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손이 가요 손이 가
“업적?”
종이 따위가 무슨 업적을 남기냐는 표정이었다.
거창하게 표현해서 업적이지 그냥 작은 역할 하나쯤을 더 주는 것뿐이었다.
“새우깡이 담긴 그 고깔 어떠세요?”
“고깔이요? 그냥 흰 종이인데 이게 왜?”
종이를 돌돌 말아 컵처럼 만든 고깔을 눈앞에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김용수 대사는 뭔가 번뜩 떠오른 듯 눈이 커졌다.
“이 종이를?”
“네 그 종이를 팸플릿으로 활용하는 겁니다.”
새우깡이 담긴 종이에 대사관 홍보 내용이 담긴 팸플릿을 감싸서 사람들에게 판매한다.
값싸고 특이한 음식을 맛본 사람들은 쿠므스와 함께 인증 샷을 남길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축제장 여기저저기서 쉽게 볼 수 있는 저 익숙한 고깔이 뭔지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우리 부스로 사람이 몰릴 거고.
“이 새우깡은 딱 재룟값만 나올 수 있도록 싸게 판다면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겁니다. 그러면 저희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꽤 괜찮은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거죠.”
“음… 괜찮은 아이디어 같군요. 사진을 찍다가도 눈에 한 번쯤은 들어올 테고, 저 음식이 뭔가 싶어 땅에 버려진 팸플릿이라도 한번 보게 될 거고.”
“그러면 자연스레 대한민국 대사관이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테죠.”
김용수 대사가 맞장구를 쳤다.
“일단 이 새우깡은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그건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싼값에 먹이기만 하면 금방 입소문이 퍼질 겁니다.”
한 번에 충분한 양을 팔면 재구매로 이어지지 않을 테니 딱 아쉬울 정도의 양만 값싸게 파는 거다.
원래 사람이란 게 너무 긴 시간 여행을 하면 지루함을 느끼는 법이고, 배가 부르면 미슐랭 쓰리 스타의 음식에도 관심을 끊는 법이다.
딱 아쉬움을 느낄 만큼의 양을 팔아 여러 번 사 먹을 수 있도록.
입 안에 남은 새우의 잔향이 자꾸 생각이 나서 참을 수 없도록.
그렇게 해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
* * *
카차이 호수.
알렉스의 별장.
“알렉스는 도대체 이런 별장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 거 고민해 봤자 자괴심만 들 테니깐 빨리 준비나 하자.”
알렉스의 별장은 볼 때마다 놀랍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니 뭐.
부러워하는 것조차 낭비였다.
이런 훌륭한 시설을 갖춘 별장을 공짜로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
“뭐부터 만들 거야?”
“일단 어탕부터 만들어야 해.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리니까.”
내일 축제가 시작되면 끓일 시간이 없을 테니 오늘 1차 조리를 전부 완료해 놔야 했다.
내일은 사람들 앞에서 냄새나 풍기며 한 번 더 끓여 주는 정도로만 할 수 있도록.
“먼저 물고기 손질부터 해야 해. 이게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릴 거야.”
“양이 엄청나네.”
눈앞에 쏟아 내는 물고기를 보고 윤아는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끌미끌하고 비린내가 나는 물고기에 손을 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윤아는 군소리 없이 손을 걷어붙였다.
“이건 생긴 게 좀 익숙한 거 같은데 이름이 뭐야?”
“그건 피라미 새끼네. 한국에서도 제일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야.”
“그래서 익숙했구나. 이걸 어떻게 손질하면 돼?”
“잘 봐. 왼손으론 아가미 밑에 턱 부분을 잡고 오른손은 이 똥꼬 보이지?”
“똥꼬? 아 이 작은 점 같은 거?”
“맞아 거기부터 힘줘서 쑥 밀어 봐. 그러고 배 안에 있던 내장이랑 부레랑 한번 빼내면 돼.”
“부레? 부레는 또 뭐야?”
물고기의 배 속에는 부력을 조절하는 일종의 장치가 숨겨져 있다. 그것을 부레라고 하는데 잡은 지 얼마 안 된 물고기들의 배 속엔 풍선 같은 부레가 남아 있다.
“신기하네. 이 조그만 배 속에 별게 다 들어 있네.”
“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
엄지 손가락에 힘을 준 뒤 물고기의 배 속에서 내장과 부레를 한 번에 꺼냈다.
그러자 배 속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부레가 딸려 나왔다. 윤아는 내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곧바로 따라 했다.
“제법이네? 미끌미끌해서 한 번에 하는 게 쉬운 게 아닌데.”
“주방 보조로 일 년 일했더니 나도 이렇게 되네.”
윤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두 번째 물고기를 잡았다.
“근데 얘네들 생긴 게 전부 다르다. 똑같은 물고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 봐.”
“어탕은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들어가야 더 맛있거든. 일부러 섞어서 샀지.”
“얘네들 이름을 다 알아?”
“파나르어로는 모르지만 한국어로는 다 알지. 이건 모래무지, 이거는 빠가사리, 이거는 붕어, 요건 동사리라고 하는데 우리는 망태라고도 부르고 이거는 또 버들치.”
“물고기 이름들도 참 다양하다. 파나르어론 얘네들 이름이 있을까 모르겠네.”
“원래 꺽지라는 물고기가 들어가야 맛있는데 파나르엔 없더라구.”
“그게 뭔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사실 이것만 해도 충분하긴 하지.”
윤아와 알렉스가 지원해 준 주방 보조 직원들은 다행이도 손이 빠른 편이었다.
많아 보였던 물고기 손질이 금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바닷고기 못지않게 민물고기도 종류가 어마어마하구나.”
“카차이 호수는 거의 바다나 마찬가진데 더 많겠지.”
“이걸 다 알고 있는 너도 참 대단하다.”
“요리사라면 알고 있어야지.”
어릴 적 내 고향 진주에서 매일 족대를 들고 나서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한 마리만 잡아도 뛸 듯이 기뻤는데.
물고기 이름이 신기하고 이뻐서 하나하나 다 외우고 다녔던 것 같다.
한국어가 아닌 파나르어로 이 물고기 이름이 뭔지 전부 알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휴우 드디어 다 끝났네.”
“수고했어. 어탕을 만들 때 이 물고기 손질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였어. 이제부턴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커다란 냄비 어러 개에 손질한 물고기를 나눠서 넣었다. 그리고 물을 가득 담고 가스에 불을 켰다. 알렉스의 별장 가스레인지들은 화력도 세 요리를 하기에도 좋았다.
“근데 뭐 소주라도 넣어야 하지 않아? 비린내 없애려면 그런 거 넣잖아.”
“오 그런 것도 알아 제법인데?”
양식에선 흔히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월계수잎이나 정향, 통후추를 넣는다. 한식에서도 비린내나 잡내를 없애기 위해 소주나 청주 등을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어탕은 아직 아무것도 넣을 필요가 없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중에 뼈 걸러 내고 어탕 끓일 때 넣으면 돼.”
“얼마나 끓여야 해?”
“머리고, 뼈고 보들보들해질 때까지 한참 끓여 내면 돼.”
“끓일 때 양념도 같이 넣고 한 번에 끓이면 안 되나? 그러면 국물 맛이 더 진해질 것 같은데.”
“안 돼. 한 번 삶아서 뼈를 걸러 내야 하거든. 근데 요즘 요리에 관심 유독 많아졌다?”
“그냥 음식 관련된 건 전부 너 혼자 하니깐 버거워 보일 때가 있더라구.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오 진짜 그런 이유야?”
파나르 대사관이 한 팀이 되었다고 느낀 게 이런 점이었다. 윤아는 물론이고, 준우도 이제 주방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지 않는다.
뭐든 설거지라도 돕겠다며 나서 주는 직원들이 고마웠다. 사실 점점 대사관이 정상화될수록 혼자 하기에 버거운 일들이 생기는 건 사실이었다.
호텔에서처럼 손발이 딱딱 맞는 요리사들까진 아니어도 이렇게라도 조금씩 도와주면 업무가 훨씬 수월해질 테니 반가웠다.
“근데 이거 일일이 뼈를 걸러 내려면 쉽지 않겠는데?”
“이런 소쿠리에다가 삶은 물고기를 넣고, 살살 내려 주면 뼈는 남고 살만 걸러지지. 물 좀 부어 가면서 몇 번 하면 금방 해.”
“역시 모든 것에 노하우가 있구나. 그 나이에 안 해 본 게 없나 봐 너는.”
“개고생하며 살았다는 증거지 뭐.”
이제는 내 나이를 의심하는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가벼운 농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은 못 하겠어. 이번 축제 때 한번 제대로 하고 끝내 자.”
“그건 나도 찬성이야.”
비록 하루지만 수백 명이 몰리는 축제 때 팔 어탕을 만드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숙이고 있어서 허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자 이렇게 뼈까지 다 걸러 냈으면 힘든 건 거의 끝났다.”
“아이고 허리야. 한참을 숙이고 있었더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나도…….”
알렉스가 지원해 준 주방 보조들도 이렇게 만들기 번거로운 음식은 처음이라면 혀를 내둘렀다.
대신 이렇게 손이 많이 가니깐 맛도 좋지.
한국 음식만큼 과정이 번거로운 음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제 육수에다가 발라 낸 살이랑 된장 조금, 고춧가루, 대파, 간 마늘 같이 양념 넣고 푹 끓이면 끝.”
“이게 끝이야? 끓일 땐 뭐 비법 같은 거 없어?”
어탕은 손질하는 과정에 비해 양념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대신 파나르에서 활용할 만한 비법을 생각해 놓은 게 있었다.
“비법? 당연히 있지. 대신 이건 파나르식 비법이야.”
“한국 음식인데 파나르식 비법?”
“별거는 아니고 카잔에 끓이는 거지.”
“아아 가마솥에 끓이는 거처럼?”
“응 내일은 이 카잔을 밖에 갖다 놓고 끓이면서 팔 거야.”
“맛있겠다….”
윤아와 주방 보조 직원들은 끓고 있는 어탕을 보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함께 고생해 준 사람들인데 가장 신선하고 맛있는 어탕을 맛보여 줘야지.
“고생했으니깐 제일 먼저 어탕을 맛볼 기회를 줄게.”
“오예.”
적당히 뻘겋게 끓여진 어탕에선 진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었지만 파나르인 주방 보조 직원들도 그 맛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윤아야 너 추어탕은 먹어 봤어?”
“먹긴 하는데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한국에 살 때는 어릴 때라 특별히 안 좋아했을 수도 있어. 근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럴 수 있겠다.”
파나르인 주방 보조 직원들도 민물고기를 구워 먹거나 국처럼 만들어 먹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든 음식은 흔하지 않다고 했다.
“이분들 말 들어 보니깐 민물고기로 비쉬파르막도 만들어 먹는대.”
“오 정말? 비쉬파르막이 고기가 아니어도 되는구나.”
“나도 처음 듣는 말이야.”
오랫동안 끓이는 국물 요리인 비쉬파르막을 생선으로 만들기도 한다면 파나르 사람들 입맛에도 익숙하겠다.
갓 끓여 낸 어탕에 라면을 넣어 한 그릇씩 나눠 주었다.
“맛이 어때?”
“이거 진짜 생선으로 만든 거야?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데?”
“비린내가 심한 내장은 다 손질했고, 된장으로 맛을 잡아서 그래.”
“이거 되게 괜찮다. 민물고기가 이런 맛이었다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피곤한 몸에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다들 ‘크으.’ 하는 감탄사를 뱉어 냈다.
이건 전 세계 공통인가 보다.
“저분들도 맛있대?”
“응 생선으로 만든 비쉬파르막보다 낫다는데? 라면이랑도 잘 어울리고.”
“다행이다.”
“근데….”
“근데 왜?”
“혹시 추어탕에는 무슨 가루를 넣어서 먹지 않나? 향신료 같은 거.”
“아 산초가루?”
산초가루 역시 추어탕의 비린내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넣는 게 목적이었지만 특유의 향 덕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향신료가 되었다.
“응 그런 것처럼 뭔가 특유의 향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긴 해도 요즘은 그냥 오리지널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 호불호가 갈리니까. 또 괜히 그런 향을 넣었다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깐 장사를 할 땐 무난하게 하는 게 좋아.”
“그렇구나.”
“그리고 파나르에선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어.”
아쉬워하는 건 윤아뿐만이 아니었다.
주방 보조 직원들 역시 윤아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좀 더 임팩트가 있는 음식이었다면 하는 바람.
뭔가 떠오른 듯 윤아가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넣어 보면 어떨까?”
윤아는 자신 있게 냉장고로 향했다.
파나르인의 냉장고라면 무조건 들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