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83화 (84/202)
  • 83. 국내파

    토요일 점심 제스의 연구실.

    “주말에 이렇게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맛있는 거 만들어 준다 해서 온 거죠. 안 그래도 주말엔 보통 외식을 하거든요.”

    “와이프가 아들 데리고 당장 나갔다 오래요. 점심 안 해도 된다고 엄청 좋아하던데요.”

    “나도 마실 나올 겸 온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마요.”

    김용수 대사부터 안지용 참사관, 그리고 준우의 아들 진우와 윤아까지.

    주말이었지만 맛있는 걸 맛보여 준다는 말에 모두가 제스의 사무실로 모였다.

    맛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안 참사관님 또 한잔하실려구요?”

    “오늘 만드는 게 김밥이라면서요. 이 김밥이 맥주랑 은근히 궁합이 맞거든요. 주말이니 그냥 넘어갈 수 없죠.”

    예전 상섭의 한식당 때 벌였던 시식회가 소문이 났는지 다들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때와 달랐다.

    크림치즈 김밥이 별로라는 걸 증명해 줄 사람들로 대사관 식구들을 부른 거니까.

    끝나고 사비로라도 맛있는 걸 사 주면 되지라는 맘으로 미안함을 숨겼다.

    “그러면 일단 김밥부터 만들고, 사람들 모인 김에 떡볶이도 좀 만들어 볼게요. 김밥이랑 떡볶이는 뗄 수 없는 조합이거든요.”

    “좋아요. 어차피 그것도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메뉴잖아요.”

    제스는 여러 가지 분식류 중에 김밥과 떡볶이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튀김도 나쁘지 않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성과는 맞지 않는 느낌이라 했다.

    걸어서 가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한다는 제스.

    장사에 대한 철학은 확실했다.

    “고슬고슬 지은 밥에 깨를 손바닥으로 조금 부숴서 넣어 주고, 소금 약간과 참기름은 듬뿍.”

    “이야 고소한 냄새 끝내주네요. 벌써 배고프다.”

    “여기에 아주 살짝 간을 한 당근, 오이, 햄, 계란, 단무지 그리고 새콤달콤한 크림치즈 듬뿍.”

    “김밥에 크림치즈요?”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반응들이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먼저 식욕을 자극했지만 크림치즈가 그것을 반감시켰다.

    “좀 특이하긴 해도 우리 요리사님이 만든 거니깐 무조건 옳겠죠. 항상 그랬잖아요.”

    “그러게요. 장 셰프가 괜히 이런 걸 만든 게 아니겠죠. 다들 먹어 봅시다.”

    “아… 그런 게 아닌데.”

    어느새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있었다.

    초콜릿으로 찌개를 끓였다고 해도 먹을 기세.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먹게 해 주고 싶었다.

    “잠시만요. 기다렸다가 떡볶이랑 같이 드셔 보시죠.”

    “오! 떡볶이 좋죠.”

    “이 조합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모두 입맛을 다셨지만 매콤한 떡볶이 국물에 김밥을 찍어 먹을 생각을 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제스 이 크림치즈 김밥은 조금 맵더라도 오리지널 떡볶이랑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걸로 테스트해 볼래요?”

    “좋아요. 맵기 조절은 하면 되는 거니까.”

    상섭의 식당에 먹었던 떡볶이가 매웠지만 이 크림치즈 김밥과 어울릴 거란 의견에는 동의하는 제스였다.

    준우의 아들 진우도 있으니 최대한 맵지 않게 떡볶이를 만들었다.

    “고추장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텁텁해지고, 또 고춧가루로만 만들면 깊은 맛이 없어요.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적당히 사용하고, 후추, 설탕 정도로만 간을 해 줘도 오리지널 떡볶이가 완성됩니다.”

    조미료나 채소 같은 부재료가 많이 들어가면 더 맛이 좋아지겠지만 윤아가 말했던 건 길거리 컵떡볶이.

    이 떡볶이는 양념을 단순해야 재현해 낼 수 있다.

    게다가 초등학교들을 상대로 하는 분식집이기에 맵기도 딱 적당했다.

    윤기가 반질반질 나는 쌀떡에 걸쭉한 양념이 묻어 있는 떡볶이가 완성되었다.

    “자! 일단 이 김밥부터 먼저 맛봐 주세요. 파나르 사람들이 워낙 치즈를 즐기기 때문에 김밥에도 치즈를 넣어 봤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치즈 김밥은 있잖아요.”

    “그렇긴한데 슬라이스 치즈는 김밥에 들어가면 맛이 너무 약해서요. 파나르 사람들한테는 좀 더 강한 치즈 향이 필요하거든요.”

    반파나르인인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연장자 김용수 대사에게 김밥을 권했지만 김용수 대사는 제일 막내인 진우에게 먼저 김밥을 권했다.

    김준우 서기관과 진우의 시식을 시작으로 모두가 김밥을 입에 넣었다.

    “윽….”

    “왜요?”

    시식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김준우 서기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한국인들에겐 이 조합이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맛이 어때요? 서기관님?”

    “이거 괜찮은 조합 맞아요? 저는 영 어색한 거 같은데.”

    “그렇죠? 저도 좀 입맛에 안 맞더라구요.”

    모두가 맛있다고 하던 제스의 직원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꼈었다. 동지를 찾았다는 기쁨에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의아해하는 표정이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어? 맛이 괜찮아요?”

    “이거요? 좋은데?”

    “저도 맛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조합인데도 대박인데요?”

    “그… 그래요? 대사님은 어떠세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연세가 많은 김용수 대사에게 크림치즈는 낯설겠지.

    게다가 밥에 섞여 있는 크림치즈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맛있어요. 저도 평소에 치즈를 즐겨 먹는 편인데 은근 쌀이랑도 잘 어울리네요.”

    “저… 정말요?”

    “이거 화이트 와인하고 먹어도 좋을 것 같은데?”

    준우와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크림치즈 김밥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린 진우까지.

    어찌 된 일일까.

    “요리사님 입맛에는 안 맞으세요?”

    “저요? 솔직히 저는 좀….”

    “저도 좀 그렇던데….”

    이유야 어찌 됐든 일단 떡볶이랑 조화도 어떤지 확인해야 했다.

    “그럼 떡볶이랑도 한번 같이 드셔 보세요. 제스도 먹어 봐요. 이건 안 먹어 봤잖아요.”

    “고마워요.”

    매콤함을 최대한 줄인 떡볶이와 크림치즈 김밥의 조합이 예상대로였다.

    “훨씬 맛있네요. 이건 무조건 합격.”

    “조금 느끼할 수 있는 크림치즈 맛이 완전 사라지는데요?”

    “음… 그래도 이건 좀 먹을 만하네요.”

    크림치즈 김밥을 끝까지 삼키지 못했던 준우마저도 떡볶이와는 곧잘 먹었다.

    김용수 대사는 아까부터 별말 없이 잘 먹고 있었다. 진짜 입맛에 맞으니깐 저렇게 먹는 거겠지.

    신기했다.

    “이상하네…. 김용수 대사님까지 잘 드실 줄은 몰랐네요. 윤아는 파나르 사람이라 그렇다 쳐도.”

    “나 한국 사람이거든?”

    왜 이렇게 입맛이 갈린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포인트만 잡을 수 있으면 확실하게 보완할 수 있을 텐데.

    연령이라고 하기엔 막내 진우와 김용수 대사의 나이 차가 너무 컸다.

    “요리사님 해외 근무 처음이라고 했죠?”

    “네? 네 대사관 요리사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안지용 참사관이 물었다.

    “대사관 요리사 말고 해외에서 근무하는 거 자체가 처음이죠?”

    “네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김준우 서기관도 여기가 첫 부임지고?”

    “네 그렇죠.”

    안지용 참사관은 뭔가를 알아낸 사람처럼 입꼬리가 올라갔다.

    “외국에서 안 살아 본 사람들이라 그렇네.”

    “네?”

    “대사님 혹시 첫 부임지 기억나세요?”

    “당연히 기억이 나죠.”

    “대사님도 비슷한 경험 있지 않나요?”

    안지용 참사관과 김용수 대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보니깐 한국만큼 치즈를 안 먹는 나라도 없어요. 아니 한국은 모짜렐라 치즈만 치즈인 줄 알아요.”

    “허허허.”

    “다른 나라 대사관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전식도 치즈, 메인 음식에도 치즈, 안주도 치즈. 온통 치즈가 들어가거든요.”

    맞는 말이었다.

    특히 유럽에 가까울수록 치즈 소비량은 엄청났다. 파나르 역시 비슷한 문화였다.

    “처음엔 치즈 맛이 너무 적응 안 돼서 만찬에 가고 싶지 않더라구요. 초대받아서 갔는데 음식을 안 먹을 수도 없고, 향은 역해서 삼키지는 못하겠고.”

    “죽을 맛이죠.”

    김용수 대사가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요리사님이랑 김준우 서기관도 해외에서 더 근무하다 보면 우리처럼 될 겁니다. 이 크림치즈가 고소하고, 진한 맛으로 느껴지는 날이.”

    “그럼 진우는요?”

    “진우요?”

    “저는 유치원에서 치즈 많이 먹어요. 그래서 좋아해요.”

    “아….”

    나보다 낫네.

    이래서 해외 근무를 해 보지 못한 과거를 후회했었다. 김용수 대사는 70이 넘는 나이임에도 저렇게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입맛을 가졌는데.

    나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다.

    “하하하 그럼 이 크림치즈 김밥은 통과된 건가요?”

    윤아의 통역을 듣고 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간 고생한 음식이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동시에 또 한 번 열정이 불타올랐다. 치즈 향에 익숙하지 못해서 음식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니.

    한식에만 국한되어 있던 내 입맛과 상식의 범위를 좀 더 넓히고 싶단 맘이 불타올랐다.

    “근데 아빠.”

    “응 진우야 뭐 더 줄까?”

    “나 몽란 핫도그 먹고 싶어.”

    “응? 몽란 핫도그? 그건 여기에 없는데….”

    “없어? 떡볶이 먹으니깐 그것도 먹고 싶어졌어.”

    맛있게 먹던 진우가 갑자기 핫도그를 찾기 시작했다. 한창 한국에서 유행하던 음식이라 엄마랑 자주 먹었다는데 떡볶이를 먹고 나니 그 맛이 생각났다고 했다.

    “진우야 몽란 핫도그는 다음에 한국 가면 사 줄게 좀만 기다려 줄래?”

    “응… 알았어.”

    시무룩해진 진우의 표정을 보자 제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윤아가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자 제스는 관심을 보였다.

    “몽란 핫도그라는 게 뭔가요?”

    “엄밀히 말하면 핫도그가 아니라 콘도그라고 하는데 들어 봤어요?”

    “콘도그? 당연히 알죠. 소시지에 반죽을 입혀 튀겨 내는 거잖아요.”

    “네 맞아요. 한국에선 떡볶이랑 이 콘도그를 같이 먹는 게 유행이었거든요.”

    “오! 정말요? 저번에 한식당에서 먹었던 튀김들보다 이 콘도그를 파나르 사람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요.”

    “그래요?”

    김밥과 떡볶이 그리고 튀김.

    이 세 가지 조합이 맘에는 들지만 한국식 그대로는 팔기 어렵겠다는 결론이 내려졌었다. 그 중 김밥은 방향을 잡았고, 떡볶이는 일단 보류.

    튀김은 핫도그를 활용해 보면 좋겠다는 제스였다.

    “어차피 저 꼬맹이가 먹고 싶다니깐 한번 만들어 보죠. 미스터 장 만들 줄 알죠?”

    “네 당연히 할 줄은 알죠. 근데 재료가….”

    “재료는 걱정 마요. 여기엔 없는 게 없으니까.”

    하긴.

    김밥을 만들 때도 말만 하면 수십 가지 재료들이 튀어나왔다.

    제스의 연구실엔 오히려 웬만한 마트보다 품목이 많았다.

    “진우야 삼촌이 몽란 핫도그 만들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줄래?”

    “정말요? 당연히 기다릴 수 있어요. 한국 가는 것보다는 빨리 만들 수 있잖아요.”

    “당연하지.”

    신이 난 건 진우뿐만이 아니었다.

    김밥과 떡볶이로 배가 차지 않았는지 안지용 참사관과 김준우 서기관 역시 군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이런 음식 먹어도 좋네요. 그렇죠 대사님?”

    “그러게요. 저도 가끔 떡볶이나 김밥이 생각날 때가 있긴 해요.”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 주말.

    간편하게 분식을 사 먹는 분위기가 생각나는 오후였다.

    “근데 삼촌 저는 스윗 콘소메 포테이토 핫도그로 주문할게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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