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외교를 담은 요리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왜 이러세요 양 참사관. 사업에 대한 얘기는 이미 저번에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새삼스레 감사하기는요.”
“하하하 그래도 워낙 큰 건이라 기분이 좋아서….”
“저희도 이렇게 큰 사업을 한국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지 않거든요. 양 참사관과 서기관, 그리고 요리사를 보면 한국 사람들의 성격을 알 수 있겠어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이 정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앞으로 문제없이 사업을 진행하는 건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나는 그 시작에 조금 손을 보탠 것뿐이었다.
“장덕수 셰프님.”
“네 국왕님.”
“우리 아이들이 요리사님을 저희 요리사로 채용하자고 난리네요.”
“하하하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또 한 번 음식을 해 드리러 가겠습니다.”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덕분에 너무 좋은 음식과 팁을 얻어 갑니다.”
타지크의 국왕 가족들은 넉넉하게 준비한 구운 김과 오징어젓갈 등을 두 손에 쥐고 관저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양현호 참사관은 남은 와인을 단순에 들이켜더니 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요리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라니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겸손도 지나치십니다. 엄밀히 말해 요리사님이 해야 할 일은 아니었죠.”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제가 수락을 한 일이니….”
이번엔 양현호 참사관과 그의 아내는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여보 이제 정식 공관장 될 수 있는 거지?”
“아마도 다음 승진 심사 땐 되겠지. 이 사업 때문에 타지크 분관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깐.”
“드디어!”
직책이나 하는 일은 공관장과 같았지만 공식적인 직급은 참사관이나 대사 대리였다. 양현호 참사관이 아직 공관장을 할 기수가 아니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번 일로 분명 다른 나라의 공관장으로 가게 될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요리사님 명성이 왜 외교부에 퍼지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역시 평범한 요리사가 아니셨네요.”
“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도 10년 넘게 여기저기 공관을 돌아다니며 많은 재외 공관 요리사를 만나 봤는데 이 정도로 요리에 외교를 담은 요리사는 없었습니다.”
“요리에 외교를 담다니요?”
양현호 참사관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 요리에 외교가 담겨 있다니.
“실력이 좋은 요리사는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요리의 맛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요리사가 더 잘해, 아니면 어떤 요리사가 더 못해라는 말로 딱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양현호 참사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비록 내가 40년 넘게 요리를 했다지만 갓 시작한 요리사보다 기본기가 좋고 경험이 많을 뿐인 거다.
그들보다 요리를 더 잘한다고 표현하는 것엔 오류가 있었다.
“결국 실력 좋은 요리사란 얼마나 다양한 손님들을 많이 만족시킬 수 있는지가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오늘처럼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타지크 국왕에겐 아이들을 위한 요리를 대접한 것처럼 말이죠.”
“…….”
“아마 다른 요리사들이었다면 국왕이라는 말에 푸아그라나 캐비어 등 값비싼 재료들로 금칠을 한 음식들이 나왔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음식으로도 오늘 만찬은 충분히 마무리되었을 겁니다. 그치만 감히 국왕과의 만찬에 냉동 해산물을 낼 수 있는 무모한 요리사를 보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제가 좀 무모했나요?”
“무모했죠. 그렇지만 오늘 저 요리사님께 외교란 걸 한 수 배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부모라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아이들을 먼저 생각할 테니 그렇게 준비한 것뿐입니다.”
“꼭 자식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저는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도 몰랐던 건데.”
우리 딸은 밥상에 앉을 때마다 전쟁이었다. 나 역시 우리 아이가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 못해 키가 크지 못할까 봐, 또 너무 마르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키웠었다. 그때 식재료에 대한 상식이 가장 많이 늘었던 것 같다.
타지크 국왕은 자신의 자식들이 음식 투정을 부릴 때마다 오늘 만찬이 생각날 것이다. 같은 재료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조리법으로 바꿔서 음식을 만들어 준 오늘의 만찬을.
“첫 외교를 김용수 선배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때도 참 감사했고, 많은 것을 배웠는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김용수 선배의 또 다른 직원을 통해 외교를 배웠습니다.”
“외교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닙니다. 상대방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타지크까지 와 주시고, 정면 돌파가 어려울 땐 주위를 둘러보며 돌파구를 찾는 그런 노하우. 그건 분명 외교관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양현호 참사관은 진심을 다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양현호 참사관의 아내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쩌면 요리사라는 직업이 외교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직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어떤 식재료를 좋아하는지, 또 어떤 조리법을 좋아하는지, 알레르기는 없는지, 오늘 몸 상태는 어떤지 등등.
손님들을 만족시킬 또 실망시킬 요소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 손님에게 자신의 요리를 선보이는 것.
수많은 변수 중에 가장 가능성 있는 길을 찾는 일인 외교관에게 요리사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용수 대사의 옆에서 좀 더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싶은 맘이 드는 하루였다.
* * *
다음 날 타지크 왕궁.
“어서 들어와요 양현호 참사관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하하하 어제 만찬 덕분에 아직도 배가 부를 정도네요.”
“하하하 그렇게까지 너무 칭찬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오늘 아침에 아이들이 김이랑 쌀밥을 두 그릇씩이나 비웠어요. 그걸 보고 있으니 정말 내 배가 부른 느낌입니다.”
타지크 왕은 어제의 만찬이 정말이나 만족스러웠는지 만찬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제 그 요리사의 전략 정말 멋있었어요. 양 참사관과 내가 한 수 배워야 할 정도였어요.”
“맞습니다. 장덕수 셰프의 꿈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랍니다.”
“정말입니까? 장 셰프는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 제가 방한할 때 꼭 다시 한번 장 셰프의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타지크 국왕과 양현호 참사관은 다시 한번 손을 맞잡았다.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타지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 * *
“다녀왔습니다 대사님.”
“하하하 어서 와요 장 셰프.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장 셰프를 출장 보내야겠어요.”
“네? 왜요?”
“갈 때마다 제 체면을 한껏 올려 줄 테니까요.”
양현호 참사관은 내가 떠난 후 김용수 대사에게 전화해 마치 조카가 삼촌에게 떠들듯 내 자랑을 했다고 했다.
주빈이 국왕이 아니라 아이들이라고 칭한 것부터 냉동 가리비를 이용해 만든 안주까지.
게다가 다음 날 곧바로 사인을 한 계약서까지 신이 나서 자랑을 했다.
“덕분에 나와 파나르 대사관 명성이 더욱 올라가게 되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런 이유라면 종종 출장 다녀오겠습니다.”
“고마워요. 나와 대사관 직원들도 장 셰프의 명성이 올라가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국경일 행사부터 타지크까지.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나날들이 지나갔다.
이제야 본업인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로 돌아와 밀려 있던 오, 만찬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처음엔 오, 만찬 행사를 치르는 것도 힘겨웠는데, 이젠 오히려 이게 편하단 느낌이 들 정도.
며칠 동안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 * *
며칠 후.
지이이잉.
오랜만에 울린 휴대폰에는 낯선 번호와 함께 국제 전화라는 안내문이 떠 있었다.
외국에서 걸려 온 전화.
한국 번호는 아니었다.
-여보세요 장덕수입니다.
-여보세요 요리사님 접니다.
전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양현호 참사관.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더 할 말이 남아 있었나.
“양현호 참사관님 잘 지내셨어요?”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쩐 일로 전화까지 주셨어요?”
“하하하 무슨 일이 있어야지만 꼭 전화해야 합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사무실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전화를 주셔서요.”
양현호 참사관은 나에게 연락을 할 때 항상 사무실을 통했다. 그것이 나름의 절차였고, 룰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다이렉트로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온 것.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려구요.”
“좋은 소식이요? 계약서 체결했다는 것 말고 또 좋은 소식이 있나요?”
계획했던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끝 아닌가.
의아했지만 대화를 이어 갔다.
-다른 게 아니라 타지크 국왕이 우리한테 훈장을 내려 주신대요.
-네? 훈장이라뇨?
-이번 철도 사업이 타지크와 주변국에게까지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업이기에 그 공을 치하하고, 훈장을 내려 주신대요.
-말도 안 돼.
나는 단 하루 국왕의 가족들을 위해 만찬을 진행했다.
하지만 양현호 참사관은 물론 그 전임자들은 이 사업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었다.
그 몇 년간의 결실이 양현호 참사관 손에서 마무리되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한 번의 만찬으로 숟가락을 걸칠 수 있었으니.
-타지크 분관 직원들은 전부 다 참석할 거고, 요리사님도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그러니깐 다음 주에 다시 타지크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제가 거기에 껴도 되는 걸까요?
-껴도 되냐뇨. 당연히 요리사님의 공이 적지 않은데 오셔야지요. 그리고 훈장 말고도 특별한 걸 준비했으니깐 꼭 받으러 오세요.
-특별한 거라뇨?
훈장만으로도 과분한데 다른 선물까지 준비했다니. 부담스러웠지만 동시에 기대되었다.
-우리나라 여권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거의 200개 가까이 되는 건 알고 계시죠?
-네 당연하죠.
-거기다가 저희가 쓰는 외교관 여권이나 요리사님이 쓰시는 관용 여권은 더 파워가 세요.
-정말요?
일반 한국 여권의 힘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력했다.
하지만 그 위에 관용 여권, 또 그 위엔 더 강력한 외교관 여권이 존재했다.
-그 두 여권으로도 타지크는 30일만 무비자로 머물 수 있어요. 일반 여권은 비자 없이 하루도 못 지내구요.
-그렇군요.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나라에 무비자로 90일 정도는 체류가 가능하다. 하지만 타지크는 외부인에게 폐쇄적이었다. 자국민만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국왕이었기에.
-타지크 국왕이 저희한테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타지크에 머무를 수 있는 특별 비자를 내어 주시겠대요.
-오! 정말요?
-네 대사관 요리사 그만두셔도 타지크에 편하게 여행 오실 수 있어요.
사실 타지크에 몇 달이나 지낼 일은 거의 없다.
살기 위해 이민을 오지 않는 이상.
이번 특별 비자는 실질적인 효과보단 의미가 중요했다.
타지크 훈장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타지크에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의미.
훈장에 따라오는 형식적인 포상이었다.
-그래도 뭔가 명예시민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은 좋네요.
-그렇죠? 저도 외교관 생활하면서 훈장은 처음이에요. 분명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런 일에 힘을 보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하 마찬가집니다. 여튼 다음 주에 오실 수 있죠? 김용수 대사님에겐 제가 따로 말씀해 놓겠습니다.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가야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훈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쾌감은 굉장했다.
일주일 내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엔도르핀 과다 분출.
떨리는 맘으로 타지크행 비행기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