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92화 (93/202)
  • 92. 왜 거기서 나와

    “3가지요? 재료를 3가지만 쓸 수 있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전 세계 공관의 상황은 전부 다르지만 이 재료들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입니다. 이것들을 이용해 여러분들의 공관을 표현해 주시면 됩니다.”

    예상과는 다른 미션이 주어지자 요리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최고급 재료들을 가지고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하라는 미션 정도를 예상했었는데.

    공개된 식재료들은 평범 그 자체였다.

    “내일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재료는 양파, 감자, 당근, 양배추 그리고 토마토 이 다섯 가지입니다. 혹시 이 재료가 수급이 어려운 공관이 있다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본부 직원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주어진 5가지 재료는 확실히 세계에서 제일 많이 소비되고 있는 채소들.

    가격의 차이는 있겠지만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들임은 분명했다. 다만 고기나 생선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바다가 없는 나라들도 있을 테니깐 아예 빼 버린 것 같았다.

    “이것으로 만찬처럼 메뉴를 준비하라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일상식처럼 반찬을 만들라는 건가요?”

    “그건 요리사님들의 자유입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이 재료들을 이용해 본인이 일하고 있는 공관을 표현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

    재료는 한정되어 있고, 주제는 광범위했다.

    자신이 일하는 공관들을 음식으로 표현해라라….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정리하자면 제1회 올해의 재외 공관 요리사 선발 대회 2라운드 미션은 양념, 조미료, 쌀을 제외하고 저 중 3가지 재료만 골라 음식을 만드시면 됩니다.”

    “그럼 선택한 3가지 재료의 양은 충분히 써도 되나요?”

    “네 선택한 3가지 재료의 양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나마 위안거리가 생겼다.

    양이라도 넉넉하게 쓸 수 있으니.

    지금부터 머리를 좀 쥐어짜 봐야겠다. 어떻게 이 미션을 풀어 가야 할지 아직은 감이 잡히질 않았으니까.

    “미션이 난해하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단순히 경쟁이 아니라 각국의 공관 상황이 어떤지 또 관저 생활이 어떠한지 요리사분들의 관점에서 파악해 보기 위함입니다.”

    대회의 주제는 1라운드 때부터 확실했다.

    외교관들은 보통 몇 달간의 교육을 마치고 실무에 투입이 된다. 제대로 된 매뉴얼과 교육 시스템을 통해 해외에 가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재외 공관 요리사들은 달랐다.

    이미 요리에 익숙한 베테랑들을 뽑겠지만 귀빈을 대접하는 의전이라든가 관저처럼 낯선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요리사들이 많았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라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이번 대회는 요리뿐만 아니라 마치 교육을 받고 투입된 요리사처럼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공관 생활에 스며드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 * *

    다음 날 대회장 대기실.

    요리사들은 준비된 대기실에서 조리복과 도구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파나르 요리사 장덕수라고 합니다.”

    “아! 장덕수 요리사님이세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태리에서 근무하는 김지훈이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모여 있는 6명의 요리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 이름을 듣자 요리사들은 자연스레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오 스타 셰프를 여기서 직접 뵙는군요.”

    “스타 셰프라니요.”

    “제가 재외 공관 요리사로 일한 지 7년째인데 요리사의 이름이 알려진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근데 젊으신 분이 대단하네요.”

    “맞아요. 장덕수 셰프 정도면 스타가 맞습니다.”

    그룹 채팅방에서 이미 오랫동안 대화를 했어서 그런지 처음 본 사람들이었지만 금세 가까워졌다.

    그리고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2라운드 주제로 향했다.

    “주어진 재료들이 조금 간단해서 그걸로 오, 만찬까지 표현하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던가요?”

    “맞아요. 저는 그래서 저를 위한 음식을 만들기로 했어요. 해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저를 위한 요리.”

    “저는 그래도 제가 있는 나라의 음식을 좀 어떻게든 만들어 볼까 합니다.”

    다들 선택한 재료는 다르지만 생각하는 건 비슷했다. 재료가 너무 간단해서 오, 만찬처럼 거한 상차림은 힘들다는 것.

    나 역시 김용수 대사에게 아침밥을 만들어 준다는 상상을 하며 메뉴를 구상하고 있었다.

    “근데 다들 공관 생활은 어떠세요? 생각보다 힘들다고 하던데.”

    그룹 채팅방 덕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말고 다른 요리사들의 생활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휴우 말도 마세요. 저희 대사님은 반찬 투정이 어찌나 심한지…. 그래도 시간 날 때마다 이태리 여행하며 맛있는 거 먹는 재미로 삽니다. 파나르는 좀 어때요?”

    “저요? 저는 뭐 같이 일하는 대사님이 좋으셔서 편합니다.”

    “와아 그게 진짜 행운인데….”

    “맞아요. 저는 이슬람 국가라 마트에서 술도 안 팔아요. 스트레스 풀 게 없어요. 저도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는 재미로 삽니다. 술이 없어서 아쉽지만.”

    다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지만 각자 자기만의 방식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이런 대화에 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분은 어디에서 온 요리사예요? 계속 혼자 계시길래.”

    “저분요?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오셨대요.”

    어제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눈에 띄었던 한 사람.

    말도 없고,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는 파키스탄 요리사였다.

    너무 긴장해서일까. 굳어 있는 표정을 향해 걸어가 말을 붙여 보았다.

    “안녕하세요. 파나르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장덕수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승재라고 합니다.”

    “파키스탄에서 근무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죠?”

    “네 맞습니다.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근무 중입니다. 반갑습니다.”

    예상과 달리 파키스탄 요리사 승재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내가 말을 걸자 축 처져 있는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훈련된 사람처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고 계셨어요? 다른 요리사분들하고 대화 좀 나누고 그러시지.”

    “아 저요? 긴장이 좀 돼서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네요.”

    과도한 긴장 탓이라는데 승재의 표정은 어제부터 굳어 있었다. 미션이 공개되기 전부터.

    “파키스탄 대사관 환경은 좀 어떤가요? 일하기 괜찮은가요?”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파키스탄에 대해서 물었다.

    “아…. 저 그런 건 나중에 말씀해 드리면 안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편한 대로 하세요.”

    그냥 평범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 승재는 과도하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괜히 민망해져 그런 승재를 뒤로하고 다시 요리사들 사이로 돌아왔다.

    “파키스탄 요리사분은 긴장이 많이 되시나 봐요.”

    “저분 어제부터 표정이 안 좋으시던데. 그냥 원래 성격이 저런가 봐요.”

    “파키스탄 일이 많이 힘든가….”

    “소문을 듣자 하니 파키스탄 대사님 성격이 굉장히 까다롭다고 하던데 그 영향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거긴 관저뿐만 아니라 그냥 생활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다고 하던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요리사들 역시 승재의 표정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동병상련의 처지라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깐 파키스탄 채용 공고가 엄청 자주 올라오긴 했어요. 요리사들이 자꾸 바뀐다는 증거 아닐까요?”

    “그거면 확실한 증거죠. 요리사들이 새로 뽑혀도 못 버티고 자꾸 관둘 정도로 힘든 거죠.”

    “흔한 일이죠 뭐.”

    다들 승재의 입장을 안쓰러워하면서도 공감하고 있었다. 자기들도 한 번씩을 겪어 봤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조우영 요리사님도 왔던데.”

    “저도 인사했어요. 근데 이제 그분이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요? 요리사들 대우가 그나마 이만큼 올라온 건 그분 덕분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또 다른 분들이 나서 주겠죠. 아니면 우리끼리라도 뭉쳐서 한번 해 봅시다.”

    “좋습니다. 일단 대회 끝나면 다 같이 회식 한번 어떠세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어려운 처지에 놓은 요리사들은 금세 단합이 되었다. 파키스탄 요리사 승재 역시 이쪽을 힐끔힐끔 고개를 돌리며 눈치를 봤지만 결국 엉덩이를 떼진 못했다.

    그렇게 경쟁자의 느낌보다는 동료의 느낌으로 대회장으로 들어섰다.

    역시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끈끈함이란.

    금세 친구가 되고,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 버린다.

    “자 그러면 [제1회 올해의 재외 공관 요리사 선발 대회] 대망의 2라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대회 시작에 앞서 장관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2라운드 때는 공문에 적힌 대로 장관이 직접 자리에 참석했다. 덕분에 대회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오늘 심사를 맡아 주실 심사 위원 여러분들을 모셨습니다.”

    진행자의 안내 멘트 후 단상에는 세 명의 심사 위원이 올라왔다.

    심사 위원들은 한 명씩 나와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후우후우.”

    막상 대회가 임박하자 심장 박동수가 빨라졌다. 긴장이 되어 단상에 올라온 심사 위원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청와대에서 한식을 담당하고 있는 조근배입니다. 먼저 세계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힘써 주시는 요리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오늘 제대로 실력 발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서포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 청와대 요리사?”

    청와대 요리사라는 말에 긴장감은 사라지고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저것이 내가 진짜 원했던 건데….

    게다가 청와대에서 한식 담당 요리사라니.

    반가운 맘에 조근배 요리사를 쳐다보려 했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곳에는 반가운, 아니 당황스러운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는 이곳 H호텔에서 총주방장을 맡고 있는 김상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뭐지? 주방장님이 왜 저기에 있지?”

    저 자리에 서 있는 주방장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왜 공항에 마중을 나오지 못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이번 대회 심사 위원을 맡게 됐을 줄이야.

    주방장님 성격이라면 절대 형평성에 어긋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테지. 경력이나 나이 따위는 무시하고 오로지 실력과 성실함만으로 직원들을 대했던 사람이니까.

    심사 위원이 사적으로 참가자를 만나는 걸 허용할 수 없었겠지.

    섭섭했던 마음이 단번에 풀어졌다.

    “여기 심사 위원석에 계신 3분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요리사들입니다. 심사 위원이기도 하지만 요리계의 선배로서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박수와 함께 요리 대회가 시작이 되었다.

    나는 심사 위원석에 앉아 있는 주방장님과 눈을 마주치려 노력했지만 주방장님은 끝내 날 외면했다.

    본인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곳에서 원하는 재료 3가지만 챙겨서 요리를 시작해 주시면 됩니다. 자신이 가장 맘에 들고, 신선한 재료를 골라 주세요!”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재료를 향해 달려갔다.

    비록 3가지밖에 고르지 못하지만 그나마 좋은 상태의 재료를 고르는 것도 중요했다. 같은 재료라도 자기가 원하는 크기나 모양의 재료를 골라야 했으니.

    특히 이태리 요리사 지훈은 재료를 고르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파이팅하세요 요리사님.”

    “감사합니다. 요리사님도 파이팅.”

    그렇게 서로를 응원하며 모든 재료를 골랐다.

    “그럼 이제 재료 창고의 문을 닫겠습니다. 문이 닫히면 더 이상 재료를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나는 골라 온 재료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감자와 양배추, 그리고 양파.

    나는 관저로 출근하는 이름 아침을 떠올리며 이 3가지를 골라잡았다.

    “그러면 주어진 조리 시간은 90분입니다. 90분 동안 3가지 재료를 이용해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공관을 맘대로 표현해 주시면 됩니다. 요리! 시작해 주세요.”

    커다란 징 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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