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95화 (96/202)
  • 95. 소감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지만 분명 그 사람이 맞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H호텔에 새롭게 사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이렇게 의미 있는 행사를 지원하게 되어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호텔이 다른 호텔과는 달리 음식으로 더욱 유명해지길 바랍니다. 요리사들이 일하기 즐거운 주방, 그로 인해 손님들이 더욱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호텔을 만드는 것이 저희 꿈입니다.”

    풉.

    사장의 말에 나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설령 처음엔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몰라도 후배 요리사들을 중고차 취급하며 가차 없이 정리했던 사장이다.

    저런 가식적인 모습을 보니 반드시 1등을 해서 그때의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재외 공관의 후배 요리사들까지 그런 대접을 받게 할 순 없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제1회 올해의 재외 공관 요리사 선발 대회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두구두구두구.

    “먼저 3등입니다.”

    “제발 3등이라도….”

    “3등 수상자는 자신이 일하는 곳에 대한 만족도도 높고, 가장 개성 있는 요리를 선보인 이태리 대사관의 김지훈 요리사입니다.”

    “오오오!”

    김지훈이라는 이름이 호명되자 가장 크게 환호성을 지르는 지훈이었다. 날씨가 좋고, 볼거리가 많은 나라에서 지내서 저렇게 밝은 성격을 가진 걸까. 아니면 원래 저런 성격의 사람인 걸까. 제법 나이가 있음에도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은 지훈이었다.

    이탈리아가 그렇게 좋다는데….

    지훈을 보자 나도 언젠간 꼭 한번 여행을 가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대한민국만큼 제가 일하는 이탈리아를 좋아합니다.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오랫동안 그곳에서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고 싶다는 지훈의 소감.

    선진국에 유명 관광지인 만큼 그곳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뺏기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소감이었다.

    “다음은 2위입니다. 2위를 수상한 요리사는 대회 내내 아주 위생적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음식을 만들어 줬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파키스탄 대사관의 이승재 요리사입니다.”

    “오오오 축하드려요, 요리사님. 2등이에요!”

    “제가 2등이라니…. 하아 다행이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승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까지 가서 수상을 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또 얼마나 힘들게 할까라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다.

    비록 1등은 아니었지만 2등도 훌륭한 성과였다.

    “감사합니다. 이 대회를 통해 다른 나라의 요리사분들과 많은 소통을 하게 되었는데 다들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부러웠습니다.”

    지훈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의 소감이 이어지자 대회장 역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저 역시 이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일을 하며 뿌듯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감정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도록 많은 신경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쭈뼛거리다가 이내 굳게 입을 닫아 버린 승재였다. 결국 수상 소감 역시 형식적인 인사로 끝이 났다.

    “그럼 대망의 1위 발표가 있겠습니다.”

    “아 제발….”

    “제1회 올해의 재외 공관 요리사 선발 대회의 1위는 바로 파나르 대사관의 장! 덕! 수! 요리사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와아아아아아!

    내 이름이 호명되자 멀리서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

    한샘이었다.

    근무 중에 몰래 빠져나왔는지 유니폼을 입은 채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고 있었다.

    한샘을 향해 손을 격하게 흔들면서 단상으로 향했다.

    “장덕수 요리사는 단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한샘의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셔터 소리가 수없이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취재진이 와 있었나.

    수상 결과에 집중하다 보니 이렇게 인파가 몰렸는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호텔 측에서도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몇 불렀다고 했다. 새로 부임한 사장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1위를 수상한 파나르의 장덕수 요리사는 그 누구보다 관저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외교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외교에 대한 개념도 이해하고 있는 요리사였습니다. 단순히 음식만 잘하는 요리사가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상대방의 눈빛과 몸짓 하나에도 반응하는 그런 요리사만이 훌륭한 재외 공관 요리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상보다 거창한 수상 이유가 나오자 괜히 머쓱해졌다. 대회의 흥행을 위해선 영웅 만들기도 어느 정도 필요했으니까.

    “그런 의미로 파나르 대사관의 장덕수 요리사는 전 세계 재외 공관 요리사들의 귀감이 될 수 있을 걸로 판단되어 이 상을 드립니다.”

    내가 상장과 트로피를 건네받자 등 뒤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수백 번의 셔터가 터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장덕수 요리사 소감 한번 부탁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상장과 트로피를 안고 단상에서 뒤로 돌아섰다.

    얼핏 봐도 익숙한 언론사들의 카메라가 보였다. 호텔 측에서도 돈깨나 쓴 덕분에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내가 딱 원하던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먼저 이런 대회를 개최해 주신 본부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파나르에서 함께 고생하는 김용수 대사와 직원들께 이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그들 덕분에 해외에서 무사히 적응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소감을 끝내고 본론을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세계 공관에는 외교관들 못지않게 많은 수십 명의 요리사들이 밤낮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고충을 겪고 있습니다. 날씨 문제, 음식 문제, 경제적인 문제, 사람 관계 등등. 수많은 종류의 문제를 이겨 내며 국격을 올리는 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우영과 다른 요리사들은 단상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눈빛과 표정으로 내 소감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이렇게 고생하는 요리사들에게 장관님께서 선물을 하나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장관을 직접 거론하자 주위 보좌관들이나 직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장관은 차분하게 소감을 이어 가라며 손짓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재외 공관 직원들 중 요리사만이 유일하게 비정규직으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큰 떡밥이 될 만한 단어가 나오자 기자들은 단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공관장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밀접하게 일을 하는 요리사들이 심적으로 안정을 갖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관장과 요리사가 서로 믿고, 의지하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고, 나아가 국격에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또 신변이 안정이 되면 앞서 말했던 문제들이 자연스레 해결이 되어 더 많은 요리사들이 재외 공관 요리사를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

    내 말뜻이 기사를 쓰는 기자에 따라 의미가 흐려질 수 있어 다시 한번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이 자리에서 재외 공관 요리사들도 정규직으로 채용해 주실 것을 건의합니다. 또 재외 공관 요리사들이 다른 부당한 대우는 받고 있지 않은지 자주 그리고 꾸준히 관리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게 저의 소감입니다.”

    내 소감을 들은 직원들의 표정은 당혹 그 자체였다. 대신 우영과 다른 요리사들은 연신 환호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나는 단상에서 내려오며 파키스탄 요리사 승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승재는 입 모양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원래 이걸 계획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지만 승재는 자신을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위로가 되었다면 그걸로 된 거다.

    “장덕수 요리사님 KBN 사회부 기자입니다. 방금 소감 때 하신 말씀 다시 한번 자세히 인터뷰 가능할까요?”

    “네 물론입니다. 다른 요리사분들도 많이 있으니 전부 인터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요? 많을수록 좋습니다. 전부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요리사들이 부당하게 참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짧게나마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본부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할 수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바로잡는 게 낫지 않을까?

    분명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이었다.

    “덕수야!”

    “한샘아! 너 근무 중 아니었어?”

    “맞아 지금 전화 오고 난리 났는데 가서 조금 잔소리 듣지 뭐. 너무 축하해! 대박이다 1등이라니.”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폴짝 뛰어 안기는 한샘이었다. 지금처럼 기쁜 순간이 또 있을까?

    주위를 둘러봐도 웃고 있는 요리사들의 얼굴이 보일 뿐이었다.

    “장덕수 요리사님.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저요? 누구신가요?”

    “네 저는 장관님 보좌관입니다. 장관님이 잠시 뵙자고 하십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올 게 왔구나.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터트리면 분명 누군가 불편함을 표현할 거라 예상은 했다.

    이렇게 빠를지는 몰랐지만.

    보좌관을 따라 주방 뒤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팔짱을 낀 채로 벽을 보며 서 있는 장관이 있었다.

    “앉으세요.”

    “네 장관님.”

    “그건 제가 선물해 준 칼인가요?”

    “아 이거요? 네 맞습니다.”

    한 손에 들린 칼 가방에는 장관이 직접 선물해 준 칼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그 칼끝을 우리 쪽으로 향하게 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아닙니다 농담이에요. 장덕수 요리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요리사예요. 내가 여기로 부른 건 오늘 그 소감 때문이 아니에요.”

    “네? 그러면….”

    내가 말한 소감 때문이 아니라면 뭐 때문일까.

    “물론 오늘 소감 때 말한 내용도 곧바로 검토가 들어갈 겁니다. 예전엔 공관장과 요리사들이 관저에서 함께 사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문제가 많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랬겠지. 몇 년을 사귄 커플도 결혼을 하고 나서는 싸우는데, 처음 만난 사람끼리 한집에서 지낸다는 게 쉬울 리가 없지.

    “그래서 그땐 서로 쉽게 계약을 해지할 수 있게 이렇게 유지하던 제도가 요리사들을 힘들게 하는 줄을 몰랐네요.”

    공관장뿐만 아니라 요리사들도 쉽게 계약을 해지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 제도였다.

    향수병도 심했을 거고, 공관장들과 한집에 사는 게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최근엔 대부분 요리사들이 따로 집을 구해 생활을 했다. 치안의 심각한 위험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면.

    “최대한 빠르게 검토 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김용수 대사의 조언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눈물을 훔치던 파키스탄 요리사 승재의 표정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진짜 하시고 싶은 말은 뭔가요?”

    “다름이 아니라 장덕수 요리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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