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88화 (89/202)
  • 88. 스토리가 있는 요리

    [주최: 외교부 장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도 외교부 장관이 직접 주최하는 대회입니다. 적어도 시상식 땐 장관이 참석한다는 의미죠.”

    “그러면 언론도 같이 움직이겠군요.”

    “맞아요. 이 대회가 진짜 요리사들만을 위한 대회라고 생각하나요? 절대 그럴 리 없죠. 이렇게 공관의 모든 직원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단 것을 홍보하려고 대회를 개최하는 거예요.”

    김용수 대사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감이 잡혔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 대회에서 입상을 하게 된다면 요리사들에 대해 몇 마디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다.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운이 좋으면 그게 공영 방송국 카메라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 요리사들이 겪고 있는 부당함을 알린다면 본부에서도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김용수 대사는 그 방법을 추천했다.

    “근데 어찌 됐든 최소한 3등 안에는 들어야 인터뷰라도 할 텐데 가능할까요?”

    “장 셰프가 그걸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재외 공관 요리사들의 실력이 엄청날 텐데요.”

    힘든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지만 재외 공관 요리사들은 대부분 베테랑이었다. 무조건 내가 이들을 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은 감히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난 요리 대회에 나가 본 지 한참 지났으니까.

    “걱정 마세요. 장 셰프를 1차에서 떨어뜨릴 리는 없을 겁니다. 지금부터 한국에서 열리는 2라운드를 확실하게 준비해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이 대회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오죠. 이미 외부 언론에 여러 번 노출이 된 장 셰프를 뺄 필요가 없죠. 홍보 수단으론 딱인데.”

    김용수 대사의 표정은 여유가 넘쳤지만 난 아니었다. 아직은 일개 요리사일 뿐인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1라운드를 무조건 붙여 줄까.

    긴장감에 입술이 조금씩 말라 가고 있었다.

    “아주 약간의 팁을 주자면 1라운드는 요리보다 관저 생활에 중점을 두고 준비해 보세요.”

    “관저 생활이라면….”

    “진짜 요리 실력을 보여 주는 건 2라운드에서 하고, 1라운드는 슬기로운 관저 생활을 보여 주는 게 이번 대회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장 셰프는 실제로 관저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잖아요.”

    김용수 대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전해 준 공문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니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1회 재외 공관 요리사 선발 대회 1라운드는 비대면으로 진행합니다. 오, 만찬 행사를 진행하는 요리사의 모습, 가장 자신 있는 메뉴의 레시피, 그리고 관저 생활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나 사진을 제출하시면 됩니다.]

    이름은 요리 대회였지만 단순히 요리 실력만 평가하는 게 아니었다.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은 물론이고, 오, 만찬 행사를 진행한 횟수나 손님들의 난이도.

    게다가 관저에서 생활하는 모습까지도 담을 수 있으면 가산점이 부여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재외 공관 요리사라는 직업에 얼마나 제대로 녹아들어 있는지를 보겠다는 말이었다.

    특히 관저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건 공관장과 얼마나 트러블 없이 잘 지내는지 역시 점수에 반영이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꾸며 내도 표정과 분위기에서 드러날 테니까.

    “평가 기준이 재밌죠?”

    “그러게요.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나는 장 셰프가 요리가 아닌 다른 걸로 승부를 보면 좋겠다고 말한 겁니다. 요리도 아주 강력한 무기지만 장 셰프는 다른 요리사들과는 다른 무기가 있잖아요.”

    “무기라면?”

    “저와의 관계라든가… 뭐. 저만의 착각인가요?”

    “아… 아닙니다.”

    김용수 대사는 쑥스러운 듯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관저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김용수 대사가 출근하고 점심을 먹으러 오기 전. 이때가 하루 중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주방을 서둘러 정리하고, 밤새 묶여 있었던 지나를 데리고 관저 뒷마당으로 나갔다.

    “이제 힘이 장사네 장사야.”

    밤새 답답했는지 지나는 신이 나서 날 끌고 가다시피 마당으로 향했다. 이젠 성견이 되어 버려서 내 힘으로도 완전히 통제하는 게 어려웠다.

    팔이 아파 결국 잡고 있던 목줄을 놓아주고 말았다. 어차피 관저 마당은 지나가 맘껏 뛰어놀 만큼 넓었다.

    자유로워지자마자 지나가 향한 곳은 따로 있었다.

    “야! 거기는 안 돼. 제발 좀.”

    구석에 열심히 일군 텃밭을 지나가 뒤집어엎기 전에 겨우 목줄을 잡을 수 있었다.

    겨울이라서 특별히 심어 둔 것은 없었지만 그곳은 잘 보존하고 싶었다. 내게 보물 창고 같은 곳이었으니까.

    “여기는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하냐? 이런 식이면 계속 목줄을 하는 수밖에 없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텃밭은 오, 만찬 행사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파나르에서 구하기 어려운 깻잎이나 부추, 대파 등을 심어 사용해야 했으니까.

    그 옆에 토마토나 허브들도 같이 심어 오, 만찬 행사 때 직접 기른 채소들이라며 손님들에게 자랑도 했었다.

    김용수 대사 역시 오, 만찬 행사 때 빠짐없이 하는 말이었다.

    “지나야.”

    “왈왈.”

    “그러면 너 나랑 같이 촬영해 볼래?”

    흥분한 지나를 진정시키고 나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공관장들과 아무런 트러블 없이 슬기롭고, 재밌게 관저 생활을 이어 가는 모습.

    게다가 직접 기른 채소로 오, 만찬 행사를 진행하는 요리사는 그리 많지 않을 터.

    많은 재외 공관 요리사들이 한국에서 사용하던 익숙한 채소들을 구할 수 없어 요리하는 데 불편함을 호소했다.

    “지나야 네가 내 채소들을 파먹지만 않으면 재밌는 영상이 나올 것 같은데 어때? 촬영해 주면 사료 많이 챙겨 줄게.”

    “왈왈.”

    구하기 힘든 채소들을 위해 직접 텃밭을 일구고, 새싹이 돋아나는 장면부터 그걸로 만든 만찬 음식을 먹고 만족해하는 손님들의 모습까지.

    하나의 스토리 라인이 완성되었다.

    거기다 가족이 없이 혼자 해외 생활을 하는 젊은 요리사들을 위해 관저에서 반려견을 키우는 모습까지.

    김용수 대사가 말한 무기를 표현하기엔 적합했다.

    * * *

    “김준우 서기관님 저 촬영하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요리 대회에 제출할 영상 찍으시려는 거죠?”

    “네 맞아요.”

    “그럼 아주 멋지게 요리하는 모습을 찍어 드려야겠죠?”

    김준우 서기관은 어느새 촬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워크샵 땐 얻어걸렸지만 그 후로도 대사관의 기록을 남기는 전문 카메라맨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진이면 사진, 영상이면 영상.

    이제는 제법 프로의 티가 났다.

    “우선 밭 가는 모습부터 찍어 주세요.”

    “밭 가는 모습이요? 칼 가는 모습이 아니라?”

    “네. 그것부터 찍어 주세요.”

    김준우 서기관도 잠시 당황했지만 내 계획을 듣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야 아이디어 좋은데요? 요리사님 실력이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테고, 대사관 직원들이랑도 이렇게 잘 지내는 분도 드물 테니 굳이 요리 장면을 보여 줄 필욘 없겠네요.”

    “그래도 요리하는 장면은 넣긴 넣을 거예요. 진지하게.”

    그렇다고 완전히 주객전도가 되면 안 된다.

    조연의 존재감이 조금 큰 영화일 뿐, 가장 중요한 건 주인공의 매력이었다.

    “근데 요리사님 곡괭이질도 제법 익숙하시네요? 요즘 젊은 사람들 이게 뭔지도 모를 텐데.”

    “하하하 예전에 좋은 재료를 구하러 직접 산지로 가서 손을 보태기도 했거든요.”

    반은 맞고, 반은 거짓말이었다.

    어릴 적 내 고향에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손을 거들며 배웠던 곡괭이질과 진짜 좋은 재료를 구하러 강원도나 전라도로 가서 손을 보태 본 적도 있다. 가격 흥정이라도 잘해 보려고.

    “씨앗을 심고, 물도 뿌리고 조금 쌀쌀하긴 해도 햇빛이 잘 드는 곳이 금방 자랄 겁니다.”

    “신기하네요. 이렇게 채소들도 키워서 행사를 진행하는지는 몰랐어요.”

    “파나르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들이 제법 있어서요.”

    저번처럼 일주일이면 자라는 콩나물은 필요할 때마다 키워서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채소들은 다 자라는 몇 달은 걸리니깐 날이 조금만 풀리면 씨앗을 심고, 관리를 해 주면 된다.

    “지나가 카메라에 계속 나오는데 좀 묶어 둘까요?”

    “아니에요. 지나도 적당히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얀 조리복이 아니라 흙이 묻은 작업복을 입은 모습이 카메라 담겼다.

    바로 이 채소들을 사용할 순 없겠지만 봄이 지나 관저에 초대되는 손님들은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촬영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 *

    “대사님. 이번 만찬 손님들은 몇 분이신가요?”

    “저와 김준우 서기관을 포함해서 총 7명입니다.”

    “전부 한국분이시죠?”

    “네 맞아요. 이번에 요리 대회 준비도 같이하는 거죠?”

    “네 그래 보려구요.”

    “미리 양해 구해 놓을 테니 편하게 해요.”

    “감사합니다.”

    김용수 대사의 배려 덕분에 만찬을 준비하는 모습도 촬영할 수 있었다.

    이번 만찬에 초대되는 사람들은 파나르에 파견되어 있는 한국 대기업들의 법인장들.

    대부분 김용수 대사처럼 3~5년 정도 파견되어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도 장 셰프의 소문을 들었는지 만찬 때 한식이 먹고 싶다고 하네요.”

    “이제 손님들이 주문을 하네요.”

    “그러게요. 이러다가 관저가 식당이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렇게 되면 돈이나 벌죠 뭐.”

    파나르에는 이제 한국 교민들 및 주재원이나 법인장들의 수가 많아졌다. 그래 봤자 몇백 명 단위라서 내 소문은 그 안에서 금방 퍼졌다.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가 꼭 내가 아니었어도 누구나 한 번쯤은 관저에 초대되고 싶어 한다.

    관저에 초대되었다는 건 무언가 나라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초대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일이었다.

    * * *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한 기업의 법인장들이라 그런지 전부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대사관에 초대되었다고 크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상 촬영 같은 것도 쉽게 허락했을 수도 있다. 이미 하기 싫어도 사진이나 인터뷰 등을 수없이 해 본 사람들일 테니까.

    “오늘은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간단하게 만찬 모습 좀 찍겠습니다. 뭐 말을 시키거나 그럴 건 없으니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시죠. 해외에 나와 있으니깐 어찌나 증빙 자료를 보내라고 닦달을 하는지 이제 뭔가를 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오히려 제가 찾게 된다니까요.”

    “하하하 맞아요. 저도 똑같습니다. 하여튼 본사들은 증빙, 증명, 증거 이런 거 좋아하죠.”

    “공무원이나 회사원이나 다 똑같나 봅니다. 외교부도 똑같습니다.”

    “한국 회사들이 뭐 어디 가겠습니까?”

    다행히도 카메라를 켜 두고 만찬을 진행한다는 거에 큰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김준우 서기관은 주방과 홀을 왔다 갔다 하며 만찬에 참석했다.

    “요리사님 이제 음식 나와도 됩니다.”

    신년이라 간단한 세미나 겸 회의를 끝낸 김용수 대사와 법인장들은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특별히 웨이터가 없이 내가 직접 음식을 서빙했다.

    김준우 서기관의 신호에 따라 양손에 음식을 들고 주방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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