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96화 (97/202)
  • 96. 부탁

    “저한테 부탁하실 거란 게 뭔가요?”

    장관이 나 같은 일개 요리사에게 부탁할 게 있나.

    그것도 이렇게 따로 불러내서.

    “다름이 아니라 예비 재외 공관 요리사들의 교육 매뉴얼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 재외 공관 요리사로 채용된 요리사들을 부임하기 전에 교육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아님 직접 교육을 진행해 주거나.”

    장관을 대신해 보좌관이 말을 이어 갔다.

    “아까 요리사님이 소감으로 말씀하신 내용은 저희도 전부 인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요리사만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외교관과 행정 직원들은 채용되기 전 본인들의 실력을 필기시험 등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리사들은 그게 불가능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외교관들은 국가 고시로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했고, 행정 직원들은 별도의 시험을 통해 외국어 능력을 증명하고 채용된다.

    하지만 요리사들은 서류 심사와 면접 말곤 따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면접 때 말로는 전부 가능하고, 경험이 많다고 해서 막상 채용하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요리사들이 태반입니다. 재외 공관 요리사는 혼자서 메뉴를 구상하고, 음식을 만들고 서빙 순서까지 모든 걸 계획해야 하는데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긴 하죠.”

    “게다가 외교 행사 때의 음식은 단순히 맛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닌 건 잘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초대되는 사람에 따라 메뉴 구성을 다르게 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음식에 손님의 스토리를 담아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공관장들은 큰 틀을 제시해 주고, 요리사들은 그걸 음식으로 구현해 내야 하는데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짜 경력과 이력을 숨기는 요리사들이 많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지, 이 계약 시스템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젊고 경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착실히 실력을 쌓은 요리사들은 처음이라도 금방 적응합니다. 하지만 물경력인 요리사들도 꽤 많았습니다. 실력만 확실하다면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아무리 그래도 모든 걸 포기하고 해외까지 나가는 요리사들에게 비정규직은 너무 큰 리스크입니다.”

    본부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 정도는 면접을 좀 더 꼼꼼하게 본다면 줄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요리사님이 말씀하신 부분은 분명 고쳐야 하는 사안은 맞습니다만 곧바로 무조건적으로 정규직 채용은 어렵습니다.”

    “그럼 뭐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의 교육 매뉴얼이 만들어진다면 다소 부족한 실력을 가진 요리사들이 채용되더라도 근무하는 데 지장은 없을 겁니다. 장덕수 요리사님이 먼저 말을 꺼내셨으니깐 이 업무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 말뜻은 실력이 없는 젊은 요리사를 억지로 뽑아서 교육을 하라는 게 아니라 실력이 있다면 나이나 경력 상관없이 뽑고, 정규직으로 채용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깐 그걸 면접만으로는 가려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저희로서는 교육을 통해 기본을 갖춘 요리사들을 파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당황스러웠다.

    이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진짜 현장에서 구르다 온 요리사인지 말만 번지르르한 요리사인지 알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사실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긴 했다.

    총주방장일 때 수도 없이 면접을 본 덕에 진짜 현장 전문 요리사를 보는 노하우가 생겼었다.

    주방에서 쓰이는 용어나 대처 방법 등등.

    몇 가지만 물어보면 금세 들통이 난다. 한식, 양식, 일식, 중식 가릴 것 없이 주방이라면 통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면 장관님, 이렇게 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어떻게요?”

    “요리사들도 채용 전에 필기 시험을 치는 겁니다.”

    “필기 시험이요?”

    “네 외교관들이나 행정 직원들처럼 필기 시험으로 그 역량을 가려내는 겁니다.”

    나의 제안에 장관과 보좌관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요리사를 가려내는 데 필기 시험을 치자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그게 가능한가요? 이론은 빠삭해도 칼질도 제대로 못하는 요리사들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이론적인 것에 대한 시험이 아닙니다. 진짜 현장 출신 요리사를 찾아내는 시험입니다.”

    “그런 시험이 따로 있나요?”

    당연히 없지.

    내가 만들어서 꽤 유용하게 써먹었던 거니까.

    면접을 하도 많이 보다 보니깐 매일 하던 질문을 하는 게 귀찮아졌었다. 그래서 내가 면접 때마다 던지던 질문을 정리해서 시험 문제로 만들어 면접 전에 그것들을 풀게 했다.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주방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거라 판단하여 면접에서 떨어뜨렸다.

    “그런 시험을 제가 만들 수 있습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러면 예를 들어 몇 가지만 문제를 내 보겠습니다. 한창 바쁜 점심시간 주방 바닥에 식용유가 흘렀습니다. 뭘 해야 할까요?”

    내 질문에 장관과 보좌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름의 대답을 말했다

    “기름기니깐 퐁퐁을 뿌려서 바닥 청소를 해야겠죠?”

    “아니면 뜨거운 물을 뿌려서 녹여야 합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단 바쁜 시간이기 때문에 밀가루를 뿌려서 바닥이 미끄럽지 않도록 해 줘야 합니다.”

    “밀가루를요?”

    “네 밀가루와 바닥에 흘린 식용유와 만나 반죽처럼 뭉쳐져서 나중에 청소하기도 용이하고, 미끄러운 것도 곧바로 사라집니다.”

    주방 경험이 전무한 두 사람은 생전 처음 듣는 상식인 양 신기해했다.

    “그리고 하나 더. 방금 끓인 단호박죽에 단맛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무슨 조미료를 더 넣어야 할까요?”

    “음…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단맛이 필요하니깐 설탕을 넣어야죠.”

    “그렇게 당연할 리는 없으니, 물엿이나 꿀이 아닐까요? 죽이랑 농도도 비슷하고.”

    이 간단한 질문 몇 가지만으로도 두 사람의 주방 경력이 아예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단호박죽의 단맛을 더해 주기 위해선 소량의 소금을 넣어 줘야 합니다.”

    “더 달콤하게 만들기 위한 건데 왜 소금을 넣습니까? 소금을 넣으면 짜지겠지.”

    “그러게 말입니다. 이게 진짜 맞는 말인가요?”

    맛의 대비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맛에 다른 종류의 맛을 소량 가하면 원래의 맛이 강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특히 소금이 그런 효과를 더욱 강하게 주는데 주방에서 일을 좀 해 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알 만한 지식들이다.

    “이렇게 현장에서 일을 해야지만 알 수 있는 질문들이 수십 개가 있습니다. 이걸 시험으로 만들어 면접 전에 풀어 보게 한다면 어느 정도 실력 있는 요리사들을 가려낼 수 있을 겁니다.”

    “이거 정말 신기하네요. 저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내용들뿐이에요.”

    “맞습니다. 주방에서 일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소한 내용들이죠. 하지만 진짜 현장 출신들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을 겁니다.”

    “좋네요. 참고해서 시스템을 재정비해 보도록 하죠.”

    부족한 요리사들을 교육시키는 매뉴얼 대신 진짜 실력자를 가려낼 수 있는 문제 몇 개를 만들어 준다는 약속을 하고, 대회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야 인마 장덕수.”

    “?”

    “뭔 생각을 하길래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냐?”

    멍한 채로 고개를 돌려 보니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주방장님!”

    “고생했다 덕수야.”

    “주방장님 왜 말씀 안 해 주셨어요. 심사 위원이라는 걸요.”

    몇 시간 전 놀랐던 맘을 이제야 표현해 봤다.

    약간의 섭섭함도 함께.

    “그건 당연히 말 못 하지 인마. 참가자랑 아는 사이란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대회 시작도 하기 전에 컴플레인 걸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좀 섭섭하네요.”

    “섭섭해도 어쩔 수 없다.”

    “쳇. 맘 넓은 제가 이해하겠습니다.”

    “솔직히 이런 대회에서 네가 이 정도로 잘해 낼 줄은 몰랐다. 스토리도 훌륭했고, 음식 맛도 훌륭했다.”

    “오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파나르에서 많이 배웠나 보구나. 호텔에서 일할 때랑은 완전 다른 사람이던데. 표정도 태도도.”

    “그랬나요? 호텔에 있을 때도 제법 훌륭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걸 지 입으로 말하면 되나?”

    “하하하 맞는 건 맞는 거죠.”

    회귀 전 이때의 나는 성실했지만 요리 실력은 평범한 요리사, 아니 주방 보조 정도의 직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주방장님의 눈에 그런 내가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이대로만 하면 청와대 요리사 되는 게 꿈은 아니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 아까 조근배 요리사님도 네 칭찬 많이 했어. 젊은 놈이 요리를 대하는 태도나 실력이 대단하다고.”

    “오호 청와대 요리사님이 제 칭찬을요?”

    “내 칭찬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냐? 같은 심사 위원인데.”

    “둘 다 좋죠. 주방장님 칭찬은 처음이 아니니까요.”

    “그래 여튼 수고 많았다. 근데 잠시 시간 좀 있냐?”

    “시간이요? 주방장님이 내 달라면 당연히 내어 드리죠.”

    “내가 할 말은 다 했고….”

    주방장님은 어디론가로 날 데리고 갔다.

    1등의 힘이 이렇게 큰 건가. 오늘따라 날 찾는 사람이 많았다.

    “어서 오세요, 장덕수 셰프.”

    “아!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날 기억하는군요. 고마워요.”

    주방장님이 데리고 간 곳에는 H호텔 사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을 지지고 볶은 사이인데 모를 리가.

    사장은 단상에서 인사한 게 다인 줄 알겠지만 나는 목소리만 들어도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

    “사장님이 네가 이 호텔 출신이란 거 듣고 한번 보고 싶다 해서 불렀어.”

    “그러셨구나.”

    “호텔의 요리사들을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니깐 대화 좀 나누고 와라. 1층 카페에 있을게.”

    “주방장님!”

    주방장님은 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비켜 줬다.

    사전에 말이 끝난 것 같았다.

    “오늘 대회 정말 인상 깊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파나르 대사관으로 가기 전에 우리 호텔에서 근무했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내가 부임하기 전이었나 보네요. 나였다면 이런 인재를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았을 텐데.”

    “파나르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딱딱한 태도로 사장을 대하고 있었다.

    “아까도 잠시 말했지만 나는 우리 호텔이 단순 숙박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음식으로 좀 더 빛이 나는 호텔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시군요.”

    “그래서 김상현 총주방장님 같은 인재들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어이구 그러셨어요.

    대놓고 빈정대고 싶었지만 꾹 참고 감정을 추슬렀다.

    “물론 우리에겐 훌륭한 총주방장님이 계시지만 그 밑에 팀원들 역시 좀 더 높은 수준의 요리사들이 일을 해 줬으면 합니다.”

    “지금 일하시는 분들도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주방장님 못지않게 선배님들의 실력도 훌륭했다. 그건 내가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장덕수 셰프만큼은 아니겠죠?”

    “네? 저는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선배님들이 훨씬 훌륭합니다.”

    “제 말의 뜻은 우리 호텔의 요리사들도 전부 훌륭하지만 장덕수 셰프에게 조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의미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빨리 이 사장과의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