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도발
파나르 대사관 관저.
“좋은 아침입니다 대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장 셰프. 요즘 안 피곤해요?”
“저요? 조금 피곤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카차이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제스의 레스토랑 오픈 행사에 참여했다면서요. 외교관인 나보다 더 바쁜 것 같아요.”
“그냥 시간이 좀 겹쳐서 그런 것뿐이죠. 이제 당분간은 크게 할 일 없습니다.”
“잘됐네요. 좀 쉬어요. 최근에 너무 바빴잖아요.”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최근에 조금 바빴던 건 사실이다. 회귀를 한 뒤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요즘 들어 자주 피곤함을 느꼈다.
“오늘 점심이랑 저녁 식사 전부 외부 약속이 있으니깐 편하게 쉬다가 퇴근해요.”
“대사님도 여전히 바쁘시네요.”
“저는 장 셰프만큼 힘들진 않아요. 그리고 조만간 공관장 회의 때문에 제법 길게 쉴 거예요.”
말로는 괜찮다해도 고령의 김용수 대가가 감당하기엔 조금 빡빡한 일정이긴 했다.
건강에 무리가 가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공관장 회의요?”
“네 일 년에 한 번씩 각국의 공관장들이 모여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을 만나서 성과 보고도 하고, 각국 현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회의예요.”
“대통령님도 직접 만나나요?”
“그럼요. 그땐 한 2주쯤 한국에 갈 테니깐 장 셰프도 미리미리 휴가 계획 좀 해 놔요.”
날짜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뀌지만 보통 그 해 1분기에 공관장 회의가 진행된다. 전 세계 모든 공관장들이 한국에서 모여 성과를 보고하고, 정책을 회의하는 시간이다.
많은 공관장들은 보통 이 시기에 긴 휴가를 떠난다. 한국에 들어간 김에 연차를 사용해서 푹 쉬고 오는 일정으로.
“그럼 그때 저도 맘껏 푹 쉬면 되겠네요.”
“그래요. 그땐 그 분식집이나 호텔에서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지 말고 푹 쉬어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떤 약속이 있으신 건가요?”
파나르에 마땅한 말동무가 없었던 김용수 대사는 이런 나의 질문에도 흔쾌히 대답을 해 주곤 했다.
“파나르에 원래 있던 대사관, 총영사관들이 대두분 정상화가 되었어요.”
“그래요? 그럼 공관장들도 전부 돌아왔나요?”
“미국 대사를 제외하곤 굵직한 나라의 대사는 전부 돌아왔죠.”
조만간 새로 부임하게 될 미국 대사를 제외하곤 원래 있던 각국 대사들이 전부 파나르로 돌아왔다.
그들은 파나르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정보를 나누곤 했다.
“오늘을 시작으로 이제 파나르의 대사들을 자주 만날 겁니다.”
“그렇군요. 이제 파나르에서 우리나라의 입지가 그리 나쁘진 않죠?”
김용수 대사는 고개를 까닥이는 수준으로 몇 번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확실한 입지는 여전히 불안한 상황.
그래도 이전보다 나아진 건 확실했다.
“하루아침에 확 좋아지는 게 아니죠. 예전보단 나아졌지만 그래도 선진국들은 금방 자리를 잡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들은 늦은 만큼 부지런히 움직일 테니까.
우리 역시 다시 뒤처지지 않으려면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 * *
파나르의 R호텔.
각국 대사가 모인다는 소식에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음식은 물론이고, 행동 하나하나까지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썼다.
의전이나 테이블 매너에 예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배인은 날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엠버서더.”
“안녕하세요. 엠버서더 쥴리앙.”
프랑스 대사 쥴리앙은 김용수 한국 대사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파나르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미비했다는 의미.
하지만 김용수 대사의 표정엔 작은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스터 엠버서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김용수입니다.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시죠.”
“오호 역시 아시아는 김이죠! 처음부터 그냥 미스터 김이라고 부를 걸 그랬네요.”
“하하 역시 한국에도 김씨가 제일 많죠.”
“미안해요. 이전에는 파나르에서 한국 대사를 만날 일이 잘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자주 만나면 되죠.”
프랑스 대사 쥴리앙은 형식적인 사과를 건넸지만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김용수 대사는 예상했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리가 없는 사이 대한민국 대사관이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더군요.”
“저도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한국도 파나르에서 입지를 다지는 중인가 봅니다.”
대화가 시작되자 금세 한국 대사관에 대한 얘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파나르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사들은 마땅히 자랑할 만한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얼마 전에 파나르 외교부 장관을 만났는데 한국 대사관 얘기를 하더군요. 한국 음식이 참 맛있었다고.”
“그래요? 그 양반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시내에 한국 음식점도 하나 생기던데요. 거기에도 한국 대사관 요리사가 관련이 있는 것 같던데.”
“저는 기사를 봤어요. 아주 맛있는 비건 요리를 만들었다고 하던데요.”
어느새 김용수 대사의 이름보다 한국 대사관의 요리사가 더 많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실 이거는 호랑이 없는 굴에서 토끼가 왕 노릇 한 것과 다름없죠. 제대로 된 대사관이 없었으니 한국 대사관에게까지 기회가 돌아간 거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쥴리앙 대사.”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한국 대사관이 파나르에서 제대로 된 일을 했다고, 그냥 자리 지키기나 급급했지.”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제법 공격적이었다.
프랑스와 파나르의 관계는 내전이 터지기 전까지 최상의 상태였다.
하지만 프랑스 대사관 역시 내전이 터지자마자 철수를 했고, 한국 대사관보다 무려 1년이나 늦게 복구를 했다.
“맛있어 봤자 한국 음식일 텐데 그냥 예의상 말해 준 거겠죠.”
“그런 거 같진 않던데.”
“아무리 그래도….”
다른 대사들 역시 쥴리앙의 말투나 태도가 그리 맘에 들진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파나르에서 굳이 프랑스 대사와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
최근 한국 대사관의 활약이 있었다고 한들 프랑스 대사관을 등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프랑스 대사관과 얽힐 테니까.
“보아하니 한국 대사관 요리사는 아직 한참 어린 거 같던데, 그런 요리사가 뭐 얼마나 대단한 요리를 했다고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네요.”
“말을 좀 조심해 주시죠 쥴리앙 대사. 저희 요리사가 어리긴 해도 실력은 누구와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습니다.”
“본인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요. 경험은 시간 없이 쌓이지 않아요.”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프랑스 대사의 태도에 줄곧 조용하던 김용수 대사의 얼굴도 붉어졌다.
쥴리앙 대사의 태도에는 무시와 질투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파나르에서 제일 영향력이 강했던 프랑스 대사관 대신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한국 대사관이 그 자리를 파고들고 있었으니.
신경을 쓰기엔 자존심이 상했고, 무시하자니 조금 불안하고, 질투가 나는 상황이었다.
“자자, 왜들 이러십니까. 서로 협력하고 즐겁게 지내자고 모인 자리인데요.”
“맞습니다. 다시는 파나르 내전 따위를 겪지 않으려면 저희끼리 협력하고 정보를 공유해야 합니다. 기 싸움 할 때가 아니에요.”
주변의 대사들이 나서서 쥴리앙 대사와 김용수 대사의 사이를 중재했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성격의 김용수 대사는 어느새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쥴리앙 대사 역시 유치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엠버서더 김. 내가 조금 예민했네요.”
“아닙니다, 쥴리앙 대사님. 그럴 수 있지요.”
이런 일은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사소한 갈등을 능숙하게 해결하고, 좋은 관계로 이어 가는 것이 외교관의 능력.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최적화된 사람들이었다. 쥴리앙 대사의 말투에는 여전히 가시가 남아 있었지만.
“그렇지만 그 요리사의 실력이 궁금하긴 하네요.”
“저희 요리사요?”
“네 아시아의 젊은 요리사가 어떤 난리를 쳤길래 제 귀에까지 들리는지.”
“난리라뇨. 저희 요리사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을 뿐입니다.”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한번 참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쥴리앙 대사의 비아냥은 끝나지 않았다.
“조만간 저희 프랑스 관저에 한번 놀러 오세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습니다. 저도 이번에 새로운 요리사를 데리고 왔는데 아주 실력이 끝내줍니다.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이에요.”
“그래요? 미슐랭 스타를 받은 프랑스 레스토랑의 요리사라. 타이틀만으로도 굉장한데요?”
“그렇긴 해도 저는 한국의 요리사가 좀 더 궁금하긴 하네요. 나이도 얼마 안 된다는데 벌써 대사관 요리사 자리를 꿰찬 거면 엄청난 천재겠죠?”
“그렇겠네요. 저도 이번엔 한국 요리사가 조금 더 궁금하긴 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프랑스의 미슐랭 셰프인데. 그보단 못하겠죠.”
쥴리앙 대사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당연히 자신이 데려온 요리사가 더 많은 인정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론은 딱 반으로 갈렸다.
이때 김용수 대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대결을 하는 겁니다.”
“대결이요?”
“쥴리앙 대사의 요리사와 김용수 대사의 요리사를 초대해서 요리 대결을 펼치게 하는 거죠.”
누군가 대결이라는 방안을 내놓자 쥴리앙 대사와 김용수 대사는 잠시 멈칫했다.
“누가 더 훌륭한 대사관 요리사인지 대결을 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우리는 덕분에 맛있는 음식도 맛볼 수 있구요.”
대결이 펼쳐지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나라의 대사들은 두 사람을 부추겼다.
쥴리앙 대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결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김용수 대사는 곤란한 표정이었고.
“재밌을 거 같네요. 한번 해 보죠. 뭐 결과는 대충 예상이 가지만.”
“음…. 저희 요리사한테 한번 물어봐야 할 것 같네요.”
“물어보긴 뭘 물어봐요. 그냥 공관장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저는 여태 그런 식으로 업무를 지시하지 않거든요.”
김용수 대사는 딱 잘라 거절하지도, 대결을 수락하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 * *
파나르 대사관 관저.
“그래서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와 대결을 해야 한다구요?”
“아니요. 아직 수락하진 않았어요. 장 셰프의 의견을 물어본 뒤 얘기해 주겠다고 했어요.”
얼마 후 있을 미국 대사의 부임 축하 연회에서 두 사람의 대결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새로운 미국 대사의 취임 축하 행사를 프랑스 대사관 관저에서 주최하기로 했어요. 그때 장 셰프도 그곳에 가서 요리를 하면 돼요.”
“음…. 대결을 수락하더라도 홈그라운드가 아니군요.”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대결 유치하잖아요.”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여기까지 말을 꺼냈다는 건 내심 대결을 수락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대결이란 거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았다.
“다른 대사관 요리사들도 전부 초대해서 같이 얼굴도 보고, 모임도 가질 수 있도록 하려구요.”
“다른 나라의 대사관 요리사들도요? 그건 좋네요.”
다른 나라 대사관 요리사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흥미가 생겼다. 각국 요리사들이 어떤 식으로 귀빈들을 상대하는지 알고 싶었다.
“대사관 요리사로서 누가 더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대결하는 자리예요. 그쪽 요리사도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 출신이라 귀빈들을 많이 상대해 봤을 거예요. 만만치 않을 수 있어요.”
“대사님 말씀하시는 게 저를 못 미더워하시는 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미리 말해 주는 거죠. 저는 장 셰프의 실력을 전적으로 믿어요. 그렇지만 유치한 대결 같은 건 굳이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어요.”
원래 유치한 게 재밌는 법이지.
나는 알고 있었다. 미슐랭 스타라는 게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라는 걸.
유럽인,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었다.
그런 타이틀 따위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그 대결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