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76화 (77/202)
  • 76. 출장

    -여보세요. 파나르 대사 김용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양현호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양현호 참사관은 오랜만에 듣는 선배의 목소리였지만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첫 부임지에서 향수병에 고생하던 자신을 매일 불러내 저녁밥을 사 주던 김용수 대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양 서기관? 정말 그 내가 알고 있는 그 양현호 서기관 맞는가? 소시지 좋아하던?

    -네 맞습니다 선배님! 소시지 좋아하는 건 아직도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히 기억하지. 밥 사 준다고 매일 불러내면 집에 가고 싶다고 울면서도 소시지만 골랐잖나. 내가 여기 있는지 알고 연락한 건가?

    파나르 대사가 김용수 선배라는 말에 양현호 참사관은 전화를 걸기 전에 이것저것 기사를 찾아보았다. 이미 퇴직한 선배가 어떻게 파나르 대사까지 부임하게 되었는지, 그간의 업적들은 어땠는지 세세하게 모두.

    예전의 성정을 떠올리며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김용수 대사는 그 어느 공관장들보다 훌륭하게 업무를 이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연락드렸지요. 좀 더 일찍 알게 되지 못한 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허허허 퇴직까지 한 내가 여기에 와 있을 거란 걸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충분히 이해하네.

    김용수 대사 역시 후배의 안부 전화가 무척이나 고마울 따름이었다. 현직일 때도 비주류로 속해 자신을 믿고 따르는 후배들이 잘 없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반가운 후배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제 서기관이 아니지? 어디서 근무하고 있나?

    -네 그렇습니다. 저도 이제 엄연한 참사관이고, 타지크 제도에서 대사 대리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타지크 제도? 허허 우리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구만.

    향수병은 물론이고, 외국인 기피증이 있을 정도로 유난히 긴장을 하던 후배가 이제는 대사 대리 업무를 맡고 있는 참사관이라니.

    김용수 대사는 뿌듯하면서도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고 있었다.

    -안부 인사는 이걸로 됐고, 이제 전화한 진짜 목적을 말해 보게.

    -네? 그저 선배님이 파나르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안부차 연락드렸습니다.

    -허허 우리끼린 예의도 적당히 챙기지 그래. 매일 다른 나라 사람들 눈치 보는 것도 피곤한데.

    좋은 외교관이 되기 위해선 7가지 자질을 가져야 한다고들 한다.

    평정심, 깨끗한 마음, 정확한 판단, 겸허한 태도, 성실함, 충성, 그리고 인내.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그것 외에도 눈치라는 항목이 하나 더 들어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세하게 변하는 상대방의 말투, 떨림, 눈빛의 변화 등등.

    거기다 공기의 흐름까지도 읽어 낼 수 있는 눈치야말로 외교관의 가장 큰 자질이라 생각했다.

    김용수 대사는 양현호 참사관의 말투에서 안부 말고도 진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이런 걸로 전혀 서운해하지 않을 테니 말해 봐. 오랜만에 후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반가울 정도야.

    -그…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양현호 대사는 잠시나마 대사 대리라는 무거운 직함을 내려놓고, 십몇 년 전 막내 시절로 돌아갔다.

    제대로 된 지원을 해 주지 않은 본부에 대한 하소연, 자신이 공관장이 될 자질이 충분한지에 대한 불안함 등등.

    김용수 대사는 쏟아 내는 양현호 참사관의 울분을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들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 선배님의 요리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장 셰프?

    -네 소문을 듣자 하니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의 실력이 대단하던데요. 외교부 내에서 요리사 이름이 소문난 적이 있었던가요? 적어도 제가 근무하는 동안은 들어 본 적 없습니다.

    -허허 나도 그런 건 들어 본 적 없네. 근데 그 우리 장 셰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긴 해.

    -정말 그 요리사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어떻게 그런 요리사를 얻게 되셨습니까?

    김용수 대사는 장덕수 셰프와 함께 일하게 된 날을 곱씹어 보았다. 겨우 1년여 전이지만 그때 자신은 지금보다 성숙하지 못했고, 유치했다.

    장 셰프가 어리다는 이유로 투정을 부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장덕수 셰프 덕에 해결한 문제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후배라고 하지만 요리사를 선뜻 내어 준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양 참사관의 얘기는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이건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닌 거 같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선배님이 좀 도와주고 와라 한마디만 해 주시면 쉽게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양현호 참사관의 말대로 대사의 명령으로 요리사를 파견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고, 본부에서도 이 정도 지원은 충분히 허락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장덕수 셰프에게 하기 싫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괜히 남의 일을 도와주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외교관이 아닌 장덕수 셰프가 지게 될 것이니까.

    김용수 대사가 아무리 막아 준다 해도 본부에서 꼬리를 잘라 버리면 그만이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은 일로 리스크를 떠안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협상은 거의 다 끝난 거라 그냥 적당히 만찬 한 번이면 끝납니다. 절대 요리사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외교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절대 아니다라는 말 모르나?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양 참사관도 그건 잘 알고 있을 텐데?

    -흐… 음 그건 그렇습니다만.

    -장 셰프에게 물어보고 다시 연락 주겠네. 그래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대신 조금 빨리 여쭤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 되면 저희도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니까요.

    -걱정 말게. 내일 당장 물어보고 연락 주겠네.

    자신의 부탁에 곧바로 알겠다고 할 줄 알았지만 김용수 대사의 태도에선 다소 거리감이 느껴졌다. 세월이 많이 지났긴 했지만 예전처럼 마냥 사람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쉬웠지만 단호한 태도에 더 이상 떼를 쓸 수 없었다.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장덕수 셰프에게 이번 일은 밑져야 본전이니까.

    * * *

    다음 날 아침 관저.

    “좋은 아침입니다 대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장 셰프.”

    “요즘은 컨디션이 조금 회복이 된 것 같아 보기가 좋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이번처럼 큰일만 아니면 장 셰프가 해 주는 좋은 요리 먹고, 지나 요놈이랑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으니 건강이 나빠질 것도 없지요.”

    이젠 엄연히 중형견만큼 커 버린 지나는 김용수 대사의 식탁 옆에서 얌전히 앉아서 사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혈통은 없는 개지만 김용수 대사의 제대로 된 훈련의 성과였다.

    외교관의 7가지 자질 중 인내를 습득한 지나였다.

    “장 셰프 잠시 여기 앉아 봐요.”

    “네 대사님.”

    이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 그런지 김용수 대사가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날 부른 건지 그냥 시답잖은 잡담이나 하기 위해 자리에 앉힌 건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외교관의 자질 중 눈치라는 게 생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이제 그것도 장 셰프 눈에 보이나요?”

    “약간은요?”

    “하하하 조심해야겠군요.”

    그래도 호탕하게 웃는 걸 보니 크게 심각한 문제는 아닌가 보다. 김용수 대사는 따뜻한 녹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장 셰프 출장 한번 다녀올래요?”

    “출장이요? 요리사가 출장 갈 일도 있나요?”

    “평범한 요리사라면 거의 없죠. 하지만 장 셰프는 평범한 요리사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특별한 요리사라고 할 수도 없죠.”

    김용수 대사는 자신의 후배인 양현호 참사관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타지크 제도에서 근무하는 중이고, 요리사가 필요한 상황이란 것까지.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조심스러운지 이번 사업과 파나르와의 관계를 강조하고,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까지 해 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아니, 어느새 자연스레 설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십몇 년 만에 연락이 왔는데 후배 놈 상황이 좀 곤란하게 되었나 봐요.”

    “그렇군요. 분관에서 근무하시는 공관장님들은 더 힘드시겠어요.”

    “맞아요. 겉으로 보기엔 작은 공관이라 쉬워 보일 수 있지만 그런 곳은 오히려 아무런 인프라가 없어서 더욱 힘들어요.”

    김용수 대사의 애틋한 말투에서 양현호 참사관이라는 후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부탁을 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간절함이 느껴졌다.

    “후배를 도와주고 싶지만 이건 장 셰프 선택에 맡기고 싶어요.”

    “왜요? 대사님이 그냥 가라고 하면 저는 군말 없이 갔다 올 겁니다.”

    “무조건 장 셰프에게 득이 될 일이라면 저 역시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감으로 알 수 있어요. 100% 확실한 상황이 아니란 걸요.”

    양현호 참사관은 적당한 수준의 대접만 이뤄진다면 별 탈 없이 넘어갈 거라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노련한 김용수 대사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번 일은 절대 만만하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면 하지도 않은 일까지 전부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렇군요. 저 역시 대사님의 부탁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즐겁게 출장을 떠났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선택해야 할 상황이라면 승산 없는 싸움엔 달려들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몇 년 후에 청와대에 들어가기 위해선 깔끔한 커리어 관리가 절실했다. 국회 의원처럼 청문회를 통과해야 하지는 않겠지만 요리사로서 일한 과거 정도는 조사가 들어갈 것이다.

    좋지 않은 커리어는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나에게도 유리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전적으로 장 셰프에게 맡기고 싶어요. 상황은 전부 설명했고, 나 역시 후배에게 내 맘대로 하지 않을 거란 것도 말해 놨습니다. 편하게 생각해 보고 말해 줘요.”

    “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나를 대하는 김용수 대사의 태도에선 차별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단 이유로 그냥 넘어갔던 일들도 모두 내 의사를 묻고, 상의하며 진행했다.

    “근데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기 전에 일단 그 왕족이라는 분들이 어떤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요?”

    “파나르와 관련된 인사라면 대충 정보가 있을 텐데 타지크 제도에 대해선 저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거든요. 간단하게라도 성격은 어떠한지, 어떤 음식을 주로 먹는지, 건강 상태는 어떠한지 등등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야 합니다.”

    비록 공식적인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의 자치주 정도의 힘과 재력을 가지고 있는 타지크의 왕과 가족들.

    그냥 단순히 귀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순 없었다.

    이런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비싸고 귀한 식재료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사님.”

    “네 장 셰프 말해 보세요.”

    “타지크 제도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죠?”

    “네 비행기로 3시간 안으로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파나르에선 직항도 자주 있어서 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

    나도 겁먹은 사람처럼 무조건 제안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만약 타지크 분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확실히 만족시키겠다는 각오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 결정은 파나르에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면 저 휴가 좀 사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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