대사관 요리사는 테이블에 포크, 스푼을 올리는 세팅까지 직접 해야 하니.
셰프로 일한 기간이 긴 요리사라면 더더욱 힘들 것이다.
“잠시만 좀 쓰겠습니다.”
“와우 이건 뭐예요? 돼지머리?”
커다란 냄비에 물을 가득 채우고, 핏물을 뺀 돼지머리 하나를 넣었다.
돼지머리는 파나르 시장에서 헐값에 구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파는 곳은 거의 없었지만 버리려고 뒤로 빼 둔 돼지머리를 싸게 구할 수 있었다.
“이걸로 스톡을 만들 거예요.”
“특이하네요. 근데 제가 한국 요리는 잘 모르지만 이 정도의 물에 이 돼지머리 하나로 스톡의 충분한 맛이 날까요?”
역시 금세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채는 테오였다.
이 정도로 큰 냄비에 돼지머리 꼴랑 하나로는 깊은 맛을 낼 수 없었다. 잡뼈나 사골 등을 넉넉히 추가해야 그럴싸한 고깃국물이 우러나온다.
하지만 오늘 음식은 그렇게 깊은 맛이 나는 국물이 필요 없었다.
“오늘은 음식은 물을 많이 넣어야 해요. 그래야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거든요.”
“많은 사람?”
테오는 당장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고기는커녕 뼛조각 몇 개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전쟁통.
어렵게 구한 돼지머리 하나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나눠 먹으려면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가득 넣고, 끓여 내는 수밖에 없었다.
진한 사골은 고사하고, 고기의 냄새만 나도 산해진미 못지않았을 테니까.
김상현 주방장님의 말을 곱씹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마크 대사의 아버지가 말하는 담백한 고깃국물의 맛은 담백이 아니라 멀겋게 끓인 국물이었을 터.
호텔에서 진하게 끓여 낸 사골국과는 거리가 멀었을 거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네 저는 이거면 됩니다.”
“그래요?”
바쁘게 손을 움직이랴 나를 챙기랴 정신이 없는 테오의 수고를 덜어 줘야겠다.
내가 준비한 음식은 이 국물 요리 하나가 거의 끝이었다.
한 가지 더 준비하긴 했지만 그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면 저는 할 일이 많이 남아서 집중 좀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줘요.”
“정말요? 그럼 이 채소들 좀 일정한 두께로 썰어 주시겠어요?”
“라따뚜이?”
“네! 맞아요.”
대결도 대결이지만 오늘 만찬은 미국 대사의 환영 행사였다.
서로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줘야지.
나도 처음 왔을 땐 혼자서 모든 요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같은 처지에 놓은 동료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다 했어요.”
“오 굉장하네요. 아주 좋아요. 그럼 미르푸아 좀 준비해 줄 수 있어요? 콩소메 수프를 끓여야 해서요.”
“물론이죠.”
내가 비록 한식 요리사 출신이지만 이 정도 용어를 알아듣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랜만에 누군가의 지시를 들으며 일을 하는 기억도 나쁘지 않았다. 김상현 주방장님의 모습도 떠오르고.
홈그라운드가 아닌 주방이었지만 오히려 평생을 지내 온 익숙한 주방 같은 느낌이었다.
* * *
“헤이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요.”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각국 대사들을 따라 요리사들 역시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다.
이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들어왔다.
“크 역시 프랑스 요리 냄새는 끝내주네요. 푸아그라인가?”
“도대체 몇 가지를 준비하는 거예요? 엄청 바빴겠는데?”
테오가 준비하는 음식의 개수를 보자 다른 요리사들 역시 놀란 눈치였다.
파나르에 와서 첫 만찬인 만큼 욕심을 내고 싶었던 테오였다. 게다가 만찬의 손님은 미국 대사였고, 나와의 대결, 다른 요리사들과의 만남까지.
첫 만찬치곤 많은 부담이 되는 자리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우리도 도울게요.”
“괜찮아요. 셰프 장이 잘 도와줬어요.”
“그래요? 오늘 둘이 요리로 대결하는 거 아니었어요?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대결은 맞아요. 근데 그건 그거고, 또 도울 수 있는건 도와야죠.”
나의 대답에 요리사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곤 다들 능숙하게 나서서 주방 정리와 음식 마무리를 거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근사한 연회를 한번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척척 움직이는 베테랑들이 한 팀이 되어 음식을 만들어 낸다면?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호텔이나 레스토랑보다 훨씬 뛰어난 음식들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요리사님들도 가서 앉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요리사들까지 합세해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마크 대사의 환영 만찬이 시작되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비록 대사를 맡은 게 이번이 처음이지만 각국 대사들과 함께 파나르에서 많은 것이 이루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얼굴들 잘 기억해 두세요 마크 대사. 파나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들입니다.”
“그럼요. 여러분들의 소문은 이미 다 듣고 왔습니다. 오늘 만찬 대결을 할 장덕수 셰프와 테오 셰프의 명성도요.”
마크 대사 역시 이번 대결에 한껏 기대를 하고 온 것 같았다. 역시 맛있는 음식을 마다할 사람은 없지.
“첫 번째 음식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가장 유명한 프랑스 음식이 되어버린 라따뚜이입니다.”
“하하하.”
테오의 능숙한 농담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