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자신 있는 요리
“첫 번째 음식은 해물냉채입니다.”
타지크에 다녀온 뒤 신선한 해산물의 소중함을 더욱 알게 되었다. 그 후론 오, 만찬 행사를 진행할 때 꼭 하나씩은 해산물 요리를 내고 있었다.
“살짝 데친 오징어와 대하, 광어회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소금 간을 해 둔 뒤 잣, 호두, 땅콩을 갈아서 만든 고소한 냉채 소스에 버무린 음식입니다.”
“잣에 버무려요?”
“네 고소하고 부드러운 냉채 소스가 신선한 해산물과 잘 어울릴 겁니다.”
보통 냉채라고 하면 새콤달콤하고 톡 쏘는 겨자로 만든 소스를 먼저 떠올린다.
물론 겨자 소스로 만든 냉채도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로 적합했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너무 자극적이고, 강한 음식은 전채 요리로 피하는 편이 낫다.
게다가 신선한 해산물들의 맛을 죽일 수도 있는 겨자 소스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겨울의 끝 무렵이긴 하지만 신선한 해산물을 먹기에 최고의 계절입니다. 이 소스와 함께 해산물의 맛을 충분히 즐기시면 됩니다.”
“키야. 고소하면서 달콤하기도 하고, 꾸덕한 소스랑 해산물이 잘 어울리네요.”
“이건 처음 먹어 보는데 아주 좋네요. 겨자 소스도 맛있긴 한데 나는 먹을 때마다 속이 쓰려서.”
“그건 저도 그래요.”
역시나 전체적으로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겨자 소스를 먹고 나면 종종 속이 쓰리다고 했다.
격하게 공감되는 말이었다.
나이가 조금 들다 보니 자연스레 담백한 음식을 찾게 된다. 짜고 자극적인 음식만 즐기던 젊었을 적 내 식습관도 세월을 거스르진 못했다.
회귀했다지만 담백한 음식을 찾는 입맛은 여전했다.
“오늘 음식들은 전체적으로 크게 자극적인 건 없을 테니 많이 드셔도 됩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간이 약하거나 맛이 없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럴 일은 없으실 테니 걱정 마세요.”
일 년에 한 번 초대받을까 말까 한 관저에서 심심하고, 맛없는 요리를 먹을 수 없지.
법인장들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런 음식이 내가 추구하는 음식이고,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었다.
1라운드 미션 중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보여 주기 위해 이런 만찬 음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음식은 대파죽입니다.”
“대파죽이요?”
쌀은 깨끗하게 씻어 하룻밤 동안 완전히 불려 준다.
넓은 냄비에 참기름과 잘게 썬 대파를 넣고 약불에서 향긋한 파 향을 뽑아낸다. 그리고 불린 쌀을 살짝 갈아 대파와 함께 한 번 더 볶아 준다.
“그리고 육수를 넣고, 약불에 서서히 끓여 주면 달큰한 대파죽이 완성됩니다.”
“들어간 재료가 대파와 쌀이 전부네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 대파는 제가 작년 가을 관저 뒷마당에서 직접 기른 대파입니다.”
“직접 길러요? 설마 우리를 위해서?”
“네 관저에 오시는 모든 손님들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려고 직접 길렀습니다.”
대파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에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직접 기른 대파라는 말에 법인장들은 기분 좋게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맛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파와 쌀만으로도 이렇게 깊은 맛을 낼 수 있군요.”
“아마도 유기농 대파라서 그런 거겠죠?”
“네 맞습니다. 중국산이 아니라 직접 기른 대파라서 그런 맛이 나는 겁니다.”
비록 얼려 둔 대파였지만 그 향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 향을 최대한 뽑아내는 건 요리사의 기술이었고.
그 정도는 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음식은 이곳 파나르에 와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레시피였다.
“다음은 돼지고기 수육과 장아찌입니다.”
알렉스의 생일 때 특별한 애저찜을 선보이기 위해 두 가지 요리법을 사용했었다.
오랫동안 맛나고 부드럽게 찌기, 그리고 깔끔한 숯 향을 입혀서 구워 내기.
이 두 가지 방식을 이용해 더욱 강력한 나만의 수육 레시피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이 깻잎, 부추, 오이 장아찌 역시 전부 작년에 직접 수확한 채소들도 담가 둔 장아찌입니다. 몇 달을 묵혀 둔 거니 이건 음식이 아니라 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죠.”
겉은 숯불에 구워 내 노릇노릇했지만 수육의 속살을 젓가락으로 건들면 으깨질 정도로 부드럽게 익어 있었다.
“게다가 이 부추는 남자에게 더 좋은 채소인 건 다들 잘 알고 계시죠?”
“흐음. 들어는 봤습니다.”
“이런 부추와 돼지고기가 궁합이 좋은 건 굳이 말 안 해도 잘 아실 거구요.”
쌈장이나 별도의 소스 없이 굵은 소금 몇 톨과 3종류의 장아찌.
그리고 잡내가 없이 부드럽게 삶아 낸 수육의 조합은 오늘 법인장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었다.
맛있게 먹어 주는 법인장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군침을 삼켰다.
“그럼 이쯤에서 술도 한잔 곁들여 볼까요?”
“좋습니다. 안 그래도 고기가 들어가니깐 알코올도 생각나던 참이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음식을 준비해 준 우리 요리사도 같이 한잔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이죠. 좋습니다.”
술을 한잔한다는 말에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는데, 김용수 대사가 나를 자리에 앉혔다.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용수 대사는 음식이 특히 맘에 들거나 오, 만찬의 분위기가 좋은 날에 종종 나를 불러내 자리에 앉히곤 했다.
“제가 우리 장덕수 요리사 덕분에 맘 편히 손님들을 관저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저라도 맨날 손님들 초대하겠습니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척하면 척입니다. 손님들의 나이, 직업, 성향에 따라서 알아서 척척 메뉴들을 내주니 제가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요리사님에 대한 대사님의 믿음이 굉장하신가 봅니다.”
김용수 대사의 칭찬에 쑥스러워 뒷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칭찬을 아끼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과하게 느껴졌다.
카메라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김용수 대사의 눈빛을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일부러 나를 띄워 주고 있었구나.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고마웠다.
“그럼 저는 또 다음 음식을 준비하러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요리사님.”
오늘 메뉴의 컨셉은 확실했다.
다음으로 준비한 음식은 직접 키운 콩나물을 넣고 끓인 육개장.
소고기가 값싸고 맛이 좋은 파나르에선 고깃국을 끓이기만 하면 종류 불문하고 훌륭한 맛이 난다.
게다가 굵직하게 길러 낸 내 콩나물이 육개장을 훨씬 업그레이드시켜 주고 있었다.
“오늘은 요리사님이 직접 기른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속이 굉장히 편하네요.”
“맞아요. 평소보다 과식한 것 같은데 더부룩한 게 없어요.”
“혹시 모자라게 드셔서 그런 건 아니시죠?”
“그럴 리가요. 배가 터질 듯이 먹었습니다.”
이게 담백한 음식들의 힘이었고, 직접 기른 채소들의 힘이었다. 평소보다 과식을 해도 위장에 크게 무리를 주지 않는 음식들.
너무 배가 부르면 오히려 불쾌해지는 기분을 가끔 느낄 때가 있다. 정성 들여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허무해진다.
“배부르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역시 소문대로 요리사님이 대단하시네요. 다음에도 한 번 더 초대해 주세요.”
“물론이죠. 자주 뵐 수 있을 겁니다 법인장님.”
법인장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관저를 빠져나가자 김준우 서기관의 카메라는 꺼졌다.
“후우 수고하셨습니다 서기관님. 촬영하느라 주방이랑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없으셨을 텐데.”
“괜찮습니다. 우리 파나르 대사관이 더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그렇게 텃밭을 일구는 모습에서부터 며칠 동안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관저를 빠져나가는 손님들의 모습까지.
하나의 짧은 드라마가 완성되었다.
덩달아 발전한 김준우 서기관의 편집 기술의 도움을 받아 꽤 그럴싸한 영상이 본부로 전달되었다.
이제 1라운드의 결과만 나오기를 기다리며 혹시 모를 2라운드를 준비했다.
* * *
-안녕하세요 요리사님들.
-안녕하세요 장덕수 셰프님.
-다들 요리 대회 1라운드에 참가하셨습니까?
-당연하죠. 조우영 셰프님이 되도록 전부 참가하라고 해서 바쁘지만 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요리사들이 이번 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각기 가진 무기들로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기나긴 에세이로 1라운드에 참가한 요리사들도 있었다.
요리사들이 보낸 음식 사진을 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와 역시 요리사님들 실력이 장난 아니네요.
-장덕수 셰프님은 더 대단하시겠죠.
-그러니까요. 요리 사진 좀 보여 주세요. 좀 보고 배우려구요.
여러 요리사들의 부탁에 이번 만찬에 냈던 음식들의 사진을 공유했다.
-아… 이게 전부인가요?
-생각보단 평범하네요.
화려한 요리용 음식 사진들과 달리 무난한 내 음식 사진을 본 요리사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뒤 다 잘라 먹고 음식 사진만 보면 그저 평범한 음식이었으니까.
내 전체 스토리를 본다면 조금 반응이 달랐을 텐데.
괜히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그나저나 조우영 요리사님은 어떤 음식으로 1라운드 참가하셨어요?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우리들 중 재외 공관 요리사로 일한 지 가장 오랜된 사람 중 한 명인 우영의 실력이 궁금했다.
해고를 당하면서까지 후배들을 위해 싸워 주는 요리사라면 자기 일에도 분명 최선을 다했을 터.
뭔가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싶었다.
-저는 이번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네? 왜요? 우영 셰프님이 저희한테는 전부 참가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게요. 본인은 참가 안 하시고 저희한테만 하라고 하신 건가요?
-바쁜 와중에 이것까지 챙기느라 얼마나 정신없었는데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가해야 대회도 힘이 생긴다며 많은 요리사들을 독려했던 조우영 요리사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뭔가 사연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만한 사정이라든가….
내가 물었지만 채팅방에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감으로 알 수 있었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라는 것을.
-저… 사실.
한참 동안 조용하던 채팅방에 우영의 대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도 참가했습니다만….
-했는데 왜요?
-준비를 해서 참가 서류를 제출했는데 본부에서 저는 참가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네? 참가 자격이요? 이 대회에 참가 자격이 있었나요?
재외 공관 요리사라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한 요리 대회였다.
공문에도 떡하니 그렇게 적혀 있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우영만 참가 자격이 없다고 하는 건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혹시 조우영 요리사님이 대표직을 맡고 있어서 그런가요?”
우영이 껄끄러웠을 거다.
괜히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요리사를 본부로 부르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를 테니.
그냥 처음부터 배제시키는 게 나은 방법이었다.
-근데 그 참가 자격이란 게 뭐길래 자격이 안 된다고 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