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타지크 제도
“휴가요? 혹시 타지크에 직접 가 볼 생각인 건가요?”
“네 맞습니다. 타지크라는 곳이 어떤지 직접 확인해 보고 제안을 수락할지 말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굉장한 도전 정신이 발동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도 최근에 많은 일들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 것도 있었고, 다른 나라의 공관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관광으로 유명한 나라는 아니지만 한 번쯤은 다른 나라에도 가 보고 싶었다.
“겸사겸사해서 구경도 할 겸 조금 쉬다 오면 어떨까 해서요.”
“잘 생각했어요. 최근에 너무 쉬지 않고 일했어요. 넉넉하게 휴가 내서 푹 쉬다가 와요.”
“네 감사합니다.”
“비행기 날짜가 잡히면 양 참사관에게 내가 말해 놓을게요.”
그렇게 파나르에 온 지 거의 1년 만에 다른 나라의 땅에 발을 딛게 되었다. 비자도 없이 거의 모든 나라를 갈 수 있는 한국 여권, 특히 관용 여권의 힘은 더욱 더 굉장했다.
* * *
그렇게 도착한 타지크라는 나라의 첫 인상은 건조하고, 뜨겁다?
파나르는 이미 겨울의 입구에 들어섰는데 타지크는 아직 따뜻했다. 날씨 자체가 더운 것은 아니었지만 습도가 아주 낮고, 건조하다는 것 정도는 바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방에 바다가 없이 내륙에 위치한 나라다웠다.
[장덕수 요리사]
마치 버스 터미널같이 작은 규모의 타지크의 공항에서 한글로 적힌 내 이름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대사님의 부탁 덕분인지 인원이 부족해서인지 대사 대리인 양현호 참사관이 직접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참사관님 장덕수라고 합니다.”
“오! 안녕하세요 요리사님. 듣던 대로 젊고 미남이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양현호 참사관은 통역도 동행하지 않고, 직접 차를 운전해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아마도 파나르의 윤아 같은 행정원의 티오도 없는 작은 분관이라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이미 익숙한 듯 내비게이션도 없이 능숙하게 시내로 접어들었다.
“이야 곳곳에 궁전들이 보이네요.”
“타지크는 공식적인 나라로 인정받진 못했지만 그 어떤 곳보다 여유롭고, 안정적인 곳이에요. 이곳을 다스리는 왕족이 대대로 통치를 잘하고 있거든요.”
“오 정말요? 독재를 한다거나 부정부패가 일상이 되었다는 그런 뻔한 말이 아니라서 신선하네요.”
“맞아요 보통은 그렇죠. 공식적인 나라가 아님에도 이 타지크에 우리나라 분관이 설치된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이에요.”
“어느 정도 국가로서 인정을 해 주겠단 의미군요.”
“네 맞습니다.”
양현호 참사관의 말대로 타지크 시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가 평화로워 보였다.
나 역시 열린 창문 새로 밀려드는 마른 바람을 맞고 있으니 오랜만에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오늘 점심을 드실 레스토랑입니다.”
“허어…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일 줄은 몰랐네요.”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가는 레스토랑으로 예약 잡아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 그렇긴 한데.”
나는 타지크의 식문화를 파악해 보기 위해 가장 유명한 식당을 예약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제일 유명한 식당이 제일 비싼 식당일 거란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한눈에 봐도 값비싼 음식들이 메뉴판에 박혀 있을 것 같은 레스토랑이었다. 야외에도 테이블이 널려 있었고, 평일 낮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다른 가게들에 비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부담될 정도는 아니에요.”
“정말요? 한국에서 이런 분위기의 레스토랑 가려면 거의 날 잡고 가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렇죠. 저도 여기서나 이런 데 가지 공무원 월급으론 한국에서 턱도 없어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 한번 보시고 편하게 골라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휴가도 휴가지만 일단 본래 목적이 있었으니 메뉴판을 꼼꼼하게 살폈다. 메뉴판을 보면 타지크 사람들이 어떤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알아볼 수 있는건 최대한 많이 알아봤고, 현지에서 감으로 느껴 보고 싶었다.
“타지크 사람들은 채소를 많이 먹나 봐요. 메뉴판 한 면이 거의 풀밭이네요.”
“맞아요. 파나르 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먹죠? 여기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때도 그만큼 채소를 더 챙겨 먹어요.”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인데도 이렇게 식습관이 다르군요.”
“그러니깐 외교란 게 참 어렵다는 말입니다.”
양현호 참사관의 말대로 파나르와는 꽤 거리가 먼 식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기를 많이 먹긴했지만 채소나 치즈류를 이용한 메뉴가 더 많았고, 특히 생선이나 해산물 요리가 턱없이 부족하고, 비쌌다.
값싸고, 신선한 해산물이 많은 파나르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타지크에서는 생선이나 해산물을 구하기가 힘든가요?”
“아무래도 바다가 없는 나라니까요.”
“그렇지만 근처에 파나르도 있고, 조금만 신경 쓰면 수입해 올 수 있지 않나요?”
그냥 단순히 생선을 굽거나, 손가락 마디만 한 새우를 튀겨 파는 음식인데 웬만한 스테이크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이곳이 나라가 작긴 해도 생각보다 인프라가 좋지 않아요.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도로 상태가 심각하고, 아직도 하루에 두세 번은 정전이 되거든요. 그래서 살아 있는 생선이나 해산물 같은 걸 신선하게 보관할 수가 없어요.”
“아… 그렇군요.”
화려해 보이는 도시의 모습과 다르게 안정된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타지크였다.
이 레스토랑은 그나마 손님이라도 많아서 이 정도의 해산물 요리를 갖추고 있는 거지 작은 규모의 레스토랑에선 거의 생선이나 해산물을 취급하지 않는다.
취급한다 해도 단가를 맞추려면 질 안 좋은 냉동 제품들을 사용해야 했으니.
“그러면 타지크 사람들은 생선이나 해산물에 대한 갈증 같은 건 없을까요?”
“갈증이요? 당연히 있죠. 소득 수준이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고, 국경을 넘긴 하지만 바다가 그리 멀지도 않은데 생선이나 해산물이 이렇게 비싸고, 질이 안 좋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냉동 생선은 냄새도 심하고, 맛도 없을 테니까요.”
“맞아요. 신선한 생선이나 해산물을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냉동을 입에 넣기 힘들죠. 하지만 돈이 있어도 자주 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냉동을 먹는 거죠. 영양적인 균형을 맞춰야 하니까요.”
“아하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는군요.”
“네 전체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라고 했잖아요. 엄청 신경 씁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신선한 생선이나 해산물을 구해서 먹고 싶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영양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냉동이라도 요리해서 먹는다곤 하는데 그리 만족스러운 요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성장기의 아이들을 위해서 생선이나 해산물을 포기 못 하는 부모들이 많다 했다.
“그래도 왕족들은 상황이 좀 다르겠죠? 일반인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 봤자 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테니.”
“꼭 그렇지도 않아요.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 왕족들은 욕심이 그리 많지 않아요. 타지크에서 가장 부자긴 해도 신선한 생선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건 비슷해요.”
“정말요? 아무리 그래도 왕인데?”
“뭐 억지로 구하라고 하면 매일 아침 기사를 보내서 파나르라든가 다른 나라에 가서 해산물을 사 올 수 있겠죠. 그치만 그런 사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에요.”
“아주 바람직한 왕족이군요.”
“네. 대신 국왕이나 타지크의 부자들은 보통 휴가 때 지중해 쪽으로 떠납니다.”
“왜요? 혹시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먹으려구요?”
“맞습니다. 근데 지중해 요리도 매년 가서 질렸을 거예요.”
“하하하 그 정도입니까?”
신선한 해산물을 먹기 위해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는 타지크 국왕과 부자들.
물론 지중해의 해산물 요리들도 훌륭하지만 한국이나 아시아 쪽의 해산물 요리의 수준도 만만치 않은데.
“그런데 이제 이 철도 공사가 완료되면 이런 걱정도 끝인 거죠. 값싸고 신선한 생선과 해산물들이 매일 아침 기차를 타고 넘어오겠죠.”
“그렇군요.”
내가 예상했던 왕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몇백 년 전 한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그런 왕들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그냥 하나의 사회에 섞여 사는 조금 특별한 가족들일 뿐이었다.
그들도 일반인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의미겠다.
“혹시 타지크 왕께선 슬하에 자식이 몇이나 있나요?”
“자식이요? 아주 많아요. 지금 타지크 왕이 아이들을 엄청 좋아해서 3명의 부인 사이에서 11명의 자식을 낳았거든요.”
“11명이나요?”
“네 그래서 관저에 초대할 인원도 그 아이들 11명과 왕과 3명의 부인들에 수행원들까지 해서 17명이나 됩니다.”
“인원이 많네요.”
“네. 꼭 좀 도와주세요 요리사님.”
간절하게 부탁하는 양현호 참사관을 눈앞에서 거절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도 반드시 승산이 있는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아직은 이 싸움이 승산이 있을지 없을지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면 분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데도 국왕의 가족들을 관저로 굳이 초대하려는 이유는 뭔가요?”
“이번에 협상했던 사업에 대해 같이 축하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어요.”
“뭔데요?”
“타지크에는 받은 만큼 꼭 돌려줘야 한다는 문화가 있어요.”
“예를 들면요?”
“대접을 받았으면 그에 걸맞은 수준의 대접으로 돌려주는 거죠. 대신 반대로 그 대접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면 언제든 그 관계는 깨질 수 있어요.”
양현호 참사관이 걱정하는 게 이 부분이었다. 서로의 목적이 일치해서 사업을 성사시키기는 했지만 타지크 분관 측에선 대접받은 만큼 아직 돌려주지 못했다.
그걸 제대로 돌려줄 자신이 없어 파나르에 있는 나까지 찾게 된 것이었다.
“값비싼 식사를 대접받았다면 그에 걸맞은 가격의 값비싼 식사로 돌려줘야 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정해진 규칙 같은 건 없지만 이 사람들이 날 위해 정성을 다해 준비한 게 느껴진다면 식재료의 귀천은 중요하지 않아요. 쉽게 말해 감동을 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게 더 어려운 것 같은데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요리사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희 같은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나는 신세 한탄을 하는 양현호 참사관과 나머지 식사를 끝내고 남은 시간 동안 타지크 시내를 좀 더 둘러보았다.
양현호 참사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왕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알려 주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한 가지를 더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참사관님. 타지크의 왕에게 11명의 자식이 있다고 했죠.”
“네 맞습니다. 터울도 그리 크지 않아서 제일 첫째가 겨우 15살입니다.”
“그렇군요.”
세 명의 부인이 낳았으니 형제자매라고 해도 나이가 같을 수도 있었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아직은 전부 성장기의 청소년들.
“타지크 왕이 11명의 자식들을 전부 똑같이 사랑하나요?”
“똑같이 사랑하냐구요?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정도지요. 자기 자식들은 아주 끔찍하게 아낍니다. 어떤 부인의 자식인지는 따지지 않고, 모두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모습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구요.”
“좋네요.”
“맞아요 참 보기가 좋아요. 대신 아이들을 건드리거나 욕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대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아주 잔인해지기도 합니다. 예전에 왕의 아이들에 대해 악플을 남겼던 사람 한 명이 태형을 맞다가… 그만.”
그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만찬의 전략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감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양현호 참사관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만찬 제가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