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86화 (87/202)
  • 86. 산 사람들을 위한

    “읭?”

    “이게 차례상이에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보자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흔히 보는 차례상 음식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여전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우와 찜닭이다 찜닭!”

    음식을 기다리던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닭고기 요리를 가장 좋아한다던 진우.

    파나르에 처음 왔을 때도 아빠표 찜닭을 맛봤다. 하지만 그것보단 훨씬 업그레이드 된 찜닭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키야. 아침부터 이 무슨 호강입니까.”

    “10시 넘었으면 점심이죠. 안줏거리 보니 술 한잔 땡기시죠?”

    “당연하죠. 음복은 꼭 해야지요.”

    안지용 참사관의 시선이 꽂힌 음식은 다름 아닌 모둠회였다. 깔끔한 청주로 음복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좀 더 어울릴 만한 생선회를 준비해 봤다.

    “새우튀김이나 동태전, 삼색나물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어차피 직원들끼리 일 년 동안 열심히 해 보자고 다짐하는 자리인데 직원분들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야지요.”

    “저희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어떻게 다 알고 계세요…?”

    모를 수가 없지.

    매일매일 끼니를 챙기는 김용수 대사는 당연하고, 맛집 친구 윤아의 식성도 이미 다 꿰뚫고 있었다.

    거기가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술을 즐기는 애주가 안지용 참사관은 술에 맞는 음식을 준비해 주면 된다. 오늘의 청주에 생선회처럼.

    그리고 처음으로 관저에 초대된 윤아의 부모님들을 위한 특별 음식도 마련해 두었다.

    “그래도 차례상 기분은 내야 하니깐 육전은 준비했습니다.”

    “어머나!”

    얇게 저며서 간을 해 둔 소고기를 한 장씩 밀가루와 계란물을 입혀 고소하게 구워 낸 육전이 아니었다.

    소고기와 파, 양파 등을 계란에 섞어 커다랗게 구워서 잘라 먹는 진주식 육전.

    주로 진주식 냉면에 고명으로 올라가지만 오늘은 고향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느껴 보라고 준비했다.

    “이거 진주 음식인데?”

    “하하하 기억나세요?”

    “기억나다마다요. 시장통에서 얼마나 많이 사 먹었는데요.”

    “그러면 이것도 기억나세요?”

    아직 후식을 먹을 시간은 아니지만 말이 나온 김에 자랑을 하고 싶었다.

    이건 고향 음식 중 내가 제일 좋아했으니까.

    “꿀빵 아닙니까? 이야 생긴 게 꼭 진주 꿀빵 그대로인데요?”

    반가운 음식이 나오자 잊었던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윤아의 부모님들.

    단팥을 가득 넣어 튀겨 낸 동그란 도넛에 설탕물을 듬뿍 묻히고, 땅콩 가루를 뿌려 주면 끝내주는 디저트가 탄생한다.

    크기가 꽤 크지만 한번 입에 넣으면 손을 떼기가 어려운 음식이었다. 이것 덕분에 어릴 땐 살이 좀 쪘었지만.

    “요리사님 이건 정말 감동이네요. 어떻게 저희 모두의 식성을 파악해서 음식을 만들 수가 있어요?”

    “하하하 저희는 이제 가족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좋네요 가족. 가족끼리 한잔 어떠세요?”

    “오늘은 콜입니다!”

    준비한 음식들이 맘에 들었는지 모두가 기분 좋게 술잔을 들었다.

    “저희는 준비한 것도 없는데 너무 감사하네요.”

    “요리사에겐 그저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만 드셔 주시면 됩니다. 그게 최고의 선물이죠.”

    “그건 걱정 마세요.”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둔 탓인지, 그냥 다 같이 먹는 분위기에 휩쓸려 먹은 것인지 몰라도 잔반은 거의 남지 않았다.

    괜히 며칠 동안 비빔밥이나 잡탕찌개 같은 건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제 떡국 한 그릇씩 할까요?”

    “좋지요. 역시 새해엔 뭐니 뭐니 해도 뽀얀 떡국 한 그릇씩 먹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가 터질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 요리사님이 끓여 주신 떡국이라면 맛은 봐야겠죠.”

    “두말하면 잔소리죠.”

    떡국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김용수 대사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만든 떡국은 뻘겋게 끓고 있었으니.

    “오늘은 뽀얀 떡국은 아니지만 훨씬 맛있는 걸 준비했습니다. 바로 짬뽕 떡국입니다.”

    “네? 뭐요? 짬뽕 떡국?”

    “엥? 그런 음식이 있어요?”

    짬뽕과 떡국이라는 낯선 단어의 조합에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웅성거림은 군침 넘어가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이미 이들은 내 음식의 노예가 되어 있었으니까.

    “이것 또한 요리사님이 만든 거라면 뭐든 맛있을 겁니다.”

    “그러니까요. 매년 똑같은 떡국 먹는 것도 질렸는데 올해는 새로운 것 좀 먹어 봅시다.”

    “이번 연도는 내 인생도 좀 변하는 걸 볼 수 있으려나?”

    “좀 더 열정적으로 새해를 맞이하라는 의미의 음식이 아닐까요?”

    직원들의 반응에 김용수 대사는 안심한 눈치였다. 개인적인 사연 때문에 이런 음식을 준비했는데 직원들이 맘에 들어 하지 않았으면 괜히 찜찜했을 테니까.

    하지만 직원들은 이미 짬뽕 떡국이라는 음식에 한가득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부탁한 음식이에요. 입맛에 조금 안 맞더라도 양해 부탁해요.”

    “정말요? 대사님이 이런 음식을 생각해 내셨다고요?”

    “의외인데요?”

    “당연히 요리사님 아이디어인 줄 알았는데.”

    “허허허 맛도 꽤 괜찮을 테니 먹어 봐요. 나와 내 와이프가 즐겨 먹던 음식입니다.”

    그제야 직원들에게도 짬뽕 떡국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는 김용수 대사.

    덕분에 직원들은 잠시 동안 모두 숙연해졌다.

    이런 상황에 당황해하는 김용수 대사를 위해 서둘러 내가 입을 열었다.

    “새벽부터 시장에 가서 제일 싱싱한 해산물을 사 와서 끓인 겁니다. 웬만한 중국집 못지않을 테니 드셔 보세요.”

    “크으 잘 먹겠습니다.”

    “저도 잘 먹겠습니다.”

    “삼촌 짬뽕 잘 먹을게요.”

    어른들이야 얼큰하게 끓인 짬뽕 떡국을 무난하게 먹을 수 있지만 어린 진우는 아니었다.

    진우를 위해 따로 한 그릇 빼 놓은 떡국이 있었다.

    “진우는 매운 거 못 먹어서 삼촌이 하얀 짬뽕 끓여 놨으니깐 그거 먹으면 돼.”

    “아니에요 저도 이거 주세요. 먹을 수 있어요.”

    “정말? 진우 매운 거 잘 먹어?”

    당돌한 대답에 오히려 준우가 더 놀란 표정이었다.

    “우리 진우 짬뽕도 먹을 줄 알아?”

    “당신보다 매운 거 더 잘 먹을걸? 그것도 여태 몰랐어?”

    “헐….”

    진우는 보란 듯이 짬뽕 떡국 그릇을 두 손을 들고 국물을 삼켰다. 그러곤 가슴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감탄사까지.

    “크으으으 좋다.”

    “하하하하하 뭐야 이 소리는. 인생 2회차 아니야?”

    아침부터 매운 음식이 조금 부담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모두가 한 그릇을 가뿐히 비웠다.

    막내 진우까지도.

    일반적인 차례상은 아니었지만 그건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차례진 밥상은 거의 다 비워졌고, 처음 먹어 본 짬뽕 떡국도 남지 않았으니까.

    “자 다들 올해도 열심히 해서 최우수 공관이 되어 봅시다!”

    “물론이지요. 절대 놓칠 수 없습니다.”

    “저희도 윤아가 회사 잘 다닐 수 있게 열심히 잔소리할게요.”

    “아 엄마~”

    짬뽕 국물 덕에 입술 양쪽에 빨간 흔적을 남긴 직원들은 든든하게 새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몇 달 전까진 아무도 오려 하지 않았던 이 파나르.

    이젠 그 어느 곳보다 주목받는 공관이 되어 있었다. 김용수 대사의 리드 아래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낼지 궁금해졌다.

    * * *

    다음 날 아침 관저.

    아침 식사를 마친 김용수 대사에게 차를 한 잔 가져다주며 말을 걸었다.

    “대사님 오늘도 점심, 저녁 약속 있으시죠?

    “네 1월 동안은 역시 바쁠 것 같네요.”

    “쉬엄쉬엄하시고, 관저에 손님들 초대해 주세요. 오히려 그게 좋습니다.”

    연말 스케줄도 벅차 보였는데 여전히 빡빡한 새해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럴게요. 관저에 초대하면 오히려 내가 피곤한 거 같아서요.”

    “그럴 수도 있죠. 관저이기 전에 대사님이 살고 계시는 집이니까요.”

    “네 집에서 좀 집답게 쉬고 싶어서요.”

    “저도 그 말씀엔 공감합니다.”

    “그나저나 요즘 외교부에 젊은 요리사들이 많이 뽑히나 봐요. 그게 다 장 셰프 덕이겠죠?”

    “정말요? 다른 나라 공관장들도 이제 젊은 요리사를 많이 채용하나 보네요.”

    “그게 다 장 셰프가 편견을 없애 준 덕분이죠.”

    잊고 있었는데 김용수 대사의 말 덕분에 재외 공관 요리사 그룹 채팅방에 인원을 확인해 봤다.

    어느새 두 배 가까운 인원이 늘어나 있었다.

    가입만 해 놓고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요즘 본부에서도 요리사들을 위한 행사 같은 것도 많이 계획하고 있나 봐요.”

    “행사요?”

    “일종의 동기 부여를 위한 이벤트 같은 거죠. 아무래도 젊은 요리사들은 뭔가 재밌는 요소가 있어야 열심히 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것보다 요리사들을 먼저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면 더 좋을 텐데.”

    외교관은 당연하고, 일반 행정 직원까지도 정직원 대우를 받지만 이상하게도 재외 공관 요리사만 비정규직 계약직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매년 계약 갱신을 요구해야 하는 불안한 처지.

    덕분에 요리사들은 향수병과 불안함 모두를 이겨 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외 공관 요리사들이 있는 채팅방을 들어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내셨나요?

    -장덕수 셰프님. 반가워요 별일 없으셨나요?

    -최근에 조금 바빴습니다. 안 본 사이에 멤버가 많이 늘었네요.

    몇 달 사이 멤버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듣기로는 재외 공관 요리사들을 위한 이벤트도 많이 계획되고 있다던데요.

    -이제야 우리 요리사들의 말이 좀 먹히나 봅니다.

    젊은 요리사들이 많아지면서 몇 가지 달라진 문화가 있었다.

    예전 중년의 요리사들은 부당하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꾹 참거나 그냥 넘어가곤 했었다. 그렇게 일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최대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젊은 요리사들은 달랐다.

    본인들의 의견을 당당하게 표현했고, 부당함은 참고 지나치지 않았다.

    덕분에 요리사들을 대하는 본부의 태도도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진작에 이렇게 같이 힘을 합쳤어야 했는데, 이제 좀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한참 멀었습니다. 여전히 비정규직이고, 알게 모르게 갑질도 심해요.

    -맞아요. 그깟 돈 몇 푼 걸린 이벤트 좀 열어 준다고 다 해결되는게 아니죠.

    연차가 있는 재외 공관 요리사들은 아직 쌓인 게 많은 듯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김용수 대사를 만나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요리사들이 공관장과의 관계를 힘들어하고 있었다.

    -근데 그 돈 몇 푼 걸린 이벤트라는 게 뭔가요?

    -못 들으셨어요? 장덕수 셰프님이 먼저 말 꺼내시길래 알고 말하시는 줄 알았어요.

    -요리 대회예요.

    -그렇군요. 대충 이벤트라고 듣기만 했지 그게 요리 대회인 줄은 몰랐어요.

    요리 대회라.

    본부에선 재외 공관 요리사들을 위한 대회가 계획되고 있었다. 한 번도 열렸던 적이 없는 행사였다.

    -듣자 하니 먼저 비대면으로 1라운드를 진행하고, 거기서 통과된 사람들은 호텔이랑 항공료 전부 지원해 주면서 한국에서 2라운드를 진행한대요.

    -오 호텔이랑 항공료까지요?

    -네 거기다 최종 3등 안에 들면 상금도 제법 많이 준대요.

    재밌을 것 같았다.

    몇 년간 잊고 살았던 경쟁심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상금보다 누군가와 후회 없는 치열한 경쟁이 해 보고 싶었다.

    요리 대회라는 걸 나가 본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호텔 막내 시절엔 종종 선배들 따라서 기능 경기 대회나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 요리 대회도 많이 나갔었는데.

    주방장이 되고 나서는 대회에 관심을 끊었었다.

    끊었다기보다 그런 걸 할 시간이 없었던 거지만.

    -그래도 그건 재밌겠네요.

    -이런걸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다 참가해 주세요. 그래야 계속 이런 이벤트라도 생기죠.

    -얼렁뚱땅이요? 뭘요?

    요리사 대표 우영의 말에는 뭔가 가시가 박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