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87화 (88/202)
  • 87. 몰랐던 고충

    내가 채팅을 읽지 않은 몇 달간 많은 대화가 오갔나 보다. 대부분 불만이겠지만.

    ‘임시’ 재외 공관 요리사 대표를 맡고 있다는 조우영 요리사는 다시 한번 자신들의 목표를 확실히 말해 주었다.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는 확실한 목표를.

    -우리는 재외 공관 요리사들도 정규직으로 고용해 달라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외교관들은 그렇다 쳐도 저희와 똑같은 입장인 행정원들까지 정규직으로 채용을 하는데 왜 요리사들만 비정규직인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왜 조우영 요리사가 자신을 ‘임시’ 대표라고 소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비정규직이라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이런 대표직을 맡고 있는 걸 알면 본부나 담당 공관장이 불이익을 줄 가능성도 다분했다.

    -제가 얼마나 오래 일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근무 환경을 개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요리사님.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장덕수 셰프님 제가 따로 연락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시죠.

    재외 공관 요리사 대표 우영에게서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한테 따로 무슨 할 말이….

    -잘 지내셨어요? 최근에 아무런 말이 없으시길래 바쁘신 줄 알았습니다.

    -죄송해요 조금 바빠도 좀 더 자주 들어와 봤어야 하는데….

    처음엔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해 달라고 잔소리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우영 요리사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다름이 아니라 따로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부탁이요? 저한테요?

    얼굴도 모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에게 무슨 부탁일까.

    괜히 거절하기도 받아들이기도 곤란한 상황이 생길까 봐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룹 채팅방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최근에 재외 공관 요리사 정규직화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하시는 일도 바쁘실 텐데 고생 많으십니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우영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채팅만으로도 침울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몇 년간 본부에 항의하고 있는데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겠죠.”

    -덕분에 제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알려져서 저희 공관장과 대사관 직원들하고도 사이가 틀어졌어요.”

    역시나 예상대로 우영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리스크를 안고 일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집단이 공무원이다.

    게다가 자신의 부하 직원이 내부 갈등을 조장한다?

    그걸 좋게 봐 주는 상사는 거의 없을 거다.

    아무리 함께 일하는 직원이라도 자기 밥그릇을 자꾸 걷어차려는 직원을 곱게 볼 순 없을 테니까.

    -그래서 저는 내년 중순쯤 계약이 만료될 겁니다.”

    -만료라면 해고된다는 건가요?

    -네 사실상 해고가 맞습니다. 본부에서도 더 이상 계약 갱신을 해 줄 수가 없다는군요.

    어차피 주어진 계약 기간만 채우고 나면 해고를 해도 불법이 아니다.

    이러니 요리사들의 말은 힘이 없을 수밖에 없었고, 부당함을 봐도 쉽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든 해고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영은 곱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기진 못할지언정 최대한 진흙탕으로 끌고 가 귀찮게라도 하는 게 목표.

    -저는 뭐 할 만큼 했고, 하고 싶어도 더 할 수 없는 신분이 되었으니 후배들을 위해서 마지막 힘 좀 써 보고 가려구요. 그래서 말인데 장덕수 셰프님의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제가 뭘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까요?

    -크게 어려울 건 없습니다. 그냥 조금만 목소리를 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덕수 셰프님처럼 본부에서 이름이 알려진 셰프의 말이라면 쉽게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네 제가 무슨….

    -정말입니다. 최근에 젊은 요리사들이 많이 뽑힌 것도 그렇고, 한 번도 없었던 이런 대회가 열리는 것도 그렇고, 전부 요리사님과 파나르 대사관이 알려지고 나서부터였어요.

    우영의 말은 이랬다.

    자기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봤자 내부에선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철저히 묵살시켜 버렸다고 했다. 몇 년간 고군분투해 봤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일개 계약직이 하는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임현아 선수부터 나인티나인, 국경일 행사 등 외부에 재외 공관 요리사와 관련된 내용이 퍼지자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관심이라기보다 주의라고 하는 게 더 정확했지만.

    -이 안에선 아무리 난리를 쳐도 결국엔 묻힙니다. 외국 언론도 좋고, SNS도 좋고, 뭐든 기회가 될 때 후배들을 위해 외부에서 가끔 목소리를 내어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저도 요리사님이 저처럼 되는 걸 바라진 않습니다.

    -아….

    자신의 다짐과 달리 나에게 부탁하는 내용 자체는 소박했다. 그저 가끔씩 목소리를 내 달라는 것.

    나는 김용수 대사 덕분에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른 요리사들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나 보다.

    우영은 다른 요리사들이 안정된 상황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했다.

    -요리사님을 보고 재외 공관 요리사에 지원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에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뭐라고.

    -끝까지 그들을 책임지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장덕수 셰프님을 보고 이 길에 들어선 친구들이 많이 실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영은 그 말을 끝으로 채팅방을 나가 버렸다.

    갑자기 이렇게 부담을 주면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이런 사태에 대한 말을 들은 이상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옛 생각이 떠올라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 * *

    서울 H호텔.

    “장덕수 주방장님. 사장님 호출입니다.”

    덕수는 하얀 조리복 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사장실에 노크를 했다. 오늘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복장 하나라도 밉보일 짓을 하면 안 된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아이고 우리 총괄 주방장님. 항상 고생이 많습니다.”

    H호텔의 사장은 항상 인자했다.

    일일 알바에게도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그건 단순히 겉모습일 뿐이었다.

    “사장님 이하 임원진분들이 신경 써 주시는 덕분에 좋은 환경에서 저희가 근무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지금보다 더 좋은 근무 환경에서 일하게 해 줄 수 있는데, 제가 말한 건 언제쯤 정리가 될까요?”

    역시 거침없었다.

    부하 직원에게 예의를 지켜 주는 건 인사 한 번으로 족했다. 곧바로 본심을 드러내는 사장.

    “꼭 정리를 해야 할까요? 다들 능력이 출중한 인재들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주방장님은?”

    “네 모두가 이 호텔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사장은 며칠 전 덕수에게 주방 인원 정리를 요구했다. 일종의 구조 조정.

    특히 월급을 비교적 많이 받는 10년 차 이상 요리사들을 정리하길 원했다.

    식음료 파트의 매출은 몇 년째 오르지도, 줄지도 않는 상황.

    인건비는 몇 년째 계속 오르고 있는데 매출은 그대로라는 게 못 마땅한 모양이었다.

    매출 상승보다 유지가 더 어렵다는 걸 사장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이 호텔의 주방이 제대로 돌아가는 이유는 다 장덕수 주방장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뛰어난 리더십, 오랜 경력, 게다가 트랜드를 읽는 능력도 여전히 건재하시구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덕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장덕수 주방장님만 있다면 그 아래엔 누가 있어도 훌륭한 주방 퀄리티가 유지될 거라 판단합니다.”

    “그게 무슨….”

    “기름만 많이 잡아먹는 오래된 세단보다 팔팔한 새 경차가 낫다는 말이죠. 어차피 우린 레이서가 일류니까.”

    칭찬과 질책의 경계선에 있는 사장의 언변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쉽게 말해 중견급 요리사들을 전부 정리하고 월급이 적은 새 요리사들로 채우자는 말.

    어차피 하는 일이 같은데 왜 굳이 많은 월급을 줘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장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내 의견이 그렇다는 거지 꼭 새로운 차를 타라는 건 아니에요. 유지비만 비슷하면 난 뭐든 좋아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고정 지출만 줄이면 그만.

    신입 요리사든 중견 요리사든 인원을 줄여야 하는 상황인 건 변함없었다.

    주방으로 돌아온 덕수는 한참 동안이나 직원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한참을 생각해 봐도 가족과 아이들이 있는 중견급 요리사들을 쳐 내는 것보다 신입 요리사들을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 젊으니까.

    이곳이 아니라도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정든 차를 선택하시겠단 거군요. 뭐 저는 어쨌든 상관없습니다. 기름값만 아끼면 되니까.”

    “저희 직원들은 차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사장은 그 말에 피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급 호텔의 주방장이지만 고용인 앞에서 할 수 있는 반항은 이 정도뿐이었다.

    결국 그날은 주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며칠 휴가를 내 버렸다.

    “주방장님 잘 갔다 오셨어요?”

    “애들 맛있는 거라도 실컷 먹여서 보냈지?”

    “네 원 없이 먹이고 보내 줬습니다.”

    덕수는 차마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해 부주방장에게 카드만 건네줬었다. 고기라도 실컷 먹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맘은 불편했다.

    빨리 현실을 인정하고, 정신없이 일하는 편이 나았지만 쉽게 칼이 잡히지 않았다.

    “저 주방장님 이거 한번 읽어 보세요. 막내가 주방장님 주라고….”

    “막내가?”

    부주방장이 건넨 것은 편지 한 장이었다.

    글자 몇 자 적힌 게 전부였지만 그것을 보고는 억지로 잡은 칼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는 장덕수 주방장님. 비록 몇 달이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떠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다시는 칼을 잡지 않을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최고라는 호텔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요리사라면 저는 요리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있는 동안은 감사했습니다.]

    대학 때 덕수의 특강을 듣고 호텔에 지원했다는 막내. 그 누구보다 똘똘하고, 재능이 넘치는 아이였기에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컸던 거겠지.

    이번 기회에서 완전히 요리계를 떠나 버리겠다는 막내의 말은 은퇴를 할 때까지 덕수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대사관 관저.

    “김용수 대사님.”

    “네 장 셰프. 아침이 아니면 요즘은 대화할 시간도 거의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가요? 말씀해 보세요.”

    예전 호텔에서 있었던 일까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우영에게 닥친 상황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해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재외 공관 요리사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난 김용수 대사와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깐 먼저 의견을 묻고 싶었다.

    “음… 이건 나도 몰랐군요. 그냥 형식상 계약직일 뿐 웬만하면 갱신된다고 들었는데.”

    “모두가 좋은 상황만 있는 건 아닌 거 같더라구요.”

    “본의 아니게 장 셰프의 어깨가 무겁겠군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김용수 대사 역시 요리사들의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모든걸 제쳐 두고 해외로 나온 사람들에게는 더 큰 안정감을 줘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말을 하는 건 반대예요.”

    “네? 왜죠?”

    예상과는 다르게 김용수 대사의 입에서 부정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퇴직을 했어도 결국 공무원이라는 걸까.

    힘들게 잡은 기회였고, 아직 임기가 2년이나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런 리스크를 안고 가고 싶진 않은 듯했다.

    “그렇게 자잘하게 목소리를 내 봤자 큰 의미가 없어요. 그럴 때마다 그냥 묻힐 뿐이죠. 혹여라도 이 사실이 본부로 새어 들어가면 장 셰프에게도 분명 불이익이 생길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그 정돈 각오하고 있습니다.”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로서 근무할 땐 내가 어떻게든 막아 줄 수 있지만 나중에 청와대에 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

    “다른 부처라 해도 이곳도 결국 정부 예하 부처입니다. 괜히 밉보여서 좋을 건 없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입니다. 몇만 년을 쉬지 않고 내리쳐야 작은 상처 정도 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김용수 대사는 내 결심까지 막을 생각은 아니었다.

    작은 거 10개보다 크게 한 방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김용수 대사.

    그렇지만 일개 요리사가 크게 한 방을 터트릴 곳이 있을까?

    “내가 나서서 대신 말해 주는 건 큰 힘이 없을 것 같고, 같은 요리사인 장 셰프가 직접 말하는 게 좋겠죠.”

    “네 그렇지만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아서요.”

    “마침 좋은 자리가 있을 것 같아요.”

    “정말요?”

    김용수 대사는 별다른 말 없이 하얀 종이 한 장을 나에게 건넸다.

    본부에서 내려온 공문이었다.

    “읽어 봐요. 나는 이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제1회 올해의 재외 공관 요리사 선발 대회]

    그룹 채팅방에서 소문으로 돌던 요리 대회에 관한 공문이었다. 요리사들의 동기 부여를 위해 개최한다는 이 대회에 걸린 상금은 꽤나 파격적이었다.

    “어때요? 이거 한번 나가 보는 게?”

    “안 그래도 이건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많은 요리사들이 참가해야 이런 행사들이 자꾸 개최되고, 힘이 생길 테니까요. 근데 이건 그냥 요리 대회인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랑 무슨 상관이죠?”

    김용수 대사는 내 손에 쥐어진 공문 종이를 다시 건네받아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딱 7글자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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