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제안
“소금, 설탕, 간장, 고추장 같은 양념장 좀 보여 주세요.”
뭔가 작은 거 하나라도 찾아야겠다는 마음은 이해한다지만 해도 해도 너무 치사하다.
재료나 술 같은 건 잘 정리되어 있어, 손대지 못했으니 결국 양념까지 확인해 보겠다는 의미.
소금, 설탕 같은 걸 무게를 재 놓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급하면 이것저것 사용하기도 하니 꼬투리를 잡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관저에서 진행했던 오, 만찬 메뉴 전부 가지고 와 봐.”
“네 알겠습니다.”
감사팀은 팀장은 자기 팀 막내에게 지금까지 진행했던 오, 만찬 메뉴판을 보며 사용한 양념장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코다리찜엔 어떤 양념들을 사용했죠?”
“된장, 간장, 고춧가루, 소금, 후추 이 정도가 들어가겠네요.”
“그럼 냉채에는요?”
“간장, 겨자, 설탕, 물엿이요.”
그들은 메뉴를 토대로 정리한 자료를 가지고 양념장이 들어 있는 진열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닫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이 통에 적혀 있는 게….”
“날짜입니다. 오, 만찬 날짜요.”
“날짜요?”
“네 오, 만찬 행사나 대사관이 주최한 행사의 날짜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안지용 참사관도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못할 거란 생각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초조해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을 잡으면 한바탕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직속 선배도 아니고, 김용수 대사보다 자신이 들이받는 편이 뒤끝이 덜하기 때문.
하지만 내가 이 정도에 걸려들 초짜로 보이나?
사무실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관저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사팀의 완패다.
“대사님과 제가 일상식, 즉 사적으로 사용하는 재료나 양념장들은 이곳에 보관하며 자유롭게 쓰고 있고, 공금을 이용해 구매한 양념이나 소스류는 전부 빈 페트병에 옮겨 사용한 날짜마다 눈금을 그어 놓고 양을 체크하고 있습니다.”
“아….”
“메뉴랑 대조해서 확인해 보세요. 양념량이 좀 과하게 사용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레시피를 읊어 드리겠습니다.”
사실 양념장을 좀 과도하게 썼다고 해도 그 정도로 문제를 삼을 순 없다. 사용하지 않은 재료를 구매했다면 문제 될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레시피가 바뀌었단 말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감사팀에게 좀 더 강하게 들이댔다. 이것까지 꼬투리를 잡는 소인배로 보이고 싶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라는 의미로서.
“하….”
“관저는 더 이상 문제없는 거죠?”
“…….”
이제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을 굽히고 돌아간다 한들 별것도 없었다. 그냥 경고로 끝날 만한 사안들 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관저는 없을 거란 생각에 당당하게 여기로 왔는데….
파나르 대사관만은 달랐다. 감사팀장 역시 이런 경우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새벽에 도착하자마자 대사관으로 쳐들어와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감사팀 팀원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요리사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내 집을 어지럽히러 온 사람들이라고 할지언정 일단 집에 들어온 손님을 그냥 보내려니 괜히 맘이 불편했다.
그들의 상황이 안타깝기도 했고, 이걸 잘 이용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득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용수 대사에게 다가갔다.
“대사님. 혹시 괜찮으시면 감사팀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건 어떨까요?”
“식사요? 그럴까요?”
“네 새벽부터 짐도 못 풀고 바로 여기로 왔을 텐데 피곤할 겁니다. 밥 먹을 시간도 당연히 없었을 거고.”
“음… 그렇긴 한데 조금 괘씸해서 챙겨 주고 싶지 않은데요. 장 셰프는 괜찮아요?”
70이 넘은 나이라도 매사에 너그러울 순 없는 일이다.
본부의 명령이었다고 하나 신이 나서 대사관으로 들어오던 감사팀의 표정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김용수 대사의 맘 한편엔 여전히 작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이것도 관저 행사로 진행할 수 있으면 대접 한번 하시죠. 저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아이디어요?”
“네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입니다.”
나는 김용수 대사와 안지용 참사관, 김준우 서기관을 따로 불러 내 생각을 전했다.
세 사람은 내 아이디어를 듣고 급격히 화색이 밝아졌다. 어차피 이대로 끝나면 서로 좋을 게 없었고, 성공만 한다면 마음 한구석에 세게 박혀 있던 앙금이 완전히 사라지는 아이디어였다.
김용수 대사는 곧바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팀장님.”
“네 대사님.”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감사팀장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돌아가서 어떻게 변명을 해야 조금이라도 덜 털릴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비행기 타고, 잠도 못 주무시고 일하시느라 피곤하시죠?”
“…네?”
“일단 자리에 좀 앉으시죠.”
김용수 대사의 입에서 원망 또는 호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다정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장덕수 요리사의 실력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
“물은 엎질러졌으니 식사나 하고 가시라는 말입니다.”
왜 자기들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물소 사냥을 마치고 지쳐 있는 사자의 뒤를 공격하는 하이에나들처럼 달려든 우리에게 왜 이런 대접을….
“여튼 우리 장덕수 셰프의 소문은 들어 보셨죠?”
“아… 네. 본부에서도 이름 한 번씩은 들어 봤습니다. 외교관들이 아니라 요리사가 유명해진 적은 처음이라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허허허 이거 조금 질투가 나는군요.”
“대사님의 명성 또한 만만치 않으니 걱정 마십쇼.”
감사팀 역시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맞춰 공손한 말투로 김용수 대사를 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준비한 거라 대단한 요리는 할 수 없었고, 직접 기른 콩나물로 끓인 얼큰한 콩나물국밥 한 그릇씩을 대접했다.
“자, 급하게 차린 거라 가짓수는 많이 없지만 양은 충분하니깐 넉넉하게 드세요.”
“와아….”
파나르는 한국보다 환절기가 빨라 제법 쌀쌀해진 상태였다. 차가운 낯선 바람과 피곤한 몸상태면 이런 뜨끈한 국물 요리가 생각이 나기 마련.
감사팀은 짧은 인사 한마디와 함께 콩나물국밥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떨어진 게 확실했다.
“입맛에 좀 맞습니까? 육수도 제대로 낼 시간이 없어서 대충 끓인 건데.”
“대충 끓였는데 이 정도라구요?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요리사의 이름이 유명해진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건 거짓말 안 보태고 제 인생 국밥입니다.”
“하하하 다행입니다.”
한국이 아니라 콩나물국밥에 큰 기대가 없었을 거고, 몸도 피곤한 상태라 평소보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밥이 더 맛있게 느껴졌을 것이다.
따끈한 국물이 차가워진 몸을 데워 주고, 긴장했던 근육들을 풀어 줬으니 그 쾌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인생 국밥이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김용수 대사는 이때를 노려 입을 열었다.
“이번 불시 감사는 큰 문제 없이 넘어가는 거라 생각하면 될까요?”
뜨끈하고 얼큰한 콩나물국밥 덕에 잠시 본분을 잊은 감사팀원들은 다시 한번 자리를 고쳐 앉았다.
큰 문제는 없을지언정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예산 사용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국경일 행사 같은 큰 행사를 치르는 데 출처가 불분명한 돈을 사용하고, 그것을 보고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음….”
“저희는 그걸 본부에 보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걸 굳이 보고할 필요가 있나요? 본부에서도 크게 관심을 가질 것 같진 않은데요.”
“그… 그건 그렇지만.”
감사팀은 같은 회사의 소속이면서도 같은 회사 사람의 고통이나 아픔이 곧 자신들의 성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한 번 꺼낸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용수 대사도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불안하시죠?”
“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아니 아무것도 털지 못했다고 질책을 당할까 봐 불안하신 거죠?”
김용수 대사는 다소 직접적인 표현에 감사팀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김용수 대사의 표정은 ‘다 들어 줄 테니 편하게 말해 봐’라는 듯 온화했다.
김용수 대사보다 30살은 어린 감사팀장은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솔직히 이대로 돌아가면 저희는 큰일납니다.”
“큰일까지야?”
“사실 파나르 대사관 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마자 제가 신이 나서 달려들었거든요. 딱 봐도 털 게 많은 곳이었으니까요.”
불안했던 정국, 문화처럼 자리잡은 뇌물, 퇴직 후 재부임한 공관장, 그리고 아직 경험이 부족한 요리사까지.
10년이 훌쩍 넘는 경력의 감사팀장이 보기에 이곳은 거의 뷔페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털면 터는 대로 먼지가 나오고,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파나르는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이제 와서 이런 말 드리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공무원이 성과에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잖습니까.”
“이해합니다.”
우리 파나르 대사관에도 김준우 서기관 같은 사람이 있듯이 감사팀에도 또 다른 공관이나 부서에도 성과에 목을 메는 사람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외교관이기 전에 그냥 평범한 직장인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요?”
“제안이라뇨?”
“네 감사팀은 돌아가서 이번 출장의 성과를 자랑할 수 있고, 저희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제안이요.”
“그… 그런 방법이 있나요?”
교묘하게 조작한 회계 자료를 찾아내고, 부정행위를 발견하는 것이 감사팀 성과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감사팀은 남의 잘못을 발견하는 것만이 성과일까?
“저희 파나르 대사관의 불시 감찰을 우수 사례로 보고해 주세요.”
“우수 사례요?”
“네 각국의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인적 자원이든 뭐든 판매를 할 수도 있고, 그것을 국가 예산으로 포함시켜 업무를 진행할 수도 있다는 사례를 저희가 보여 줬습니다.”
내가 김용수 대사에게 제안했던 내용은 감사팀에게 이번 사례를 우수 사례로 본부에 보고하라고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놓고 털러 온 감사팀이 아무것도 털지 못했다면 그건 아주 우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장덕수 셰프가 했던 업무는 관저에서 근무하는 요리사들에게 공적인 재료와 사적인 재료 관리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보여 줄 수 있는 매뉴얼로 만들어도 될 겁니다.”
“……!”
번거롭지만 나처럼 관리하면 오늘 같은 불시 감찰은 몰라도 정기 감사에선 절대 문제 될 만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
“평소완 조금 다른 방식의 보고를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감사팀원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팀장은 잠시 팀원들과 함께 자리를 비워 의견을 나누고 돌아왔다.
“좋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저희도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대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해 보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감사팀으로선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평소완 다른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해 보기로 결정했다.
대신 모든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희가 우수 사례로 보고할 내용은 파나르 대사관 전체가 아닙니다.”