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제스의 제안
“제 이름이요?”
제스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내 이름이 파나르 곳곳에 걸리는 건 좀 부담스러운데.
제스의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거절하고 싶었다.
“그건 좀 부담스러운데요 제스.”
“그래요? 풀 네임이 아니라 그냥 스펠링 정도만 쓰려는 거예요. 그것도 안 될까요?”
“스펠링 정도요?”
“네 제스와 미스터 장. 둘 다 J를 쓰니깐 J&J 분식. 제스 앤 장스 분식. 어때요?”
“아하.”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간판의 의미가 뭔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서 제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식당 이름을 만드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했다.
“저는 파나르에 제 이름이 적힌 간판들을 보면서 항상 긴장하고, 동기 부여를 하곤 합니다. 제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면 저는 그날부터 그 매장에서 근무를 시작해요.”
“대단하네요 역시. 근데 직원들은 피곤하겠어요.”
“손님들은 이 J&J의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알잖아요. 파나르에 있는 동안은 나처럼 이 가게를 보면서 동기 부여를 하면서 지내 봐요. 그러면 꼭 원하는 대통령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라면 나쁘지 않네요.”
“그리고 미스터 장 정도의 실력이면 앞으로 유명해지는 걸 피할 순 없을 거예요. 그건 필연적인 거죠. 이참에 즐겨 봐요 유명세를.”
제스의 말을 듣고 나니 부담스럽다는 감정이 조금 사라졌다.
처음 호텔의 주방장이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원치 않았는데 자꾸 내 이름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웠었다. 비록 아무도 보지 않는 뉴스였지만 생전 처음 기사에도 이름이 적히고, 특강을 할 때도 내 이름이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리는 게 정말 부담스러웠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왜 그렇게 소극적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해지면 불편한 것도 많았겠지만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겼을 텐데.
똑같은 선택을 또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결과가 어떨진 몰라도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제스 말대로 이번 생에는 유명해지는 것을 굳이 피하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이번 생? 여튼 즐겨 봐요.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그리고 유명해지면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어요.”
“뭔데요?”
제스는 대답 대신 엄지와 검지를 비비는 시늉을 했다. 돈을 의미하는 거겠지.
“유명해지면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이 따라와요. 저는 J&J 분식에서 J 하나를 공짜로 쓸 생각 없어요. 잘되는 만큼 반드시 미스터 장에게 돌려줄 거예요.”
“하하하 그 정도로 성공하면 저도 거절하지 않고 기분 좋게 받을게요. 그래서 이 J&J 분식은 언제 오픈할 예정인가요?”
“건물을 다 짓고,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하면 아마도 5월쯤? 그때 한번 와 줄 수 있죠?”
“당연하죠. 그때쯤이면 한국에 갔다 온 후가 되겠군요.”
“한국에 가요?”
“네 요리 대회에 참가하러 갑니다.”
제스에게 재외 공관 요리사 선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단 걸 알려 주었다.
“오우 행운을 빌게요. 타지크 국왕에게 훈장을 받고, 대한민국 장관에게 상을 받은 요리사가 우리 분식집의 메뉴를 만들었다라…. 홍보 효과 최고겠는데요?”
“에이. 상은 아직 받은 게 아니잖아요.”
“걱정 마세요. 미스터 장은 반드시 받을 겁니다. 제가 보장할게요.”
“하하하 고마워요 제스.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우리 J&J 분식 잘 만들어 줘요.”
“물론!”
제스는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 표정을 보니 제스의 태도 또한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해낸 일에 대해서는 100% 당당하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태도.
또 다른 사람의 성과에 대해선 질투하지 않고, 온전히 인정해 줄 수 있는 그런 태도. 제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격지심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
쓸데없이 겸손하고, 양보하는 자세로 얻은 게 뭐가 있었나. 젊고 앞길 창창한 요리사들의 인생을 꼬이게 한 거? 30년간 호텔이나 레스토랑 말고는 아무런 도전도 해 보지 못한 거?
내가 잘 해낸 일에 대해 스스로 잘했다고 말할 수 있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공을 남들에게 돌리고, 겸손해도 다 알아줄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내 능력과 실력 그리고 결과를 정확하게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
“제스 앤 장스 분식. 나쁘지 않네.”
“파나르 유명 인사가 되겠구만. J&J의 장덕수?”
“그렇게 될 거니깐 지금부터 잘해라. 나중에 바빠지면 만나지도 못하게 될 테니까.”
“헐. 원래 이런 캐릭터였어?”
“아니 지금부터 이런 캐릭터로 살아 보려구.”
오랜만에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파나르 길거리를 걸었다.
* * *
외교부 본부.
“이번 대회 준비는 잘되어 갑니까?”
“네 장관님. 7명 요리사들에게는 항공료가 이미 지급되었고, 숙박이랑 주방 대관은 H호텔에 요청해 놨습니다.”
“이번 7명 중에 장덕수 요리사도 포함된 거죠?”
“네 조금 눈여겨보라고 해서 봤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독보적이더라구요.”
“그래요?”
외교부 장관은 이번 대회가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냥 가벼운 행사처럼 지나가려고 했는데 대통령이 이 행사에 대해 알아 버렸다.
그렇다고 본인이 직접 참가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대회의 취지가 재밌겠다며 자신의 요리사를 직접 심사 위원으로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님한테 보고가 될 내용이니깐 좀 더 신경 써서 준비해 주세요.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면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쇼. 말씀하신 대로 2라운드 주제도 조금 특별하게 준비해 봤습니다.”
“그래요. 아무런 목적 없이 이런 행사를 여는 게 아니란 걸 보여 줘야죠. 이참에 요리사들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교육 매뉴얼을 만들어 보는 것도 어떨까 하네요.”
“좋은 아이디어이십니다. 요리사들의 수준이 어떤지 보고 한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해 줘요.”
계획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장관은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7인의 요리사 수준이 장덕수 셰프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이번 대회에서 꽤 재밌는 장면이 연출될 거라 예상했다.
* * *
“갔다 오겠습니다!”
“요리사님 꼭 상 받아 오세요.”
“그럴게요. 기대하고 계세요.”
대사관 직원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장관님에게 선물받은 칼과 파나르에서 구입한 각종 도구들. 어느새 손에 익어 이것들이 아니면 실력 발휘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캐리어에는 3일간 입을 속옷 몇 장과 조리 도구들만 가득했다. 옷은 어차피 조리복만 입고 살 테니까.
게다가 이번에 본부에서 제공해 주는 숙소는 내 홈그라운드 H호텔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H호텔의 주방이 내 홈그라운드였지만 익숙한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했다.
행운의 신이 나를 향해 있었다.
* * *
인천 공항.
“덕수야! 장덕수!”
“어? 한샘아! 잘 지냈어? 근데 혼자 있어?
“응 당연히 혼자지. 나 말고 또 마중 나온다는 여자가 있기라도 했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한국에 가는 날이 정해지자 나는 가장 먼저 한샘과 주방장님께 연락을 했다.
주방장도 분명 마중을 나올 것처럼 얘기했는데 공항에는 한샘뿐이었다.
뭐 갑자기 호텔에 바쁜 일이라도 생긴 거겠지.
조금 서운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보고 싶었어 한샘아.”
“나도 보고 싶었어 덕수야.”
우리는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에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이전 삶에선 매일매일 12시간 이상 얼굴을 보며 일하던 사이였다가 이렇게 장거리 연애를 하려니 더욱 애틋해졌다.
“오늘 일하는 날이야?”
“응 오후에 출근해야 해.”
“그럼 호텔로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숙소가 어차피 우리 호텔이라며?”
“어?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호텔에서 소문이 쫙 났는데. 방도 좋은 거 예약했던데?”
오랜만에 남자 친구 역할 좀 해 보려 했는데 한샘은 전부 알고 있었다.
“진짜? 설마 스위트룸?”
“그 정도는 아니고 최고급 스탠다드룸으로 예약되어 있더라.”
“에이 그럼 그렇지.”
“대신 내가 일하는 카페에 내려오면 공짜로 커피 한 잔쯤은 줄게.”
이 정도만 해도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충분했다.
한샘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안정이 되었다.
“근데 이번에 숙소 말고 주방도 대관했던데. 대회도 여기서 하는 거 아니야?”
“방이 아니라 호텔 주방도 대관했다고?”
“응 내가 듣기로는 숙소랑 주방도 하나 예약한 걸로 알고 있는데. 대회를 어디서 하는지는 몰랐어?”
“응 아직 얘기를 들은 건 없어. 아무 말도 안 해 주더라.”
한국에서 열리는 2라운드에 대한 내용은 그 후로도 아무것도 전달받은 게 없었다.
도착하면 오리엔테이션을 통해서 알려 주겠다는 말뿐.
“F&B팀에서도 그날 몇 명 지원해 줘야 한다고 스케줄 바꾸고 그랬어.”
“그게 정말이면 대박인데?”
“덕수 너한테는 완전 홈그라운드다 그치?”
소문이 사실이라면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내가 이 호텔 출신이란 걸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그냥 제일 가까운 호텔이라서 선택한 걸까. 사실 회귀한 나는 저들에겐 풋내기 요리사일 뿐. 이 호텔 출신이란 걸 알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에게 점점 유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근데 대사관 요리사들 정도면 다 호텔이나 레스토랑 근무를 해 본 사람 아니야? 금방 적응하지 않을까?”
“그렇긴 해도 우리 호텔에는 한샘이 네가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내가 유리한 거지.”
“그런가? 그렇게 말해 주니 기분이 좋긴 한데.”
“당연하지.”
대회는 심리적인 요인이 결과를 좌지우지한다.
얼마나 긴장을 안 하고 최대한 실력 발휘를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30년이나 일했던 호텔 주방에서 대회를 한다? 무조건적으로 내가 유리했다.
이런 상황이면 어떤 주제가 나와도 자신 있었다.
* * *
다음 날 외교부 본부.
“안녕하십니까, 요리사 여러분. 바쁘신 와중에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부에 모인 요리사들은 예상대로 연령대가 제법 있어 보였다. 정확한 나이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가 제일 어린 요리사라는 거.
그렇지만 다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딱 한 명만 빼고.
유독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요리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오늘은 재외 공관 요리사들을 위한 요리 대회 2라운드에 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만 진행하려고 합니다.”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아시겠지만 숙소는 H호텔을 오늘부터 3일간 이용하시면 되고, 대회 역시 H호텔 주방에서 진행될 겁니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반면 다른 요리사들은 주방은 어디든 개의치 않는 듯 표정에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역시 베테랑들다웠다.
“그럼 대회 전에 주방을 좀 둘러봐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오늘부터 편하게 둘러보시고, 연습도 해도 되니깐 맘껏 사용하세요.”
“좋군요.”
주방은 요리사들에게 대회가 시작되기 전 24시간 내내 자유롭게 개방이 되었다. 충분히 적응할 시간을 주겠다는 것.
하지만 이곳에 모인 요리사들은 고작 몇 분이면 파악이 완료될 것이다.
“그러면 2라운드 주제는 뭔가요? 오늘이라도 말해 주시면 미리 연습이라도 좀 하고 싶습니다.”
“맞습니다. 무슨 기밀이길래 한국에 올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해 주시는 겁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요리사들 모두 이 부분에 대해선 불만이 많이 쌓여 있었다.
꼼꼼하게 준비해도 그걸 구현해 내는 게 쉽지 않은데, 이번 대회는 완전 맨몸으로 왔다고 해도 무방했다.
“미리 주제에 대해서 말씀 못 드린 점 여기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건 이번 대회의 취지를 위해 공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대회를 담당하는 본부 직원은 종이 한 장씩을 건네며 말을 이어 갔다.
“현재 전 세계에는 184개의 대한민국 공관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중 선진국이나 산유국처럼 상황이 좋은 나라도 있겠지만 전기도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고, 제대로 된 마트나 시장도 없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공관들도 제법 있습니다.”
담당자의 말대로 전 세계 모든 공관의 상황이 똑같지는 않았다. 정전이 잦아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써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인 공관들도 존재했다.
그래서 요리사들 역시 지역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기도 했다. 특수지 수당이 붙어서.
“그래서 이번 대회의 2라운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는 단 3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