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날 위한 요리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간단하다 보니깐 음식 역시 자연스레 간편식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대신 최대한 맛있게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아침밥.
파나르 대사의 일상식을 주제로 정해 요리를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요리사들 역시 복잡하고 화려한 요리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각자 자기가 정한 주제로 공관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꼭 공관장을 위한 요리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김용수 대사에게 아침을 해 주는 것이 즐거웠다.
별것도 아닌 음식에 매번 주방까지 들어와 잘 먹었다며 인사를 해 주는 김용수 대사.
그 한마디 인사를 듣기 위해 잠이 덜 깬 아침이지만 매일 집중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탁탁탁탁, 치이이익.
제일 먼저 일정한 두께로 얇게 썬 양파를 볶기 시작했다. 기름 한 방울 없이 짙은 갈색이 되어 단맛을 뿜어낼 때까지.
처음 파나르에 도착한 날부터 김용수 대사가 아침마다 먹을 수 있도록 양파주스를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하는 일을 대회에 참여해서도 하게 될 줄이야.
간단한 음식이지만 나의 필살기 같은 음식이었다.
서걱서걱.
그리곤 껍질을 벗긴 감자를 강판에 잘 갈아 주었다. 믹서기에 갈면 너무 곱게 갈려 감자전의 식감이 부족해지기 때문.
간 감자만큼의 감자를 채 썰어 잘 섞어 준다.
파나르 외교부 장관이 관저에 왔을 때 요긴하게 써먹은 적 있던 음식이다. 마침 김용수 대사도 고소하게 구운 감자전을 좋아했으니.
“남은 시간은 30분입니다.”
여느 요리 대회와 달리 시간에 대한 압박은 없었다. 잘 먹었다는 김용수 대사의 인사를 듣기 위해 신이 나서 아침밥을 만드는 평소의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어깨까지 들썩이며 대회를 즐기고 있었다.
“파나르 요리사님은 시간이 여유가 있나 봅니다.”
“네 재료가 간단해서 그런가 시간적인 여유는 있네요.”
“그렇지만 풍기는 냄새는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사 위원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도 크게 긴장이 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물어 오는 질문이 일상적인 대화처럼 느껴졌다.
근데 저 파키스탄 요리사의 표정은 왜 이렇게 굳어 있을까.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거 같은데….
심사 위원들의 질문에 파키스탄 요리사는 로봇처럼 형식적인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분입니다. 지금까지 만들고 있던 요리는 정리해 주시고, 심사석으로 완성된 음식을 가져다주세요.”
간단한 재료에다 전부 베테랑 요리사들이라 그런지 주어진 90분이 부족한 사람들은 없었다.
다들 10분 전부터 음식을 완성시키고 서빙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종료입니다. 전부 하는 것을 멈추고 조리대에서 한 발씩 물러나 주세요.”
심사석에 올려진 7명의 요리들은 아주 소박했다.
평소에 각자 공관에서 하던 오, 만찬 음식들과는 아주 다른 간단한 구성들.
하지만 풍겨 오는 냄새만 맡아 봐도 내공이 가득한 음식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먼저 이탈리아 대사관 요리사의 설명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네 제가 근무하는 이탈리아의 요리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 요리 중 하나입니다. 그곳에 근무하며 많은 곳을 여행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이태리 음식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음식으로 어떻게 이탈리아 대사관을 표현하고 싶은신 건가요?”
“제가 다녀 본 이탈리아는 정말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는 채소들 역시 굉장히 맛이 좋고 건강하죠.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려서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죠. 프랑스 요리가 기교를 대표하는 요리라면, 이탈리아 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을 대표하는 요리라고 할 수 있죠.”
주방장님이 공감한다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이태리 요리가 최고라 하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습니다. 결국엔 익숙한 것에 끌리더라구요.”
누구나 겪는 일이었다. 아무리 해외 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어릴 적부터 만들어진 식습관이 단번에 변하지 않을 테지.
이태리 요리가 아무리 맛있었다 하더라도 한국 음식이 주는 만족감만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이 이태리 요리를 어떻게 만들면 제가 좋아할 만한 한국 느낌이 물씬 나는 음식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해 봤습니다.”
“본인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요?”
“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메뉴를 구성해 봤습니다. 일단 요리사인 사람이 가장 행복해야 그만큼 좋은 음식이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요리엔 만드는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기기 마련이죠.”
“맞습니다. 저는 먹는 게 좋아 요리사가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막상 요리사가 되고 보니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기도 쉽지 않더군요. 다들 공감하시죠?”
김지훈 요리사의 물음에 심사 위원들은 물론 다른 요리사들까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태리 대사관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군요. 그래서 어떤 요리를 만들었나요? 굉장히 궁금해지네요.”
김지훈 이태리 요리사가 선보인 음식은 심플 그 자체였지만 개성이 담겨 있었다. 익숙한 향이 나는 이태리 요리라고 해야 할까?
“먼저 삶은 감자를 주사위 모양으로 썬 뒤 참기름과 소금, 후추에 버무린 감자샐러드입니다. 보통은 올리브오일에 소금, 후추만 뿌려서 먹는 게 일반적인 이태리 요리지만 저는 엑스트라 버진 못지않게 훌륭한 기름이 참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다른 건 몰라도 향은 엑스트라 버진보다 강하긴 강하죠.”
“네 이 참기름의 중독성을 유럽 사람들이 많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태리를 대표하는 기름이 올리브오일이라면 한국이나 아시아를 대표하는 기름은 단연 참기름이었다. 참기름 향만 맡으면 군침이 나는 한국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였다.
“그리고 당근을 얇게 썰어 오븐에 구운 뒤 꿀과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 준 당근구이입니다. 당근의 쌉쌀한 맛을 꿀과 고춧가루로 살짝 가려 주면 이게 아주 별미가 됩니다. 출출할 때 간식으로 먹기 딱입니다.”
당근구이를 설명할 때 지훈의 표정은 끝내주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사람 같았다. 평소에도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자주 본다는 지훈.
그럴 때마다 팝콘 대신 당근을 구워 먹는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토마토 밥입니다.”
“토마토 밥이요? 그게 뭐죠?”
“어릴 때 다들 한 번씩은 케첩에 밥을 비벼 먹어 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나이가 들어서도 그게 종종 땡기더라구요.”
이번에도 요리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 역시 케첩에 밥 비벼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간단해도 묘한 매력이 있는 음식이다.
“근데 값싸고 신선한 토마토를 눈앞에 두고 굳이 설탕이 잔뜩 들어간 케첩을 쓸 필욘 없죠. 그래서 저는 토마토를 아예 통으로 넣어 밥을 지어 봤습니다.”
“그거참 독특한 요리법이네요.”
“네. 토마토를 통으로 넣고 밥을 지은 후 잘 비벼 주면 쌀에 감칠맛이 제대로 스며듭니다. 거기에 소금 약간과 통후추를 갈아 향을 더해 주고, 마지막으로 역시 참기름 약간. 그러면 아주 끝내주는 별미가 됩니다.”
김지훈 요리사는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들 기세였다. 대회 음식이 아니라 마치 자기 밥상을 차린 듯한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굉장히 수준 높은 음식이었다.
“신선한 재료에 한식풍의 조미료를 적절하게 잘 사용한 음식들이네요. 특히 이 토마토 밥은 굉장히 훌륭합니다. 이태리 음식에서 토마토를 빼면 말을 할 수가 없고, 한국 음식에서 쌀을 빼면 또 말을 할 수 없으니 이건 한국과 이태리의 적절한 조합이었습니다.”
“심사 끝났으면 이거 한입 먹어도 됩니까?”
“하하하 그렇게 하세요.”
김지훈 요리사는 끝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심사 위원들은 그 모습이 웃긴지 한참 동안이나 소리 내어 웃다가 다음 참가자에게 향했다.
만약 지훈의 음식이 형편없었다면 주방장님은 분명 장난스럽게 행동하지 말라고 꾸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웃고 있는 걸 보면 지훈의 음식이 수준급이란 의미.
“다음은 파키스탄 요리사님의 설명이 있겠습니다.”
줄곧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던 파키스탄 대사관의 이승재 요리사의 음식이 공개되었다.
“아 잠시만요.”
“네?”
승재는 음식을 공개하자 뭔가 발견한 듯 냅킨을 가져와 접시 이곳저곳을 닦았다.
“아무것도 묻은 게 없는데요?”
“접시 끝에 지문이 좀 찍혀 있어서요.”
“아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설명 시작해 주세요.”
그래도 뭔가 놓친 게 있는 듯 자신의 음식에 코를 박고 한 번 더 살펴본 뒤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일하는 파키스탄은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나라로, 인구는 약 2억 3,000만 명이고, 종교는 이슬람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치 외워 온 사람처럼 파키스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무슬림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장수의 나라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고기보다 채소를 많이 먹고, 말린 살구를 즐겨 먹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음식에 대한 설명 역시 로봇 같았다.
파키스탄 요리사가 선택한 세 가지 재료는 양배추와 토마토 그리고 감자였다.
“제가 준비한 음식은 기름 없이 구워 낸 감자빵과 양배추와 토마토를 넣고 끓인 스프입니다.”
“스프도 훌륭하지만 이 감자빵은 식감이 감자전과는 조금 다른데 어떻게 만든 건가요?”
“감자를 삶아서 체에 거른 다음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약불에서 오랫동안 구워 줍니다. 파키스탄이었다면 화덕을 이용했겠지만 팬으로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근데 이 감자빵 모양이 원래 이렇게 동그란가요? 제가 알기론 투박한 모양이 매력이라 생각하기도 한다는데 이 빵들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낸 것처럼 모양이 일정하네요.”
“아…. 그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이승재 요리사의 음식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훌륭하지만 기계적이다랄까?”
토마토와 양배추를 넣고 끓은 스프의 건더기의 모양조차 일정했다. 또 접시에 담은 양은 계량컵을 이용할 정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었고.
감자빵 역시 손으로 반죽을 만들었는데도 크기와 모양이 일정했다. 깔끔하고 보기엔 좋았다.
그걸 트집 잡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음식이랄까.
“하지만 음식들의 맛은 굉장히 훌륭합니다. 김지훈 요리사의 꼼꼼한 성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태리 요리사만큼 개성이 담겨 있진 않았지만 내공이 엄청난 요리였다.
심사 위원들 역시 맛을 보며 여러 번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칼질과 분량 조절.
게다가 접시에 지문이 묻은 것도 허용하지 않는 김지훈 요리사였다.
“다음으로 파나르 요리사님 요리 설명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모든 요리사들의 설명이 끝난 후 내 차례가 돌아왔다. 짧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