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75화 (76/202)
  • 75. 감사팀의 변화

    감사팀장은 모든 무기를 잃은 상황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리더로서 팀원들의 불안해하는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서겠지.

    이번엔 아무리 완패했다지만 후배들에게 이런 선례를 남길 수 없었다.

    감사팀은 내부에서도 최대한 불편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어야 국민들의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희의 무례함에도 먼저 좋은 제안을 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나르 대사관 전체를 우수 사례로 보고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작은 공관을 어떻게 나눠서 성과를 평가하겠다는 겁니까?”

    옆에서 듣고만 있던 김준우 서기관이 나서서 소리쳤다. 준우는 파나르에 오고 나서부터 줄곧 파나르 대사관의 총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스트레스가 굉장했다.

    숫자를 싫어해서 문과를 선택했고, 외교관의 길로 들어선 거였는데….

    최선을 다해 방어한 불시 감사의 성과를 인정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저희가 딜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사무실의 예산 관리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네?”

    “서류 정리나 영수증 관리 등은 ‘양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정도는 어느 공관을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준우 서기관은 실망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총무 업무는 처음이었고, 꼼꼼하게 처리했다곤 하나 본인만큼 하는 사람은 널렸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이 징계를 받아야지 준우처럼 관리한 사람들이 칭찬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장덕수 셰프의 주방, 식재료 관리는 정말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술이나 음료처럼 관리하기 쉬운 재료뿐 아니라 모든 식재료를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 건 처음 봅니다.”

    사용량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양념을 빈 페트병에 담아 사용하고, 매번 날짜를 적어두는 것.

    공금으로 구매한 재료들과 사적으로 구매한 재료들은 완전히 공간을 분리해서 사용한 것.

    심지어 냉장고마저 작지만 따로 하나를 사용하고 있었다.

    “감사팀에서 일한 지 10년 정도 지났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고, 경력이 많은 요리사분들께서도 이 정도로 관리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소금, 설탕까지 건드는 건 저조차도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하하하 그만큼 절박하셨던 거겠죠.”

    “네….”

    감사팀장은 옆에서 지켜보던 나에게로 다가와 몇 가지를 물었다.

    “요리사님은 재외 공관 요리사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파나르가 처음입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쉽게 믿어지지 않네요. 이게 바로 타고난 재능일까요?”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타고난 재능이라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40년간의 요리사 경험이 아니었다면 이런 불시 감사를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팀원들은 팀장의 지시에 따라 관저 주방과 식재료 창고의 사진을 찍고, 식재료 관리 대장 등을 확인했다.

    아까보다 좀 더 꼼꼼하게 주방을 둘러보자 수시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아 구석구석에 먼지 하나도 없네요.”

    “잘은 몰라도 여기까지 깨끗한 거면 평소에 관리를 했다는 의미겠죠?”

    식재료 관리뿐 아니라 위생 관리까지 완벽에 가까운 주방을 보자 감사팀 역시 차라리 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평소 하지 않던 우수 사례를 보고하면 다른 직원들이 자기들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억지로 영웅을 만드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

    모든 부분에서 큰 허점이 없는 파나르 대사관의 주방은 감사팀의 입장에서도 희망이었다.

    처음 계획했던 성과는 얻지 못했지만 적어도 감사팀은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맘 편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 * *

    외교부 감사팀.

    “그래서 결국 파나르 대사관은 하나도 털지 못하고 왔다?”

    “네 그렇습니다. 없는 죄를 억지로 만들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야 인마. 누가 억지로 만들라고 했냐? 숨겨져 있는 걸 캐라고 했지.”

    “그 숨겨져 있는 것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팀 부장은 보고를 들으면서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이번에 파나르로 보낸 팀장은 절대 빈손으로 돌아온 법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항상 믿고 의지했던 부하 직원이었다. 그런 부하 직원의 입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대신 부장님의 명성에 금이 가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역시 뭔가가 있었던 거야. 왜 괜히 사람 맘을 졸이게 하는 거야.”

    한껏 기대하는 부장에게 감사팀장은 우수 사례 보고서를 건넸다. 그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 본 부장은 결국 최소한의 유혈로 끝이 나려면 이 보고서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 재외 공관에 사진 자료랑 파나르 요리사 인터뷰 내용 등 정리해서 공문 돌려. 그래 이참에 우리 감사팀 이미지도 좀 쇄신해 보자. 매번 다른 부서 갈 때마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경계하는 눈빛 보기도 질리는데….”

    “맞습니다. 이런 좋은 사례로 보고될 수도 있다는 뉘앙스도 풍겨 주면 신입 외교관들의 동기 부여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전의 외교관들과는 다르게 젊은 외교관들은 강한 바람에 순응하지 않고, 더욱 강한 태도로 맞서곤 했다. 그런 일들이 잦아질수록 잡음은 점점 더 커질 테니 감사팀 역시 태도의 변화가 필요했다.

    공관 전체에 해당하는 우수 공관 선정 외에 감사팀에서도 이러한 사례들을 만들어 주면 외교부 내에서도 새로운 훈풍이 불 거라 예상했다.

    장덕수 셰프의 사례가 공문으로 돌고 나자 감사팀에는 문의 전화가 한층 많이 늘었다.

    예산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장부 관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궁금해도 그것도 모르냐며 혼을 내거나 괜한 확인이 들어올까 봐 물어보지도 못했던 질문들이었다.

    감사팀에서도 기대했던 반응들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 * *

    주타지크 제도 한국 분관.

    “양 참사관님. 저희 어떻게 합니까?”

    “휴우… 진짜 큰일이네요.”

    “관저에 오고 싶다 할 때 밖에서 만나자고 해 보시지 그랬어요.”

    “서기관님은 그 상황에 그 말이 나오겠어요?”

    국왕이 다스리는 파나르 인근의 작은 나라 타지크 제도, 그리고 그곳의 한국 분관.

    정상적인 대사관이나 영사관의 규모의 공관이 설치되긴 어려워 작은 분관이 대신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대사 대리 업무를 맡고 있는 양현호 참사관은 방금 타지크 제도의 대통령과도 같은 국왕과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나오는 길이었다.

    “국왕의 가족이 전부 직접 우리 관저로 오고 싶다고 직접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요.”

    “그렇긴 한데 우리 관저로 오면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못한 대접을 받을 텐데요.”

    “그러지 않도록 준비해야죠.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서기관님.”

    “참사관님처럼 우리 분관 상황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이시면 그게 안 될 거란 걸 잘 아실 텐데요.”

    이번 만찬은 타지크 분관의 존재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철도 사업을 성사시킨 아주 의미 있는 만찬이었다.

    이곳에 한국 기업이 들어와 엄청난 규모의 철도 공사를 진행하게 되면 인근의 파나르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 타지크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실크 로드가 열리는 것이다. 마치 수에즈 운하처럼.

    추후 그 규모가 얼마나 커질지 모르는 이 사업에 국가 간의 사인만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양현호 참사관이 맘에 든 타지크의 국왕이 구두로 무조건 사인을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양현호 참사관은 그 말을 100% 믿지 않았다. 타지크만의 특이한 문화가 있었기 때문.

    분관은 정식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아니라 재외 공관 요리사가 없는 건 물론이고, 타지크엔 제대로 된 한식당 하나도 없어서 수준 높은 한식을 제공할 수가 없었다.

    오늘 타지크 왕에게 살면서 본 적도 없는 어마어마하고 진귀한 음식들을 대접받았는데….

    타지크 분관에서 그들에게 대접해 줄 수 있는 한식이라곤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사 대리 양현호 참사관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참사관님, 본부에다가 요리사 파견 좀 부탁해 보면 안 될까요?”

    “본부에요? 겨우 행사 한 번 치르러 이곳까지 올 만한 실력 좋은 요리사가 있을까요?”

    “겨우 행사 한 번이라뇨. 이게 얼마짜리 사업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본부에서 확실한 지원만 해 준다면 충분히 구할 수 있죠….”

    “이미 본부에서 원했던 협상은 끝이 났고, 뒷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 써 주지 않을 겁니다….”

    “그건 타지크 문화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하는 거죠.”

    양현호 참사관은 본부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너희들끼리 어떻게든 잘 해결해 봐라,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라 정도의 지시가 내려올 게 뻔했다.

    하지만 협상이 잘되었다고 하나 왕가가 초대될 관저 만찬에서 실수라도 생기면 언제든지 협상은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왕이 말이 곧 법인 나라였기 때문.

    “교민들 중에 한국 음식 좀 잘하는 사람 없을까요?”

    “교민이라고 해 봤자 7명이 전부인데요….”

    “하….”

    “한국에서 파견이 힘들면 인근의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요리사들에게 지원 요청을 해 보면 어떨까요?”

    “인근 나라들이요? 공관장들이 자기 요리사들을 쉽게 내주려 할까요? 본인들 업무도 바쁠 텐데.”

    “그렇긴 해도 시도도 안 해 보고 포기할 순 없잖아요.”

    “그렇죠…. 근처에 괜찮은 요리사가 있을까요?”

    양현호 참사관의 물음에 서기관은 얼마 전 감사팀에서 발송되었던 공문이 떠올랐다.

    분명 감사팀에서 보낸 공문이었지만 그 내용은 한 요리사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아! 참사관님. 파나르가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죠?”

    “파나르요? 파나르는 비행기로 3시간이면 가죠. 왜요?”

    서로 누가 더 깊은 한숨을 쉬는지 내기라도 하듯 한숨을 내쉬며 걷던 두 사람은 어느새 분관에 도착해 있었다.

    “잠시만요.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공문이네요? 발신자는 감사팀이고, 갑자기 이건 왜요?”

    “예산 관리하는 서기관들에게 온 공문인데, 각 공관 요리사들에게 이런 식으로 식재료를 관리하라는 지침 같은 거예요.”

    “우린 애초에 요리사 티오도 없는데 누굴 약 올리나?”

    “그래서 굳이 참사관님께 보고드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 우수 사례로 소개되는 요리사가 파나르 대사관의 요리사입니다.”

    “정말요?”

    “네 요리사는 우리랑 큰 관련이 없어서 그냥 넘긴 적이 많았는데 파나르 요리사 이름이 요 몇 달간 제법 많이 거론되었어요.”

    “뭐 하는 사람이길래 외교부에 요리사 이름이 소문이 나요?”

    양현호 참사관은 어느새 서기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제대로 정리도 안 된 파나르에서 꽤 굵직한 행사들을 성공적으로 진행했었나 봐요. 거기 대사님도 밑질 것 없는 사람이라 이것저것 다 커버도 쳐 주고, 지원도 해 주고 그러나 봐요.”

    “밑질 게 없는 사람이라뇨?”

    “참사관님은 모르셨어요? 파나르 대사님이 퇴직했다가 다시 복직하신 분입니다.”

    “정말요? 그런 게 가능해요?”

    “파나르에 가려고 하는 현직 공관장들은 없으니까요.”

    “그렇겠네요. 거기 대사님 성함이 뭐래요?”

    “파나르 대사님이요? 아마 성함이 김용수 대사라고 했나?”

    “김용수 대사요? 몇 년 전에 퇴직하신 김용수 대사요?”

    양현호 참사관은 몇 년 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에 귀가 번쩍 뜨였다. 자신이 처음 부임했던 곳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난 김용수 대사. 그때는 지금의 자신과 같은 참사관이었다.

    사람으로서 충분히 존경할 만했지만 외교관, 아니 직장 선배로선 조금 유연함이 부족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관장을 못 하고 퇴직을 할 줄은 몰랐는데, 결국 이렇게라도 공관장을 하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용수 대사와 같이 근무해 본 적 있습니다.”

    “정말요? 친하셨어요?”

    “불편한 사이는 아닙니다. 제가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파나르라면 이 사업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게 잘되면 파나르 기업들이나 교민들도 분명 반길 겁니다.”

    “알겠습니다!”

    본래의 목적은 파나르 요리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함이지만 양현호 참사관은 반가운 이름에 끌려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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