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물놀이 후엔 라면이지
“조건이요? 그게 뭔가요?”
역시 비즈니스맨에게 공짜는 없는 건가.
조건이라는 말에 잠시 긴장했지만 알렉스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우리 쿠므스를 사람들에게 함께 나눠 줘요.”
“저희가요?”
“네 미스터 장이 만드는 음식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쿠므스를 공짜로 나눠 줬으면 해요.”
“공짜로요?”
내가 연락하지 않았어도 알렉스는 이번 축제에 쿠므스를 대량으로 지원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미 주최 측과는 협의가 끝이 난 상황이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나눠 줄지는 고민하고 있던 상황.
그러던 찰나 내가 연락해 카차이 축제에 대해 말을 꺼내니 무척 반가웠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긴 할 거지만 미스터 장의 한국 대사관에서 제일 많은 양을 나눠 줬으면 해요.”
“왜죠? 파나르 사람들이 직접 나눠 주면 더 의미가 있을 텐데요.”
파나르를 대표하는 술이 있으면 좋겠다고 시작한 사업이 쿠므스 사업인데.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축제에서 굳이 외국의 대사관에 이런 일을 맡길 필요가 있을까.
알렉스의 속내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어차피 파나르 내에서 우리 쿠므스는 충분히 홍보가 되었어요. 그리고 내가 이 사업을 하기 전에도 쿠므스가 파나르 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었구요.”
“그건 그렇죠.”
“그래서 쿠므스가 다른 나라 음식들과 잘 어울리고, 외국 사람들도 즐겨 먹는 술이란 걸 알려야 해요. 그런 의미로 대한민국 대사관이 딱 적합하죠.”
“그렇긴 한데 이건 대사님의 허락을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걱정 마요. 내가 파나르 외교부 장관을 통해서 말해 놓겠습니다. 나라 대 나라의 일이라면 한국의 대사님도 거절하지 못하겠죠.”
“그… 그렇게까지?”
조금 일이 커져 버렸다.
당황스러웠지만 나쁠 것 없는 제안.
이제 대사관 직원들도 힘들더라도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는 마인드가 깊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한국 대사관에서 제일 많은 양의 쿠므스를 꼭 나눠 줘야 하는 이유가 또 있어요.”
“뭔가요?”
“제일 많은 손님이 몰릴 테니까요.”
“저희한테요? 아직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요?”
“미스터 장의 계획을 들었잖아요. 분명 행사장에서 제일 인기 있는 부스가 될 겁니다. 확신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세요?”
“감이죠 사업가의 감.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이 몰릴 만한 아이템은 내가 귀신같이 알아볼 수 있어요. 아까 미스터 장이 말한 내용대로 된다면 분명 엄청난 인파가 몰릴 겁니다. 두고 봐요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미스터 장이라면 어떻게든 내 말이 사실이 되도록 만들어 놓겠죠 안 그래요?”
“네?”
“하하하 농담입니다.”
알렉스의 말투는 자신만만했다.
내 실력과 자신의 감을 100% 믿고 있었다.
사람이 몰리는 아이템을 감으로 알아차린다는 건 그만큼 사업가 기질이 뛰어나다는 것.
그 감은 타고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재능이었다.
그리고 알렉스에겐 사람을 보는 눈까지 가졌다.
그런 눈에 내가 들었으니 기대하는 건 당연.
이렇게 된 이상 처음 준비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확실하게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제 갈까?”
“그러자.”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행사장에서 멀지 않은 별장의 주방을 하나 빌릴 수 있었다. 또 쿠므스를 함께 나눠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배정받은 자리 말고 두 개의 부스를 더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김용수 대사와 직원들이 기다리는 차로 돌아가는 길에 카차이 호수에 지고 있는 노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짜 이쁘다.”
“그치? 나도 왜 여태 여기를 한번 안 와 봤을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 해변가도 충분히 좋았지만, 파도가 치지도 물이 흐르지도 않고 고요한 카차이 호수에 노란빛이 흘러내리는 풍경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이런 풍경들을 볼 때마다 파나르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꽉 찬 풍경은 또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근데 덕수야.”
“응?”
“축제 때 주방까지 빌려서 뭐 만들 거야?”
“이번에?”
“응.”
“민물고기의 매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축제에 온 모든 사람들이 우리 대사관을 알게 할 수 있는 음식.”
돌아오는 길에도 카차이 호수의 풍경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최근 바빴던 일상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답사를 마치고 편안한 맘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 * *
관저 주방.
“대사님 점심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게 카차이 축제 때 만들 음식인가요?”
“네 맞습니다. 물놀이하는 사람도 많을 테니 이런 식으로 준비해 봤습니다.”
“이 음식 이름이 뭔가요?”
“이거요? 어탕국수입니다.”
“오호 어탕국수라면 추어탕이랑 비슷한 건가요?”
“네 맞습니다. 추어탕이 미꾸라지로만 만든 국이라면 이 어탕은 잡어들을 넣어 만든 국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민물고기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민물고기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바로 이거였다.
비린내도 나지 않고, 고소함만 남은 어탕국수.
아니 어탕라면이라고 해야 할까?
후루루룹.
“크으 국물이 걸쭉하니 아주 진하네요. 고소한 고기 맛도 느껴지는 것 같고.”
“어떠세요? 민물고기도 드실 만하죠?”
“물론이죠. 추어탕은 평소에도 즐겨 먹는데 이 어탕국수도 추어탕 못지않네요. 오히려 더 깊은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아무 물고기나 넣는다고 다 맛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요?”
잡어를 넣어 끓이는 게 방법이긴 하지만 아무 물고기나 넣지는 않는다.
어탕으로 만들었으면 맛이 좋은 어종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잘 골라서 넣는 게 맛의 포인트.
“한국이랑 어종이 같지는 않아서 원하는 대로 넣은 건 아니지만 충분히 맛이 날 겁니다.”
“충분해요. 특히 이 국물에 굉장히 감칠맛이 진하게 느껴지는데 무슨 육수로 만든 건가요?”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요리에 영 젬병이던 김용수 대사도 이제는 어느 정도 맛을 찾아낼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것까지 알아내시다니 대단하시네요.”
“허허허 장 셰프 덕에 하도 맛있는 걸 많이 먹다 보니 입맛이 좀 까다로워졌나 봅니다. 그래서 육수는 뭘로 만든 겁니까?”
“새우입니다. 민물새우.”
“새우요?”
“네 시장에 가니깐 민물새우를 아주 싼값에 팔고 있더라구요. 이게 감칠맛 내는 데 일등이죠.”
어탕을 끓일 때 넣고 싶은 어종은 전부 찾지 못했지만 의외의 수확이 있었다.
바로 손톱만 한 민물새우.
카차이 호수는 한국의 댐처럼 물이 고여 있기 때문에 민물새우가 꽤 많이 올라온다.
“이게 새우의 맛이었군요. 근데 이 음식이 어탕국수라고 해 놓고 왜 면은 라면인가요?”
김용수 대사는 어탕이 입맛에 맞는지 식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냥 맛있게 먹었다 정도만 말하는 분이었는데 어탕에 대해선 궁금한 게 많은 모양.
“원래는 소면을 넣어서 어탕국수로 주로 먹는 음식인데, 물놀이 후엔 역시 라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렇긴 하죠. 생라면이든 끓인 라면이든 컵라면이든 물놀이 후엔 라면이 진리긴 하죠.”
“역시 배우신 분!”
대량으로 만들면 소면은 금방 불기도 할뿐더러 이렇게 얇은 면은 파나르인들에게 익숙하지도 않다. 그래도 라면은 세계인들이 즐기는 음식이기 때문에 물놀이 후에 먹는 라면의 맛을 준비했다.
“카차이 호수에서 실컷 물놀이한 후에 이 어탕국수, 아니 어탕라면 한 그릇 하면 최고겠는데요?”
“대사님이 생각하시기에 파나르인들도 좋아할 것 같나요?”
“그럼요.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김용수 대사도 수십 번의 외교 만찬을 겪고 나니 파나르인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 뭔지 감으로 알고 있었다.
어탕은 카차이 축제를 여는 목적에도 부합하고, 파나르인들이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근데 이 어탕이 맛있긴 하지만 쿠므스랑 먹기엔 좀 부담스럽지 않나요?”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물론 어울리긴 하겠지만 어탕과 쿠므스를 함께 먹는 건 식사 느낌이라 조금 부담스러워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용수 대사 역시 쿠므스를 지원받은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중이었다.
기왕이면 좀 더 알차게 쓰고 싶다는 마음은 나와 같았다.
“알렉스의 생각은 축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쿠므스를 가볍게 마시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그것도 그렇고, 쿠므스가 외국 음식과 잘 어울린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는 의도도 있구요.”
“그러면 좀 더 간단한 안주 같은 게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어탕은 술이 없어도 먹을 수 있으니까요.”
한입 딱 먹으면 곧바로 술이 당기는 그런 안주.
한국 음식과 쿠므스의 조합이 훌륭하다는 것도 알려 줄 수 있는 그런 음식.
그런 메뉴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게 있는데 이것도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뭔가요? 주전부리인가요?”
식사를 끝낸 김용수 대사에게 종이 한 장을 고깔처럼 돌돌 말아 컵처럼 만든 걸 전해 주었다.
“새우깡입니다.”
“새우깡? 손이 가요 손이 가는 새우깡이요?”
“한번 맛보면 저절로 손이 가긴 하지만 그 파는 새우깡은 아닙니다. 이건 아까 육수 만들 때 쓴 민물새우로 만든 새우깡입니다.”
손톱만 한 민물새우에 튀김옷을 살짝 입혀서 바삭하게 튀겨 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안줏거리가 된다.
새우 껍질에 들어 있는 감칠맛은 한번 맛보면 절대 손을 뗄 수 없다.
게다가 튀긴 음식이라면 더더욱.
한 손에는 쿠므스 그리고 한 손에는 새우깡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호오 이거 굉장히 맛있는데요? 나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가요.”
“맞습니다. 이건 일단 한번 시작하면 끝이 날 때까지 손을 뗄 수 없습니다. 쿠므스와 함께 이 새우깡을 팔면 어떨까 합니다.”
“이건 가볍게 먹기에도 좋고, 술안주로도 좋으니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 같아요. 역시 장 셰프는 아이디어가 참 기발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알렉스에게 쿠므스를 지원받아서 새우깡까지 준비했지만 원래 이 축제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행사 때 대사관 부스에 많은 사람이 몰리겠군요. 출출한 사람들은 뜨끈하고 든든한 어탕라면을 먹고, 일광욕이나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쿠므스와 이 새우깡이 제격이겠구요.”
“그렇긴 하지만 저희 대사관 홍보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대사님.”
“아이쿠 그렇군요. 본분을 잊을 뻔했네요. 어쨌든 찾아오는 손님이 많으면 팸플릿을 많이 나눠 줄 수 있으니 충분하겠네요.”
“단순히 팸플릿을 나눠 주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냥 버리는 사람들이 태반일 겁니다.”
“그렇긴 해도 그중 10%만 읽어 봐도 성공 아닐까요?”
“작지만 업적 하나라도 남기고 버려지도록 만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