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85화 (86/202)

85. 새해

다음 날 아침.

-Perfect!

내가 남긴 메시지에 제스는 완성된 떡볶이 사진 한 장과 딱 한 단어가 적힌 답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메시지가 전송된 시간은 새벽 3시.

제스도 나인티나인이 알려 준 아이템이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했는지 곧바로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너무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파나르에서 무조건 잘될 거예요 이건.

-제 아이디어 아니고, 나인티나인 멤버들이 알려 줬어요.

-근데 미스터 장. 나인티나인하고 어떻게 친해요? 나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영업 비밀입니다. 나중에 이 분식집이 잘되면 나인티나인을 광고 모델로 쓰는 건 어때요? 제가 추천해 드릴게요.

-정말요? 우리는 무조건 찬성이죠.

제스와 나인티나인.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거예요. 대신 요즘 나인티나인 잘나가는 거 아시죠?

-하하 장사가 잘돼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파나르에 오픈한 제스의 분식집을 홍보하는 나인티나인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대사관 관저.

아침 식사를 끝낸 김용수 대사에게 차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대사님, 오늘 점심 식사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장 셰프. 이번 주는 계속 점심, 저녁 약속 있으니 특별한 일 없으면 일찍 퇴근해요.”

“많이 바쁘시군요. 연말이라서 그런가요?”

“네 공관장이 제일 바쁜 시기가 연말이기도 하죠.”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공관장의 스케줄은 가득 찬다.

여기저기서 불러 대는 종무식이나 망년회, 타국 대사들과의 만남.

또 각종 기업이나 협회 사람들을 만나 내년 계획에 대해 회의를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낸다.

보통은 관저로 초대하기도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연말 스케줄을 전부 외부로 잡고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관저에서 손님들 만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최근에 많이 바빴잖아요. 연말엔 초대할 인원들도 많아서 관저로 부르면 내가 너무 피곤해요.”

“그렇긴 한데…. 일부러 거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대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요?

“얼마든지요. 뭔가요?”

“이번 신정엔 직원들이랑 같이 떡국도 먹고, 차례도 좀 지냈으면 하는데.”

“차례요?”

직원들과 같이 아침 식사도 하며, 새해 분위기를 내고 싶다는 김용수 대사.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다른 직원들한테는 나중에 말했으면 하는데, 사실 1월 1일이 우리 와이프 기일이에요.”

“아… 하필.”

이런 얘길 할 때마다 항상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하필 1월 1일이 기일이라니.

매년 기쁘게 시작했어야 할 새해가 힘들었을 김용수 대사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겸사겸사 직원들하고 떡국도 먹을 겸 제사도 지낼까 해요. 이참에 장 셰프 덕 좀 보려구요.”

직원들과 함께하는 시무식은 공식적인 행사 중 하나이다. 대사관 요리사인 내가 업무에 투입이 되어도 문제없다는 의미.

어차피 차려야 할 상에 와이프가 좋아하는 음식 한 가지만 추가해 달라는 김용수 대사였다.

“몇 년째 사 온 음식으로만 제사상을 차렸는데 올해는 좀 만들어 볼까 해요. 장 셰프 도움을 받아서.”

“그럼 대사님도 같이 만들어 보실래요?”

본인 손으로 그럴싸한 제사상을 차리는 게 꿈이었다는데.

그 정도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의중을 눈치챈 내가 함께 만들자고 묻자 김용수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부탁하신 한 가지만 빼고 다른 음식들은 제가 원하는 걸로 만들어도 됩니까?”

“물론이죠. 우리 와이프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어요. 떡국만 내가 부탁한 대로 끓여 주고, 다른 건 장 셰프가 알아서 준비해 줘요. 나도 오랜만에 그 떡국이 먹고 싶네요.”

그렇게 김용수 대사와 함께 새해 차례상을 차리게 되었다.

사모님의 제사상도 함께.

* * *

관저 주방.

“근데 무슨 음식을 만들 거예요? 한 번도 안 구워 봤지만 전 굽는 걸 도울까요? 아니면 나물을 좀 만들까요?”

“전은 안 구울 겁니다.”

“네? 차례상에 전을 안 구우면 뭘 올리려구요?”

이번 차례상은 내 스타일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내 방식대로라면 굳이 전이나 나물을 택할 필요는 없다.

“차례상이라는 게 돌아가신 분을 위한 일이긴 하지만 결국 준비한 음식은 산 사람들이 먹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산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립니다.”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들 중 인기가 있는 음식들은 정해져 있다.

특히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동그랑땡이나 갈비찜 정도만 먹고 다른 음식들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요리사라는 게 이럴 때 좋은 거 같으면서도 불편하다. 남을 걸 뻔히 알면서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음식은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만듭니다. 특히 애들이 좋아할 음식들요. 그 아이들이 잘되어야 진짜 우리 집안에 복이 찾아올 거잖아요. 그게 차례를 지내는 진정한 의미 아닐까요?”

“하하 특이한 생각이네요. 근데 일리가 있어요.”

이번엔 진우의 아내와 아들은 물론이고, 윤아의 부모님까지 전부 관저로 초대되었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차례상을 차리고 싶었다.

“근데 대사님은 왜 이런 떡국을 드시게 되었어요?”

“짬뽕 떡국이요?”

“네 특이한 조합이잖아요.”

김용수 대사가 아내를 위해 준비해 달라는 음식은 짬뽕 떡국이었다.

뽀얗게 끓인 떡국이 아니라 해물이 듬뿍 들어가 매콤한 떡국.

어쩌다 이런 음식이 탄생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이것도 얘기하자면 긴데 제가 고시생일 때 저희 어머니가 하도 닦달을 하셔서 선을 보게 되었어요. 어차피 네 머리라면 1~2년 내로 붙을 거니까 지금부터 연애를 해야 결혼할 맘이 생긴다고.”

“틀린 말도 아니네요.”

“근데 이 고시라는 게 맘대로 되나요? 운도 받쳐 줘야 하고,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그렇겠죠.”

“그래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대충 점심이나 먹고 들어오자는 생각으로 나갔죠.”

성화에 못 이겨 선 자리에 나갔지만 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때 나온 사모님이 이뻐 보였긴 했지만 합격에 대한 의지가 더 컸다는 김용수 대사.

“그래서 만나자마자 인사만 하고 제가 바로 말했죠.”

“뭐라구요?”

“짬뽕이나 한 그릇 하러 가자고요.”

“첫마디가 그거였어요?”

“네 저는 그냥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기도 하고, 빨리 나오니깐 짬뽕을 말한 건데 흔쾌히 그러자고 하더라구요? 이 여자도 자기 어머니가 하도 선을 보라고 해서 나왔나 싶었죠.”

“그래요? 특이하네요.”

“그리고 또 우연히 들어간 중국집이 굉장히 맛이 좋았어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짬뽕 한 그릇을 비웠죠. 나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 외교관이 될 생각인데 공부가 우선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맘에 안 드는 건 아니니 오해 말라는 둥 나름 예의를 지켜서 대화를 했죠.”

“그래서 어떻게 끝났나요?”

처음 듣는 김용수 대사의 과거 얘기에 어느새 빠져들어 있었다.

“별거 안 해도 되니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이렇게 짬뽕이나 먹자고 하더라구요.”

“사귀기 시작했다는 건가요?”

“글쎄요. 그게 사귀었다고 해야 하나? 여튼 일주일 동안은 아무 연락이 없다가 제가 공부를 쉬는 토요일만 되면 아침부터 전화가 왔어요. 짬뽕 먹으러 가자고.”

“귀여우셨네요 사모님.”

“네 저도 사실 와이프 첫 인상이 너무 맘에 들었어요. 나중에 이런 여자 고생 안 시키려면 꼭 외교관이 되어야 한다는 맘이 더 불타오르더라구요. 웃기죠.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김용수 대사는 1년 후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사모님과 결혼에 골인할 수 있다고 한다.

“사모님은 대사님의 어디가 좋으셨대요?”

“식성이요.”

“식성이요?”

“자기는 다른 건 몰라도 먹는 취향이 같아야 하는데 짬뽕도 그렇고, 대화를 나눠 보니 밥상머리에서 싸울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대요.”

“하하하 맞네요 맞아요. 부부 사이에 그거 중요하죠.”

먹는 습관이나 양이 비슷해야 오래 만날 수 있다는 말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외교관 신입 땐 애도 없고, 신정에도 당직을 서느라 어디 가지를 못했어요. 떡국을 한 그릇 먹긴 먹어야겠는데 둘 다 만들 줄은 모르고, 결국 고민하다가 그냥 좋아하는 짬뽕이나 시켜 먹자는 결론이 나왔죠.”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 보시지.”

“그냥 당직을 서고 와서 몸도 피곤한데 굳이 맛없는 걸 먹고 싶지 않았거든요. 얼큰한 짬뽕 한 그릇 하고, 늘어지게 자고 싶었어요.”

“그래서 짬뽕 떡국을 만드신 거예요?”

“아니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그날따라 면을 다 먹어도 영 배가 차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밥을 찾았는데 또 남은 밥도 없고, 결국 차선책으로 남은 짬뽕 국물에 사 놓은 떡국떡을 넣고 끓여 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구요.”

“얻어걸리셨네요.”

“제대로 얻어걸렸죠. 그때부터 새해엔 짬뽕을 시켜서 남은 국물에 떡국떡 좀 넣고, 끓여 먹게 되었어요.”

“사모님도 그걸 좋아하셨군요.”

“오히려 저보다 더 좋아했죠. 나중에 해외 근무할 땐 짬뽕을 못 먹어서 자기가 한참을 연습하더니 결국 비슷한 맛을 내더라구요.”

“오호 해외에서 지내면 맵고 짠 짬뽕 같은 게 더 당기기 마련이죠.”

김용수 대사는 채소 손질에 손을 보태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평소엔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좋았었던 기억을 자랑하듯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오늘 제대로 된 짬뽕 떡국 한 그릇 만들어 드릴게요. 사모님을 위한 것도 있지만 특별히 대사님을 위해서요.”

“허허허 맨날 삼시 세끼 날 위해서 만들어 주면서 뭘 새삼스레.”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산 사람들을 위한 차례상이니 대사님도 포함입니다.”

“하하하 고마워요. 와이프한테는 내가 섭섭하지 않게 잘 설명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새해 첫날 대사관 전 직원이 아침부터 모이게 되었다.

반드시 참석하라고 강요하진 않았지만 역시 내 음식을 맛보고 싶다며 관저로 모여들었다. 김용수 대사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윤아의 부모님까지도.

* * *

“새해 첫날부터 이렇게 관저로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에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지만 여러분 덕분에 금세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이제 맘껏 달릴 일만 남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대사님.”

“하하 저희까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부터 그 유명한 장덕수 셰프님의 요리를 맛볼 수 있어서 올해는 운수 좋은 해일 거 같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지.”

막내 진우는 어디서 구했는지 한복까지 차려입고 관저로 찾아왔다. 역시 이런 모임엔 아이가 있어야 분위기가 사는 것 같았다.

다들 진짜 가족들이 모인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배고파요 요리사 삼촌.”

“진우 배고파? 잠시만 기다려 봐 삼촌이 밥 차려 줄게.”

“네 맛있는 냄새가 너무 많아서 못 참겠어요.”

커다란 관저 안에는 여러 가지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예의를 챙기느라 잠자코 있었지는 여기저기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어서 식사하시죠.”

음식이 차려진 상을 보자 직원들은 놀란 눈치였다. 일반적으로 차례상에 올릴 음식들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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